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의 나라>는 <광해, 왕이 된 남자>보다 이전에 존재했던 프로젝트라고.
=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마치고 NEW에서 숨겨둔 보석 같은 시나리오가 있다며 제안해줬다. 당시 시나리오는 좋았지만 내가 직접 연출해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아서 고사했다. 시간이 흘러 <7년의 밤>을 마치고 이런저런 업계 사람들을 만날 때쯤 이 시나리오가 다시 생각났다. 당시 NEW와 사석에서 만난 자리에서 <행복의 나라>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지금은 묵힌 시나리오가 됐다고 하더라. 내가 시나리오를 한번 고쳐볼 테니 다시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각색된 시나리오를 보고 조정석 배우가 합류했다. 주연배우가 붙으면서 투자도 진행됐다.
- 각색하면서 바뀐 부분은 무엇인가.
= 조정석이 연기한 정인후 변호사의 캐릭터가 부각됐다. 당시 30명 가까이 되는 인권변호사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그들의 사연을 정인후 캐릭터에 녹여내고 싶었다. 이만식 변호사(우현)의 모티브가 된 인물도 오랫동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인권변호사로 맹렬하게 일했다. 당시 박정희의 유신 정권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한 변호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 시해가 나쁜 일이 아니라고, 김재규가 옳은 일을 했으니 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판에 뛰어들었다. 김재규 구명 운동의 중심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변호인석에 앞뒤로 5명씩 총 10명이 앉아 있었고 나머지 22명은 관중석에 있었다. 실제 고증을 통해 영화에도 동일하게 묘사했다. 실제로는 김재규가 인권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을 경우 자신의 행동이 오인될 수 있다는 의사를 전하면서 1심 진행 전에 변호인이 국선변호사로 바뀌었다.
- 극 중 정인후는 원래 속물적인 인간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지만 모티브가 된 태윤기 변호사의 삶을 보면 훨씬 모범적인 인권변호사에 가까웠더라. 한국광복군에 몸담기도 했고 말이다.
= 영화적으로 주인공 캐릭터가 변해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행복의 나라>는 시대가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고, 정인후는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함께 성장해가며 그 시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생명이 경시되는 야만의 시대에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던 현실을 마주하며 그 역시 변화한다.
- <광해, 왕이 된 남자>가 폭군으로 낙인찍혔던 광해의 이면을 보여줬다면, <행복의 나라>는 10·26 사건에서 김재규에 가려져 크게 조명되지 않던 박흥주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의 사연을 보여준다. 이선균이 연기한 박태주가 그를 모티브로 한다. 인물의 이면 혹은 이면의 인물을 다루는 데 관심이 많나.
= 소외된 인물을 다루고 싶었다. <서울의 봄>과 <행복의 나라>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서울의 봄>이 12·12 쿠데타라는 메인 사건과 우리가 잘 아는 역사 속 인물들을 다룬다면 <행복의 나라>는 그 밖의 사건과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내게 이 시나리오가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했고.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 물밑에서 움직이는 대중이라고 생각한다.
- 김영일(김재규 모티브, 유성주)이 박정희를 암살한 후 남산 중앙정보부로 갈지 용산 육군본부로 갈지 갈등할 때 결국 ‘육본’을 택한다. 이 결정이 한국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된다. <행복의 나라>는 이 에피소드를 법정에서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로 재해석한 점이 흥미로웠다.
=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영화적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거기서 파생되는 불꽃들이 흥미로워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김영일, 박태주와 함께 차를 타고 있던 육군참모총장이 유리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증인으로 나선다는 것은 영화를 위한 각색이었다. 그외 법정 장면은 95%가 실제와 똑같다. 당시 재판 기록을 조사하며 실제 오갔던 말들을 가져왔다. 극 중 정인후가 고문을 당한 것처럼 당시 변호사들도 12·12 사태 이후 군부 세력에 끌려가 많은 고초를 겪었다.
- <서울의 봄>의 김성수 감독과 미리 시나리오를 공유했다고 하던데 서로 피해간 부분이 있나.
= 비슷한 시기에 영화가 제작됐다. 메인 캐릭터 캐스팅은 겹치지 않게 하자고 서로 얘기했다. 그리고 12·12 사태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 세력이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서울의 봄> 시나리오를 읽는데 그게 엔딩이었다. 아, 이거는 우리가 쓰면 안되겠다. (웃음) 그래서 우리는 복도에서 샴페인을 드는 식으로 연출했다.
- 16일 만에 끝난 졸속 재판이었다. 그런데 실제 1심 판결까지 수개월, 대법원 판결까지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법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재판의 졸속성이 충분히 체감되지 않을 수 있다. 극 중 정인후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데다 10·26부터 12·12까지 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 재판의 졸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전상두(유재명)쪽을 좀더 과장하거나 희화화시킬 수도 있었다. 실제 재판에서는 재판장이 반말도 하고 야단도 치고 영화보다 훨씬 부조리한 일이 많았다. 하지만 한쪽을 너무 악마화하면 관객이 이 이야기 자체를 허구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양쪽 모두의 상황을 보여주며 재판을 객관적으로 다뤘다.
