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기 드보르는 “산업국가의 프롤레타리아는 독립적인 미래에 대한 확신과 종국에는 자신의 환상을 완전히 상실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망각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제거되지 않았다”며 스펙터클의 사회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2023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피로 얼룩진 지금의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사랑 이야기인 것 같았다”는 낭만적 고백이자 매니페스토적 발언과 함께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다. 빛을 다한 고엽(fallen leaves)을 가지고 온 노장의 복귀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선명하게 남겼던 두개의 영화적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3부작으로 엮이는 <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 안에서 공명하고 있는 소외된 계급층의 시간이다. 이것을 기 드보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환상은 탈각되었으나 절멸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유령들에 대한 시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은퇴작으로 명명했던 <희망의 건너편> 이후 6년 동안 멈춰 있었던 영화적 시간이 있다. <희망의 건너편>의 마지막 시퀀스를 상기해보자. 영화는 칼에 찔렸지만 목숨은 부지한 주인공 칼레드를 미디엄숏으로 보여준다. 의식을 찾고 눈을 뜬 그의 얼굴 위로 밝고 따뜻한 빛이 조금씩, 그리고 재빠르게 차오른다. 뒤따르는 클로즈업숏에서 무뚝뚝한 타블로의 이미지였던 칼레드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칼레드가 강 너머 저편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떨림이 미소로 바뀌기 시작할 때 그가 일했던 식당의 직원의 개가 화면 안으로 들어와 칼레드의 얼굴을 핥고 영화는 끝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희망의 떨림이 막 도착한 불법체류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디제시스를 종결시켰다. 언제 또다시 곤란함이 닥칠지 모르는, 여전히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을 부인하지 않은 채로 영화는 끝났다. 칼에 찔린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분명히 강 건너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영화가 줄곧 말해온 것은 삶이 우리를 어디로 흘려보낼지라도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는 위로와 낙관의 감각이었다. 그렇게 그의 영화 속 신체들은 결말에 이르러 배에 몸을 싣거나 어디론가 흘러갔으며, 혹은 희망의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곤 했다. 영화 속 인물들을 현실과 막연한 꿈 사이 어딘가로 탈주시키고 영화와의 작별을 선언했던 그가 프롤레타리아 3부작을 잇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쟁을 언급했다. 이제는 박제된 줄로만 알았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시대에 불시착해 다시 운동하기 시작한다.
불시착과 이야기의 시작: 전쟁이라는 상상적 실재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불시착은 이야기를 촉발하는 요소인 동시에 이야기가 태어나는 장소나 공간의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오로지 불시착을 위해 불시착한 것 같은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의 여정을 추적한다. 이들의 연주란 실력과는 상관없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장르적으로, 시대적으로, 그들을 원하는 곳은 현실적으로 없다. 그러나 이들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무관하게 언제나 당당하다. 차의 엔진을 도둑맞아도, 공연에 대한 비난을 들어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꿀 때, 그들은 마치 비웃듯이 미국을 엉성한 유희의 장소로 만들며 횡단한 후, 멕시코로 향한다. 검은 화면 위로 ‘But the hand hit the Top 10 of Mexico’라는 자막을 내보내며 영화는 끝난다. 무성영화 시대를 회상하게 하는 이러한 영화적 작법은 우리가 줄곧 시네마를 향해 기대해온 것에 대해 자문하게 한다. 그것은 불시착과 어긋남이 계속되어도, 가령 우리가 있는 세계에서 더이상 환상을 가질 수 없더라도 멈추지 않고 운동한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 아닐까. 그렇기에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안에서 불시착은 가장 실재적인 출발점과 환상적인 종착지를 위해 필요한 사건이 된다. 이런 불시착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그의 작품은 <르 아브르>일 것이다. 무수한 출발과 도착이 이뤄지는 항구도시 르 아브르. 마르셀은 이곳에 정박한 채 입항과 출항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쫓겨나고 만다. 환영받지 못한 채로 부둣가를 서성이는 그는 어쩌면 이곳에 불시착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런던에 도착했어야 하는 컨테이너가 전산 오류로 르 아브르에 불시착한다. 불시착이라는 하나의 사건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로 변태될 것이다. 컨테이너 안의 무표정한 난민들을 카메라가 찍어대는 동안 소년 이드리사가 무언의 얼굴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도망친다. 