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계의 눈이다. 기계인 나는 당신에게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나 자신을 인간의 부동성에서 해방시킨다.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물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멀어진다.” - 지가 베르토프, <키노아이 선언문>
편지가 도착한다. <우리와 상관없이>의 한 장면에서 한밤의 골목을 걷던 정선(곽민규)의 바지 주머니엔 편지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정선은 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도 받은 사람도 아니다. 그건 정선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 이영(조소연)이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함께 찍은 영화의 기억을 잃어버린 화령(조현진)에게 건넨 편지다. 그는 편지의 주인이 아니며 이영이 화령에게 편지를 건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정선은 증세를 회복하고 퇴원한 화령의 집에 들러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화령을 사랑했고 그 문제로 인해 이영과 헤어졌음을 고백하고 오는 길이다. 편지를 매개로 연결된 화령과 이영의 이야기에 정선이 개입하는 순간 물리적으로 전해질 수 없는 사물이 그의 주머니에 깃들어버린다.
장면의 불가사의한 배열은 단지 도식적인 배열의 유희에 그치지 않고 사물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정선이 바라보는 편지는 앞서 카메라가 지켜본 이영의 편지와 조금 다르다. 수신인과 송신인, 외형적 형태와 내용의 맥락은 그대로지만 편지에 적힌 문장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이영이 보낸 편지에는 화령에 대한 존경과 믿음을 호소하는 문장이, 정선이 꺼내든 편지엔 죄와 용서를 고백하는 뉘앙스가 주를 이룬다. 한장의 편지를 공유하는 두 장면에서 믿음과 죄는 유사한 모양을 이루며 꼬리를 물고 서로의 영역에 번져간다. 그리고 정선이 바라보는 편지가 이영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장면이 끝나면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화령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이 연속된 장면은 꿈처럼 다가온다. 그런데 정확히 누구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선의 주인인 정선의 꿈, 목소리의 주인인 이영의 꿈, 잠들어 있는 화령의 꿈, 무엇보다 그 모두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가 꾸는 분열적인 꿈.
숏이 하나의 꿈이라면, 수많은 숏의 연쇄와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 어떤 질서를 형성할 수 있을까? 혹은 서로 다른 장면이 하나씩 나열되는 순간 불가피하게 만들어지는 영화의 일관된 질서로부터 어떻게 달아날 수 있을까? 유형준의 <우리와 상관없이>는 올해 동안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이 영화의 연출자는 장면을 고정된 의미 체계로 설정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불안을 화면 내부로 틈입해 숏을 지탱하는 안정감을 박탈한다. 거기서 이 영화는 스크린 위에 위태로운 내기를 건다. 영화라는 경험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흐트러트리는 모순적 감각을 향해 <우리와 상관없이>라는 영화 전체를 내걸고 있다.
영화라는 주사위 놀이
1부와 2부로 구성된 <우리와 상관없이>가 스크린에 제안하는 게임의 규칙은 단순하다. 1부는 영화와 관련된 서로 다른 네 집단(영화의 프로듀서, 영화에 함께 출연한 이영, 영화감독, 정선과 선배 남자배우)이 기억을 잃어버린 화령을 찾아와 영화에 관한 기억을 들려주는 구성을 취한다. 하나의 상수(화령)에 네개의 변수가 충돌하며 서로 다른 결과를 산출한다. 하지만 이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대화로부터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발전으로 향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2부가 시작되면 서로 다른 정보와 상태가 일으키는 혼란은 터무니없는 크기로 번진다. 2부에서 스크린 속 인물들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무작위적인 상황 속에 다른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중년의 여배우는 딸을 둔 어머니였다가, 아들을 둔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두 젊은 남녀는 사랑하는 사이였다가 헤어진 연인이 된다. 부부는 결별한 관계였다가 재회한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1부와 2부가 접속되는 맥락을 캐묻거나, 장면이 전환되는 인과율의 논리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화면에 출현하는 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왜 직전 장면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지금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일관된 맥락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지각적 혼동 상태가 펼쳐진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질병’과 ‘기억’, 그리고 흔적처럼 남겨진 ‘영화(만들기)’라는 중심에서 출발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의 장면이 쌓여나갈수록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다면적이고 잠재적인 사건의 숏을 증가시킨다.
두개의 주사위를 던지는 어린아이를 떠올려본다. 아이는 공중에 주사위를 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 눈을 확인한다. 이 행위는 거듭해서 반복될 것이다. 아이의 몸짓과 손에 쥐어진 물건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매번 다른 높이와 속도로 떠오르고 추락하는 주사위의 운동이 아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의 눈은 항상 다른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반복 강박에 사로잡힌 이 주체는 계속해서 주사위의 운동을 연출하고 눈앞에 나타난 결과를 무너뜨린다. 어린아이의 주사위 놀이는 제한된 요소를 가지고 무한히 변주되는 결과와 대면한다. 각각의 순간이 제공하는 감각적 쾌락에 사로잡히면서도 우연에 열린 반복 자체에 복무할 때 주사위 놀이는 비로소 유효한 영화적 비유로 성립할 수 있다.
