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화해시키는 힘 -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미야케 쇼의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마지막 장면을 반드시 복기해야만 한다. 영화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치코의 정면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며 끝났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영화의 끝은, 사치코의 시선이 머물렀을, 그러나 외화면에만 존재하므로 우리에게는 상상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나’의 얼굴이다. ‘나’는 숫자를 세는 동안 누군가 자신에게 먼저 와주기만을 바랐던 그동안의 세계를 막 깨고 나와, 멀어져가는 사치코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돌려세웠다. 나란히 걷거나, 몸을 포개거나, 혹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위태로우면서도 불안한 하나로 부대끼던 둘은 마침내 서로의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영화는 닫히기 직전이었던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나’와 ‘나 아닌 사람’이라는 두개의 세계를 화해시키고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내비치며 끝을 맺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첫 장면은 빛이 들어오고 있는 집 안에서 게이코가 무언가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영화는 게이코가 써내려가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를 향해 침묵하고 있다. 이어서 검은 화면이 인서트컷으로 침입하고, 화면 위로 영화의 제목이 표시된다. 이렇듯 미야케 쇼는 의도적으로 게이코를 영화의 전체로부터 한번 분리시키는데, 이로 인해 우리가 짧게 본 게이코의 모습은 영화의 첫 장면이기도 하면서, 영화와 분리된 영화 밖 외딴 장면이 된다. 전작에서 두 사람을 중재하며 끝을 맺었던 것처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또한 ‘게이코’와 ‘게이코 아닌 사람들’로 양분된 두 세계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다.
‘게이코’와 ‘게이코 아닌 사람들’로 세계가 나뉘는 요인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게이코는 소리를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다. 게이코에게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란 소리 없이 침묵하는 것들의 총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게이코 아닌 사람들’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는데, 그녀의 가족, 체육관 사람들, 호텔 동료들에게 게이코는 늘 침묵하는 사람이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 사이에서 언제나 침묵을 유지하는 게이코는 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제목이 제시된 후) 첫 시퀀스는 가로등 불빛 아래 눈발이 흩날리는 어느 겨울밤 체육관의 모습이다. 복싱화가 바닥과 마찰하며 내는 소리, 오래된 운동 기구들이 내는 소리, 줄넘기를 하는 소리 등 이곳은 흡사 여러 개의 소리와 그 레이어가 층층이 쌓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장처럼 보인다. 이 소란스러운 체육관의 일상적 풍경 사이로 게이코가 들어온다. 게이코를 제외한 영화의 인물들과 관객에게 소리란 무릇 서사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게이코는 이를 경험할 수 없으므로 그녀에게 소리는 비서사적인 것이며, 체육관 또한 무성의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옷을 갈아입은 후, 코치 마츠모토와 함께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을 한다. 글러브와 미트가 딱 맞아떨어지며 내는 정확하면서도 리듬감 넘치는 소리는 오케스트라 연주의 클라이맥스처럼 영화에서 결정적 순간으로 작용하며 관객에게 시각적, 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녀는 소리내 말하지 않고서도 그렇게 체육관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오래된 연습 파트너인 게이코와 마츠모토는 그 누구보다도 내밀한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게이코는 말하거나 듣는 대신,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직접 몸을 부딪치는 방식으로 서사 안에 선명하게 존재한다.
‘게이코’와 ‘게이코 아닌 사람들’이 중재되고 화해하는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그녀의 일상 안으로 빈번하게 틈입하는 인물들, 예컨대 남동생, 체육관 사람들, 혹은 동료들의 실천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게이코 아닌 사람들’은 기꺼이 ‘그녀’가 되어보려 노력한다. 이때 두드러지는 것은 신체의 감각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것은 물론 이 영화에서만 돋보이는 고유한 형식의 환대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암묵적으로 동의한 듯, 게이코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복제하듯 뒤따르며 ‘게이코’가 되어본다. 가령 체육관이 문 닫을 상황에 놓여 있는 어느 날 저녁, 게이코는 남동생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복싱의 어떤 부분이 좋냐는 동생의 질문에 그녀는 때리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대답한다. 동생은 때리고 맞는 행위가 이상하다며 프로 복서인 누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숏에서 동생은 게이코가 부단히도 드나들었을 체육관에 가 있다. 그리고 게이코가 무수히 섰을 거울 앞에서 그녀에게 권투를 가르쳐준 마츠모토에게 똑같이 권투를 배운다. 체육관 안에서 호흡하고 몸을 움직여보면서 게이코의 움직임을 따라해보는 것. 이 모습을 바라보는 게이코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시력이 나빠지고 있는 관장이 TV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지난 경기의 비디오를 분석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그녀의 몸짓을 따라하며 당시의 감각을 헤아려보는 것, 관장 부인이 게이코의 훈련일지이자 일기장을 소리내 읽으며 그녀의 일상을 상상해보는 것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 무언의 대화이다. 권투를 그만두기를 바라면서도 경기를 관전하며 같은 시공간에 있어 보고자 했던 게이코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부단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두 세계의 틈은 좁혀질 수 있다. 이때 서로의 침묵을 무화시키는 힘이 신체들의 감각인 것은 자명하다. 이렇듯 이 영화에서 신체는 선명한 언어가 된다.