그리고 우연인 듯 필연적으로 마르셀과 이드리사는 만나며, 서로를 돕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탈하거나 표류한 채로 타인들과 원활하게 접속하지 못하는 두 존재가 하필이면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려 만난다는 영화적 설정은 서로를 오롯하게 채워주거나 구원하기 어려운 관계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면서도 희망적인 것이자, 동시에 상상적이면서 사실적인 것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불시착한 것은 러시아발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헌신해온 영화적 세계는 현실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의 자장 안에서 작동해왔다. 앞서 언급한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서는 자본주의가 촉발한 계급적 문제를 다루었고, <어둠은 걷히고>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을 아우르는 핀란드 3부작(혹은 빈민 3부작)에서는 자국의 빈궁한 현실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불법 이민자와 난민 문제와 같은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 역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영화 안으로 불러들여 재현해왔다. 그리고 이런 리얼리즘적 주제 의식을 수행하는 것은 각 영화의 시공간 안에 만연했을 사회의 공기를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며 육화한 신체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으로, 빈자로, 때로는 이민자로 분하여 황량한 거리와 낡은 술집, 좁은 집을 반복적으로 배회하며 드나들었다.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사랑은 낙엽을 타고> 안으로 스며드는 방식은 조금은 새로운 것이다. 인물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명의 목소리를 통해 전쟁을 감각한다. 이는 신체들이 사회적 현상 혹은 계급을 표상하던 이전의 작법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직접 이미지로 재구성하거나 혹은 유혈 사태를 몸소 겪은 인물을 어디론가 불시착시키는 방법이 아닌, 인물들의 집 안에 놓인 라디오를 통해 전쟁을 송출한다. 영화는 스마트폰이나 TV, 컴퓨터와 같은 오늘의 매체가 아닌 오로지 소리만을 내뱉는 옛 시대의 매체인 라디오를 통해 전쟁을 이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온 안사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라디오를 켠다. 우크라이나 마우리폴의 산부인과가 공습을 당해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자 소리)이 들려온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집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자리에 앉은 안사는 라디오의 주파수를 이동시킴으로써 전쟁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삭제한다. 안사의 행동은 단지 전쟁을 회피하고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구슬픈 노래를 듣기 위함인 것일까? 사회적 문제를 내러티브의 한축으로 꾸준히 다뤄왔다는 점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일정 부분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내는 영화적 작법은 여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 이를테면 켄 로치나 장피에르 다르덴 & 장뤼크 다르덴 형제가 영화를 통해 일궈내고자 하는 사회적인 실천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사회구조의 변혁을 요구하거나, 인물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고통스러운 삶을 즉자적으로 담아냄으로써 파토스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줄곧 배제했다. 대신 무뚝뚝한 표정의 얼굴과 절제된 대사를 구사하는 신체들을 등장시켜, 상황으로부터 한 걸음씩 빠져나와 새로운 시공간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이렇듯 리얼리즘과 낭만적인 우화가 공존하는 통약 불가능한 시공간이 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구축해온 세계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화에서 어떻게 실재할 것인가? 안사가 주파수를 바꿔 전쟁의 소식(이자 소리)을 끌 때, 전쟁은 적어도 영화에서는 언제든 소거하여 프레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삭제 가능한 것이 된다. 안사는 분명 전쟁의 소리로부터 도망치거나, 숨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집 안으로 침투한 전쟁을 직접 중단시켰다. 그렇게 실재적 사건인 전쟁은 영화 안에서 언제든 직접 멈출 수 있는 가상의 잡음으로 다뤄진다. 안사가 전쟁의 소식을 멈춘 뒤 선택한 노래의 가사는 이제 새롭게 들리기 시작한다. “차려입을 옷도 없고/ 허리띠도 없네/ 아기는 툭하면 울어서/ 보모를 괴롭히는구나/ 온종일 아기를 달래다/ 야위어버렸네” 이 노래는 마치 안사의 쓸쓸한 처지와 겹치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쟁의 참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인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를 듣던 안사는 조명을 켜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공간 연출이 연극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은 자명한 것일 테다. 불 켜진 작은 연극무대와 같은 안사의 방을 쓸쓸한 노래만이 채우고 있을 때,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텅 빈 자리에 머물고 있는 전쟁의 잔상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하나의 노래가 포용하는 두 부류의 대상. 영화는 그렇게 핀란드의 노동자가 겪는 쓸쓸한 어느 날 밤과 우크라이나의 잠들지 못하는 비극의 나날들을 함께 어루만진다.