<우리와 상관없이>를 어린아이의 주사위 놀이에 빗댈 수 있다면, 이 영화가 기억을 잃어버린 한 인물(화령)의 개인적 무의식을 포획하면서 또한 영화라는 집단적이고 비인칭적인 기계장치의 무의식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장면들은 개인적 무의식과 비인칭적 무의식이 충돌하고 협상하는 절차를 탐색하기 위한 재료들의 잠재적 결합이다. 이 영화에서 개개인의 무의식적 충동과 열망은 영화라는 매체의 무의식에 오염되어 있다. 정선과 선배 배우가 화령을 방문한 장면에서 공간에 남아 있던 꽃 냄새(앞선 장면에서 프로듀서가 두고 간 꽃이 남긴 흔적이다)와 방문객들의 술 냄새가 뒤섞이는 것처럼,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뒤섞여 불가피하게 하나로 묶인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삶의 한 가지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숏이라는 무대 위에서 목적지 없이 변형되는 외적 상태에 관한 무한한 기록이다.
푸코가 인용한 보르헤스의 중국식 백과사전을 영화적 숏의 언어에 대입한다면 영화의 화면은 결코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분류되지 않을 것이다. 인과율은 다른 곳에 있다. 인물의 장면, 말의 장면, 골목의 장면, 편지의 장면이라는 또 다른 유기적 질서로 숏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정리되지 않는 지각의 연쇄 안에서 내기를 건다. 당신은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보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저 평면적인 흰 벽 앞에서 바라보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전하는 경험인가, 이야기가 건네는 허구적 질서인가, 혹은 부재하는 물질인가. 그런데 이 내기는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 자신에게 제기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렇게 주사위 던지기를 실행하는 주체이면서 던져지는 주사위의 매혹에 사로잡혀 있는 어린아이의 실천에 가닿는다.
인간과 카메라의 불화, 영화적 인식의 부정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우리와 상관없이>는 자동주의(Automatisme)라는 초현실주의의 유산을 재구성하는 영화다. 영화가 재구성하는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은 과감한 상상력의 발현이나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와 상관없이>가 추구하는 자동주의는 의지적인 자아의 개입과 기계장치의 자동적 완성이 빚는 대립이다. 하나의 완결된 영화를 창조하는 과정 안에 조각난 여러 가지 숏의 질서를 개입하는 이 영화의 방법은 서로 다른 창작자의 작업물에서 공통된 요소를 취합해 하나의 완성품으로 끌어들이는 ‘우아한 시체’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우리와 상관없이>는 여러 명이 협업한 결과가 아니라 한 연출자의 분열적 사유의 궤적이다. 스크린의 질서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스크린 속에 있는 영화, 수없이 분열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의식에 잠재된 숏들. <우리와 상관없이>는 초현실주의의 방법론을 빌려 영화가 품고 있는 치명적인 모순을 주시한다.
한편의 영화는 기계장치의 원리로 촬영하고 편집되는 사진적 영상의 연쇄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장면 뒤에 다음 장면이 이어 붙는 데는 아무런 논리적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 논리를 발명하고 서사를 추출하고 그것들이 시공간적으로 연속되어 있다는 믿음을 투여하는 것은 인간적 시각의 개입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기계의 시각과 인간적 시각이 경합하는 지각적 투쟁의 장소다. “세상이 두개로 보인다”는 화령의 고백은 바로 이 투쟁을 지각하는 자의 증언일 것이다. 이 투쟁의 장소에서 누구도 숏의 주인을 자신할 수 없다. 피사체는 화면의 주체가 아니라 전체로부터 찢어진 하나의 조각이다. 1부에서 대화를 주고받다 순간 마비된 것처럼 말과 동작을 멈추는 인물들의 정지된 모습처럼 끊임없는 흐름과 순간적인 분리 속에서 영화에 잠재한 인간적 지각과 카메라의 지각 사이 불화를 예민하게 도려내는 원소들이다(이에 대응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사람이 없는 골목길을 보여주는 패닝이다. 롱테이크의 지속 안에서 정지하는 인물과 움직이는 카메라의 대응은 지속(미장센)과 단절(몽타주)의 경계면을 흐릿하게 재구성한다). 화령은 밤에 찾아온 영화감독에게 영화가 살아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감독은 영화가 가두고 잘라내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그 사이를 진동한다. 영화는 세계를 잘라내는 기술이지만, 잘린 세계의 살아 있는 시간을 조정하는 상호모순적 작업이다.
이 위태로운 긴장을 집어삼키는 것은 어둠이라는 화면 내부의 깊은 어둠이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깊은 어둠 속에서 모든 피사체를 나타나고 사라지게 한다. 2부의 한 장면에서는 화면의 시각적 정보를 어둠으로 차단한 채 인물들의 대화로만 장면을 이어가기도 한다. 영화의 보편 원칙처럼 지켜지던 시각적 경험과 시공간의 연속성은 어둠 속에 매장된다. 우리가 익숙하게 바라보던 세계는 어둠 속에서 중단된다. 내 것과 타인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그들은 영화의 어둠 안에 불화하면서 통합되어 있다.
누군가는 <우리와 상관없이>를 병적인 망상에 가까운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래는 언제나 망상 속에 잠재해 있다. <우리와 상관없이>는 단순한 시청각적 실험이 아니라 외부를 극도로 제한한 뒤 숏이라는 내부에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투여해 영화를 폭발 직전으로 몰고 가는 원소들의 난교다. 유형준은 영화가 무너져내릴 듯한 위태로운 장소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주사위를 던진다. 이것은 영화라는 인식에 대한 부정이며, 영화는 언제나 그런 부정을 통해 새로운 장소를 발명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