[스페셜2]
[특집] 진부한 신세계, 예술을 창작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두 방향의 생각-희망편과 절망편
2024-07-09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5년 전, 그러니까 2019년 8월13일에 키튼 패티라는 코미디 작가가 ‘1천여 시간 동안 봇에게 <배트맨> 영화를 보게 한 뒤 각본을 쓰게 했다’면서 그 첫 페이지를 트위터(트위터! 트위터! 트위터다! 누가 이걸 X라고 부르는가?)에 올렸다. 그 각본은 온라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에 바탕을 둔 코믹북 버전도 나왔다.

굉장히 재미있는 각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과 문학과 만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엉성하게 인간의 창조물을 모방하고 있는데 그게 정말 이상하고 신기했다. 그 결과 “나는 박쥐들을 박쥐처럼 마신다”, “알프레드, 로빈을 낳으세요”와 같은 초현실주의 시와 같은 문장들이 터져 나온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건 그 각본을 쓴 게 봇이 아니라 키튼 패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각본은 인간을 흉내내는 가상의 인공지능을 주인공으로 한 전통적인 SF였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2019년의 인공지능은 키튼 패티가 쓴 것 같은 각본을 쓸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수천, 수만번의 시도를 하면 가능했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나는 몇분 전에 클로드에게 배트맨과 조커가 나오는 이야기를 써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런 텍스트의 다발을 얻었다.

조커가 버튼을 누르자 천막의 스크린에 고담시의 여러 장소가 비쳤다. 각 장소에는 조커의 독가스통이 설치되어 있었다.

”30분 후면 고담시 전체가 웃음바다가 될 거야. 하하하!”

배트맨은 주저하지 않고 조커에게 달려들었다. 둘 사이에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다. 조커의 광기 어린 공격을 피해가며, 배트맨은 독가스통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배트맨은 마지막 힘을 모아 조커를 제압하고, 중앙제어장치를 파괴했다. 도시는 다시 한번 위기를 모면했다.

물론 더 나아질 수 있다. 내 경험상 가장 재미있는 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소재들을 최대한 무작위적으로 뽑아 뒤섞는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쓰게 한다.

고담과 파리, 현실과 환상,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곳. 배트맨과 조커, 영원한 균형의 축, 재봉틀 바늘로 세계를 꿰맨다.

화장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기압의 변화가 역사를 다시 쓴다. 루브르의 유물과 고담의 전설들, 대홍수 속에 새로운 신화가 된다.

조금 낫다. 하지만 아래의 텍스트가 위의 텍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클로드는 내가 제시한 화장지, 루브르, 기압과 같은 단어들을 갖고 최대한 무난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 조합이 부조리하기 때문에 그 평범함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아주 성공적이지는 않을 뿐이다. 당연히 키튼 패티의 <배트맨>을 넘어서기도 어렵다.

다른 인공지능들, 그러니까 DALL·E와 같은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과 같은 것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프롬프트에 교활한 복잡성을 넣어도 그 결과물은 무난함의 최단거리를 걷는다. 이 결과물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실수와 오해에서 나온다. 나는 DALL·E가 그린 그림에 나오는 정체불명의 사물들을 따로 모아 저장한 폴더가 있다. 녹아내리는 전화기, 손과 융합된 푸른 장미, 손잡이가 두개이고 총구가 없는 권총. 정말 DALL·E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물건들인데, 아마 이것들은 기능이 개선되면서 이상하게 그려진 손들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갈 것이다.

물론 이것들로 재미있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고 실제로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건 지금의 CCTV 카메라들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걸작에 맞먹는 이미지를 무한히 생성해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내가 랜덤 프롬프트로 만들어낸 텍스트와 이미지 상당수는 제법 괜찮고, 적절한 편집이 개입되면 더 좋아질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자동기술에 기반을 둔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건 안 하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만든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들의 지향점과 대중의 요구 상당수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진정성 있는 걸작들을 원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사람들 대부분이 원하는 건 전형화된 평범함이다. 이 평범함은 꼭 인공지능을 통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 시대가 되고 모두가 텍스트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자 이건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이 세계에서도 몇몇 특별한 작품들은 더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무난함, 평범함, 시시함의 수요는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포르노처럼 소비된다. 정말 선정적인 것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대부분 생성형 인공지능은 자체 검열 기능이 있다) 자신의 욕망에 맞춘 가장 안전한 것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이런 걸 더 잘 만들어내는 도구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요구에 완벽하게 맞는 평범한 무언가를 몇 초 만에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는 진짜 인간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무언가를 굳이 감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나올 것이다. 모두가 메디치 가문이 되는 ‘멋진 신세계’이긴 한데, 이게 인간 창작자와 감상자에게 좋은 미래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좋은 예술은 위험부담이 있는, 타자와의 예측불허인 대화여야 하지 않는가. 예술이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제공해준다면 그 감상의 행위는 얼마나 공허해질까. 우리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찮기 그지없다.

긍정적인 면을 보자. 생성형 인공지능은 그때까지 대자본의 투자만으로 가능했던 이미지와 영상을 가난한 창작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앞으로 나올 인공지능 기반 창작 영화들은 그 기술의 불완전성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기술은 언제나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즐거움과 위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린 그게 무엇인지 곧 보게 될 것이다. 기술의 제한에는 그 뒤에 다가올 필연적 미래를 잠시 막는 것 이상의 기능은 없다.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해보자. 아마 지금의 생성형 인공지능이 창조적인 예술가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은 직선으로 진화하지 않는다. 지금의 생성형 인공지능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을 예언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미래에 다가올 무언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고 진정한 예술적 감흥을 제공해주는 창작물을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조건하에서 생성해내고 우리가 그것들을 인간의 창작물과 구별해내지 못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여전히 자아와 영혼이 없는 존재일 가능성도. 그런 날이 오면 인간의 마음에 창작은 오로지 스포츠적인 의미만 있을지도 모른다. 자동차와 기차와 비행기의 시대에 인간이 두 다리로 도달할 수 있는 속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지. 거기에 의미가 있는 거지.

하지만 그 창작물이 인공지능의 편집을 거쳐 여분의 가치를 확보하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