그러나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낭만적 노래로 위로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종전을 상상적으로 실현한다. 주파수를 바꿈으로써 전쟁의 소리를 소거한 안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안사와 홀라파의 사적 공간으로 계속해서 침투한다. 홀라파 역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잡지를 읽는 와중에 전쟁의 소리를 듣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쇼핑센터를 폭격하여 18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사망자가 늘어날 것 같다는 뉴스의 소리를 끊고 홀라파의 동료 하네스가 가라오케를 가자고 제안한다. 전쟁의 소리는 그렇게 가라오케의 시끌벅적한 음악 아래로 잠시 자취를 감춘다. 소리-이미지의 형태로 영화 안으로 불시착한 전쟁은 홀라파가 안사의 집에서 저녁을 먹던 날 마침내 영화 밖으로 사라진다. 식사를 마치고 튼 라디오에서 또다시 전쟁의 참상이 사운드로 재현된다. 이번에는 대피 중 공습당한 주민을 계속 구조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상자 수는 파악되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최대 1200명이 극장으로 대피했을 것이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 안사는 결심한 듯 라디오를 끄고 카메라를 정확하게 응시하며 “빌어먹을 전쟁”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다른 곳이 아닌 극장마저 대피소로 전락시키며 파괴하기 시작할 때, 영화는 이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외화면을 향해 종전을 촉구한다.
이렇게 전쟁을 끝낸 영화가 나아갈 곳은 어디일까? 전술하였듯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성냥공장 소녀>로 봉합했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시간을 다시 해제시켰다. 불시착한 전쟁을 끝낸 영화는 이제 대부분의 전작에서 그러하였듯이 안사와 홀라파 두 사람을 주목하며 그들이 함께할 시공간을 만드는 데 복무할 것이다. 다시 기 드보르의 선언을 빌려와, 환상이 탈각된 프롤레타리아인 두 존재는 현실의 초라함에 굴하지 않고 어디론가 함께 떠나거나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열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 세계 어딘가에서 꿋꿋하게 존재할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우화적 영화에 대한 작은 헌사이자 탐사로써, 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발견되는 요소들 중 3가지, ‘공간의 위상학’, ‘사운드의 역량’, ‘서사시와 서정시의 이중 재현’을 채택하여 들여다보고자 한다.