분리된 두 세계가 봉합되는 또 다른 형식은 게이코가 2021년 3월25일, 사야카와의 경기에서 패한 이후 발견되는 것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반적인 복싱영화의 도식을 비껴간다. 험난한 시간을 지나 승리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곧 영화의 성취로 환원되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체육관은 문을 닫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관장은 쓰러져 병원에 있다. 관장이 했던 인터뷰의 발언처럼, 정직하고 솔직한 인간적인 기량이 듣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던 탓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완벽한 콤비네이션 미트 훈련에도 불구하고 게이코는 경기에서 패하고 만다. 이제 그녀의 일상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던 체육관마저 사라지고, 게이코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체육관을 정리하고 난 후, 텅 빈 체육관을 배경으로 코치진과 관장의 부인이 사진을 찍는다. 게이코는 강변에 앉아 휴대폰으로 전송된 사진을 바라봄으로써 체육관과 작별한다. 이제는 연습이 없으므로 설사 체육관을 가지 않는다 한들 이상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밖에 없을 작별의 순간에 체육관이 아닌 강에 와 있는 게이코의 선택은 의문스럽다. 게이코는 왜 강에 있는 것일까? 무엇이 게이코를 강으로 불러들인 것일까? 그녀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반복적으로 강을 찾는다. 강에 가서 하는 것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결을 우두커니 선 채로 응시하거나, 때로는 운동을 하는 것이었으며, 혹은 갑작스레 조우한 관장과 합을 맞춰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집과 체육관, 호텔을 오가는 와중에 의식적으로 강을 가까이했다. 마치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듯이. 그녀는 누구를 기다려온 것일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상념에 빠진 게이코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녀에게 패배를 안겼던 상대 선수 사야카가 작업복 차림으로 다가와 게이코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녀는 침묵하는 대신 힘주어 고개를 끄덕인다. 사야카는 게이코 앞에 짧게 머무른 후,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다시 혼자가 된 게이코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사람을 마침내 만난 것처럼 게이코의 얼굴은 벅참의 감정으로 일렁인다.
게이코와 사야코를 링 밖에서 다시 조우하게 하고 대화의 순간을 만든 것은 시간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시간의 흐름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영화다. 2020년 12월 겨울의 체육관, 2021년 1월15일의 경기, 그리고 약 두달 후인 2021년 3월25일에 있었던 이기지 못한 경기까지. 영화는 화면 위로 시간을 기록했다. 경기에 패한 후, 게이코는 강을 찾아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게이코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인식했을 것이다. 시간을 체화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새로운 날들을 담담하게 기다려온 게이코는 링 위에서 승패를 놓고 다퉈야 했던 자신과 닮은 여인과 우연히 재회한다. 그녀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날에는 일을 하고, 가끔은 강가를 거닐었을 것이며, 그러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링 위에 올랐을 것이다. 게이코로 하여금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2021년 3월25일의 경기는, 강가에서 두 선수가 다시 만나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진정으로 마무리된다. 심판이 없는 곳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이제 승자도 패자도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영화는 전작에서 그러했듯이 다시 한번 이질적인 두 세계를 화해시킨다.
강둑을 힘차게 올라간 게이코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녀는 정해진 목적지가 아닌 잠재성이 가득한 미지의 시간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이제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2021년 3월25일 이후로 명시되기를 멈췄던 시간이다. 게이코가 마주하는 새로운 시간들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직하고 솔직한 언어들로 그녀의 노트에 기록될 것이다. 운동하는 신체의 이미지에서 시간을 재분배하는 이미지로의 도약.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출현이 더없이 반가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