공간의 위상학
영화에서 ‘공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공간은 닫혔다가 열리기를 반복함으로써 이미지를 포획하는가 하면, 비워졌다가 채워지며 디제시스가 구현되는 장으로 역할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벨러 터르의 <토리노의 말>에서 빛을 잃어가던 집처럼 수축되기도 하고,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터스텔라>와 <테넷>에서 보았듯 무한히 팽창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 안에서의 공간은 감독의 의도에 따라 섬세하게 설계되어 고유하면서도 독특한 위상학을 구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공간은 어떤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을 더이상 견딜 수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어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해프닝을 그린 감독의 전작 <나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다>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계획된 청부 살인을 취소하려다 엉겁결에 강도 혐의까지 받게 된 헨리에게 마가렛은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조국을 떠날 생각이냐고 묻는 프랑스인이자 이방인인 헨리에게 마가렛은 ‘노동자계급은 조국이 없다’고 말한다. 이 발언은 유의미하다. 마가렛의 대답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 노동자계급이 바라보는 고국 혹은 국가란, 머무르는 곳이 아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지와 같은 장소가 되며, 여행자가 된 이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관광객이자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다는 잠재성을 획득한다. 국경과 같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제안했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의 일원이 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취하고 있는 공간의 위상학은 닫힘-환상-탈주의 도식으로 전개된다. 인물들은 마치 여행자처럼 공간을 옮겨 다닌다. 먼저, 닫힌 공간은 안사의 집에서 발견되는 형태이다. 얼핏 연극무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전쟁이 소리로 출현하는 장소로 설계되어 있다. 기묘하게도 카메라는 안사가 집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은 여러 차례 보여주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은 포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허락하는 문. 안사는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갇힌다.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전쟁의 참상을 듣거나, 오지 않는 홀라파의 전화를 기다리거나, 그와 저녁을 먹다가 말다툼을 벌여 맞게 되는 이별의 순간을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이곳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감각하는 공간이자 안사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연극적 공간이 된다. 안사가 ‘빌어먹을 전쟁’이라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하는 지극히 연극적인 장면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홀라파가 사고를 당한 밤에도, 안사는 그의 등장을 기다리며 비가 흘러내리는 창문의 안쪽에 서서 그저 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의도치 않게 기차에 치여 나타나지 않은 그날 밤의 연극은 그렇게 완성되지 못한 채 미완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내면을 내비치거나 무대의 불을 끄듯 소등하고 잠에 든 안사는 다음 시퀀스에선 집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다. 닫혀 있지만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안사의 연극적 공간은 찰리 코프먼이 <시네도키, 뉴욕>에서 건설하고자 했던 삶 자체를 제유하는 거대한 연극무대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케이든은 자신의 욕망이자 삶, 그리고 내면이기도 했던 연극무대를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케이든은 자신이 만든 연극 속 배우로서, 그리고 케이든 그 자신으로서 두번 죽는다. 이에 비해 안사는 마치 심리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을 구분한 듯, 자유롭게 연극적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
집 밖으로 나온 안사와 홀라파에게 영화관은 환상성을 이식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영화관을 가곤 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영화관은 갈 곳 없는 이들을 환대로 끌어안는 공간이자, 사랑이라는 환상이 가능하도록 기능한다. 감독의 오랜 예술적 동료이기도 한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를 보고 나와서 안사가 한 말은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은 처음이에요”이다. 타블로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안사를 웃게 한 것이 피 튀기는 좀비영화라는 역설과 무관하게, 영화는 건조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을 영화관으로 초대하여 낭만의 시간을 부여한다. 그러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영화관이 환상의 공간으로 역할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비단 그들 사이에 낭만적 관계의 가능성을 싹틔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안사와 홀라파가 극장을 빠져나가기 전 두명의 중년 남성이 대화를 나눈다. <데드 돈 다이>가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장뤼크 고다르의 <국외자들>을 떠오르게 한다는 짧은 소감을 나눈 후 두 남성은 화면의 양옆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여닫히는 문 뒤로 화면의 정면에 스치듯 보이는 것은 브레송의 또 다른 작품, <돈>의 포스터다. 시네마에 대한 감독의 헌사에서 비롯된 이 짧은 퍼포먼스는 영화 안에 흐르는 시간을 팽창시키면서 정확한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호한 시간성을 부여한다. 이제 이 시간은 전쟁이 발발한 동시대도 아닌, <데드 돈 다이>가 최초로 극장에 상영된 시간도 아닌, 고다르와 브레송을 이야기할 수 있는 두터운 시간으로 작동한다. 안사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린 홀라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영화관 앞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다. 안사 역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영화관을 찾아간다. 엇갈린 두 연인의 뒤로 보이는 것은 장뤼크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장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 존 휴스턴의 <팻 시티>의 포스터다. 시네마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지는 이러한 영화적 인용이 결국 두 사람을 영화관 앞에서 다시 만나도록 마술적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낭만적인 해석인 것일까.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시네마토그래프가 세상에 공개한 첫 이미지는 공장을 나서던 노동자들의 역동하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던가.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는 것에 주저함 없이 너그러웠던 영화의 시발점처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노동자들은 영화관을 찾고, 서로를 향해 미소 지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차이밍량이 <용문객잔>에서 제 역할을 다한 영화관의 앙상한 뼈대를 롱테이크로 드러내며 숭고의 방식으로 작별을 고하고자 했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의 영화관이란, 영화사를 지탱하고 있는 옛 거장들의 작품이 여전히 상영되고 있다는 상상이 실현되는 곳이자, 오갈 곳 없는 영혼들을 생동하게 하는 장소가 된다. 이쯤에서 <룸 666>에서 고다르가 빔 벤더스에게 응답하며 영화의 미래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려보는 것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관객이라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영화와 이미지는 만들어진다. 영화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놀라운 것을 보여준다.”
환상성을 이식받은 이들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기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홀라파와 안사는 재회한다. 홀라파가 가진 것이란 병원 간호사가 건넨 그녀의 전남편이 입던 옷과 목발에 기대야 하는 성치 않은 신체뿐이다. 그러나 둘은 개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목적지가 묘연하다는 점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혹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두개의 교집합 없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양극단의 가능성 중 우리가 그들의 뒷모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까. 감독은 어째서 <르 아브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막 꽃을 틔우기 시작한 벚꽃이 아닌 낙엽이 쌓인 길을 두 사람 앞에 펼쳐놓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신중한 답을 위해 나는 닫힌 안사의 집과 환상성의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위상학에 대해 전술했다. 그들이 병원에서 나와 바라보는 것은 연극처럼 설계된 닫힌 공간도, 스크린의 환상성도 아니다. 그들이 응시하는 것은 구름 틈 사이로 내비치는 석양과 바람에 흔들리며 미세한 떨림을 만들어내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나뭇잎들이 아닐까. 전쟁이라는 사태와 노동의 곤란함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탈주한 안사와 홀라파, 그리고 한 마리의 개가 우리에게 남긴 뒷모습은 떨림이 존재하는 순수한 현재의 풍경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전작에서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빛나는 윤슬과 넘실대는 파도가 있는 곳처럼 생동하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 세상 저편으로 나아가곤 했다. 비록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더라도, 여전히 이곳에 존재할 수 있음을 역설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우화는 그렇게 다시 한번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사운드가 이미지가 될 때
서사와 함께 뒤섞여 부단히 재생됨으로써 서사의 일부가 되곤 했던 음악들을 떠올려보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사운드는 종종 이미지보다 선행하는 것이었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야코 루야넨은 야간 기차를 타고 헬싱키에 도착한다. 공원 벤치에서 잠시 눈을 붙인 그에게 괴한들이 들이닥친다. 야코를 때려눕힌 후, 지갑 안의 돈을 훔친 괴한은 캐리어 가방을 뒤지다가 라디오를 발견한다. 괴한은 주인공의 돈과 소지품, 그의 기억과 목숨까지 훔칠 각오를 했지만 라디오, 즉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사물만은 마치 그들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혹은 음악을 삽입하기 위해 라디오를 찾아 재생시키는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태프처럼) 구태여 라디오를 똑바로 세워 전원을 켠 후, 그의 곁에 남겨둔다. 괴한의 손에 의해 재생된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은 이제 작은 라디오에서 출발하여, 야코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 안으로 틈입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피를 흘리며 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주인공의 시점숏에서 음악은 더 크게 울리며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야코와 함께 뚜벅뚜벅 걸으며 꿋꿋하게 흐르는 이 음악은 라디오에서 발생한 후, 공원으로, 그리고 드넓은 기차역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하나의 시퀀스를 유려하게 직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가 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귀에 들리는 사운드가 조응하며 프레임 안에서 공명할 때, 이제 이미지는 새로운 역량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청각적 기호인 사운드에 시각적 이미지와 심상을 이식해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이러한 사운드의 역량을 수미상관의 구조로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암전된 검은 화면 위로 주인공과 감독의 이름, 그리고 영화의 제목을 차례로 보여준다. 그리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화면 안에 울리고 있다. 이 사운드의 근원은 슈퍼마켓의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을 때 생성되는 소리다. 계산대 위로 생명이 제거된 사체이자 식재료인 고기가 덩어리째 쌓여가고 있다. 바코드를 반복적으로 찍는 계산원과 고기를 계산대 위로 올리는 한 남자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료함과 건조함을 넘어선 텅 빈 얼굴이다. 경직되고 기계화된 이미지들의 풍경 안에 주인공 안사가 있었다. 이 규칙적인 기계음은 영화의 종반부에서 다시,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기차에 치여 의식을 잃은 홀라파의 병실에 비치된 심전도 기계에서 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눈은 감고 있지만 분명히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의 소리. 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였지만 이제는 죽은 채로 등가교환의 대상이 됐음을 공표하는 소리였던 계산대의 기계음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상품에 부여된 바코드를 식별하는 소리였던 기계음은 이제 사람의 생명을 알리는 소리로서 새로운 역량을 부여받는다. 그 소리 속에서 혼수상태였던 홀라파가 눈을 뜬다. 다시 태어난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안사다. “나 죽었나요?”라고 물어보는 홀라파에게 안사는 “살았어요”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시 시작되는 생명과 시간에 대한 선언. 안사와 홀라파, 그리고 개에게 이제 살아 있는 시간이 시작될 것 같다. 다시 영화의 시작을 떠올려보면, 바코드 소리를 이어받았던 것은 유통기한이 지나 제 역할을 다한 제품을 골라내는 안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가져와 들여다보며 애써 쓸모를 찾아보려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마트에서 일하던 그녀를 시종일관 감시하던 직원의 시선은, 이제 막 눈을 뜬 홀라파와 안사를 바라보는 개의 온기 어린 시선으로 대체된다. 소리는 다시 한번 이미지보다 우선한 것으로서 화면에 등장한 후 이미지가 도약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죽음처럼 멈춰진 시간이 다시 생동할 수 있도록 잠재성을 발휘한다.
서사시와 서정시의 이중 재현
<르 아브르>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위중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아를레티에게 그녀의 친구들이 책을 낭독해주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보이는 덤불 뒤에서 기차 한대가 달려나왔는데, 모든 찻간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유리 창문은 아래로 내려져 있었다. 우리 중 하나가 속된 유행가 한곡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우리 역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1910년대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국도 위의 아이들>의 일부다. 카프카의 소설을 벗의 목소리를 통해 들은 아를레티는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진다. 자크 랑시에르가 주장했듯, 영화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연쇄의 시간성과 절단의 시간성 사이의 긴장을 먹고 산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각색한 동명의 데뷔작 <죄와 벌>을 시작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이어오고 있는 연쇄의 시간은 무엇으로 점철되는 것일까.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40여년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영화들을 하나로 이어보면 그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행과 연을 더해가고 있는 하나의 서사시가 될 수 있다. 이 가설에 근거하여 그의 영화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프롤레타리아 3부작과 핀란드 3부작은 그의 서사시를 지탱하는 주춧돌로 각각 하나의 연이 될 것이며, 영화와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멈춤 혹은 쉼의 시간들 역시 단어와 단어 사이, 혹은 연과 연 사이의 휴지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균열들을 영화로 가져와 다시 보여줄 때, 요원해 보이던 행간은 촘촘하게 엮이기 시작하고 미완의 서사시는 새로운 행과 연을 획득한다. 이렇듯 그의 영화들은 차이와 반복의 형태를 띠며 연쇄되어왔다.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시를 씀으로써 그가 목격한 시대의 참상을 문학으로 기록하여 남겼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 역시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40여년의 시간 안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존재들을 영화 안으로 망설임 없이 초대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써오고 있는 서사시 안에 새롭게 생성된 연이자, 개별적인 서정시로 작동한다. 블랙팬 코미디의 장르 아래에서 안사와 홀라파를 비롯한 인물들은 모두 굳은 얼굴의 타블로로 등장한다. 감정이 배제된 이들의 정지된 얼굴은 에드문트 후설이 이야기했듯 판단중지의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이들을 그저 기계처럼 굳어버린 이미지로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 판단중지는 정지된 이미지를 대면하는 우리를 더 깊은 심연으로 이끈다. 우리가 목격했다시피 안사와 홀라파는 분명컨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영화는 망설임에 머뭇거리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서정적인 가사의 노래,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 그리고 따뜻한 시선을 가진 개를 등장시킨다. 안사가 홀라파의 연락을 기다리며 들었던 노랫말, “날 사랑할 용기가 없나요? 왜 아무런 대답이 없나요?”는 안사의 내적 독백인 동시에, 홀라파가 등장하는 숏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며 그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고백이 된다. 독백이자 고백의 노래가 홀라파의 어깨너머로 흐를 때, 그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멈춘 얼굴 위로 노랫말이 계속 이어질 때, 생각에 잠긴 이들의 얼굴에 심상과 정념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노동의 곤란함과 녹록지 않은 현실로 인해 환상성이 사라진 이들의 얼굴은 텅 빈 캔버스처럼 무색의 것이었지만, 그 여백 위로 노래와 영화가 채워지며 이들은 다시 역동하기 시작한다. 국경이 맞닿은 나라에서 시작한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나의 삶도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그러니까 지금은 도무지 꿈이란 것을 꿀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중간중간 침묵과 휴지가 있더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를 더해보는 것. 그럼으로 나와 같이 외로운 누군가를 내 옆으로 데려오는 일. 비록 쉽게 써지지는 않더라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 삶에 대한 의지와 사랑에 대한 언어. 6년이라는 시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 한편의 서정시가 된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이야기라고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역설했다.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는 노장의 발언은, 우리로 하여금 해묵었지만 늘 자문해야 하는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일까? 시대를 경유하며 축적되어온 리얼리즘의 서사시와 환상성을 토대로 하는 서정시의 이중 재현을 통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세상을 향해 대화를 시도한다. 그의 영화를 추동해온 것은 아마도 그가 직접 목격한 사회의 민낯일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의 바깥에 있던 빈궁한 현실은 영화 안으로 들어와, 영화의 인물들에게 이식되었다가 결말에 이르러 묽게 용해된다. 이는 안사와 홀라파가 지나친 낙관주의자이거나, 혹은 애초에 꿈꾸기를 포기한 염세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터로 나가 일을 하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관을 갔다. 그러다 이들은 우연히 상대를 발견하고 용기내 고백했고,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제 현실은 ‘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저항은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저항이 아닌 대화하기를 선택할 때, 즉 승패로 나뉘는 세계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 머무르기를 선택할 때,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던 불협화음은 자연스레 소멸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홀라파는 목발을 짚고 걸어가며 안사에게 개의 이름을 묻는다. 안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채플린’이라고 대답한다. ‘채플린’이 여기에 응답하듯 짧고 경쾌하게 짖는다. 영화는 다시금 찰리 채플린의 시간, 이를테면 <모던 타임즈>의 시간을 소환한다. 개의 이름이 ‘채플린’인 것은 무성영화 시대를 향한 노스탤지어에서 비롯된 반가운 영화적 인용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모던 타임즈>가 투영했던 노동자의 애환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슬픈 인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과 함께 흐르는 <Fallen Leaves>의 가사, “가을이 오면 공원의 나뭇잎도/ 빛나고 빛난다”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서정시의 마지막 연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찬란했던 계절을 뒤로하고 바닥에 떨어진 존재일지언정 낙엽도 빛날 수 있다는 희망. 비극의 시대에 불시착한 존재들에 대한 우화는 그렇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