실제 인물과 똑같이 가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 <서울의 봄>을 포함해 전두환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들과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행복의 나라>의 전상두는 전두환의 어떤 면을 부각해서 만든 인물인가.
= 많은 영화에서 전두환은 희화화되거나 야만적으로 묘사된다. 인간이 그렇게 한쪽으로만 치우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유)재명씨와도 그를 처음부터 악랄한 사람으로 설정하기보다는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 그래서 보여주려는 선택이 무엇인지 표현하는 방향으로 가자고 얘기했다. 전상두는 그의 야망과 야심이 잘못된 쪽으로 뻗어가면서 사안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 유재명 배우가 실제 머리를 밀었다고 들었다. 배우로서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 캐스팅 이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머리를 밀게 하려면 하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시더라. 감독 입장에서는 쉬운 부탁이 아닌데 먼저 그렇게 얘기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머리를 미는 강도를 조절해가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 우리는 실제 전두환의 외모와 말투를 너무 잘 안다. 그럼에도 강도 높은 특수분장을 한다거나 말투를 모사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 실제 인물과 똑같이 가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표현하는 것이다. 원래 유재명씨가 갖고 있는 점잖음이 있다. 그래서 실제 인물을 흉내내기보다는 유재명이 표현할 수 있는 시대에 초점을 맞춰 인물을 만들어나갔다.
- 반면 박태주는 실제 박흥주가 재판받을 당시 모습을 쏙 빼닮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에 오히려 접근 방식이 달랐나.
= 박태주의 모티브가 된 박흥주의 사진을 선균씨에게 보여줬더니 그 이미지를 참 좋아했다. 실제 그분처럼 분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가진 트라우마와 역사적 맥락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실존 인물의 외모를 닮아가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분장이라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마파도>부터 <광해, 왕이 된 남자>에 이르기까지 추창민 감독의 영화는 식사 장면이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행복의 나라> 역시 변호인단이 즐겨 찾는 식당 장면을 포함해 무언가를 먹는 신들이 잘 나왔다.
= 연출자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대화만 하는 신을 찍을 때 대부분 자연스럽지 않거나 재미가 없다.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배우들도 연기를 좀더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대화 신을 만들 때 배우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편이다. 마지막에 전상두와 박태주가 만나는 신도 닭이나 갈비를 뜯게 하려고 했다. 한쪽은 편하게 먹는데 다른 쪽은 그러지 못하는 대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신이 길어지는 문제가 생겨서 소주로 바꾸었다.
- <12명의 성난 사람들> <뉘른베르크의 재판> 같은 고전 법정물은 물론 그간 접해온 많은 영화들이 <행복의 나라>를 위한 자양분이 됐다고. 법정영화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 것 같나.
= 법정영화를 쭉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연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배우의 연기가 제일 중요하다. 변호사가 열변을 토하고 피해자가 항변하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고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배우를 뽑는 게 관건이다. 감독은 그들을 열심히 찍으면 된다.
- 조정석은 좋은 배우지만 변호사 캐릭터에 단번에 떠올릴 법한 연기자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그를 캐스팅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어려운 전문 용어가 많이 나오는데도 대사가 정확히 전달될 만큼 기본기도 뛰어나다.
= 정석이는 앞으로 20년간 대한민국 영화계를 먹여살릴 배우다. 뭘 해도 잘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법정 신을 찍을 때 모이는 배우와 스태프가 200명이 넘는데 매 테이크 정석이의 연기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나왔다. 정석이는 개인적으로 대화해보면 약간 버벅대고 더듬기도 하는데(웃음) 촬영만 들어가면 확 달라진다. 딕션이 너무 좋다. 여러모로 정말 신기한 배우다.
- 조정석이 워낙 코미디에 능한 배우다 보니 그가 등장하면 관객은 유머를 어느 정도 기대하게 된다. <행복의 나라>에도 웃음이 나오는 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이 크지 않다. 감독 역시 <마파도>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웃음을 만드는 데 능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행복의 나라>는 유머를 절제한다.
= 정석이는 자연스러운 코미디를 잘하는 배우다.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신을 넣어봤을 때 단발적인 재미는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캐릭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인후가 전달하는 메시지 역시 흐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머는 최소한으로만 넣었다. 무엇보다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이런 연기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영화 내내 덥수룩한 수염에 초췌한 얼굴로 등장하는 이선균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 선균씨가 전상두 역에 관심이 있다는 이상한 소문을 누군가가 흘렸다. (웃음) 그래서 시나리오를 줬다. 나중에 비화를 들었는데 선균씨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당연히 박태주 역을 제안한 줄 알았다더라. 그가 하고 싶어 했던 박태주 역을 하게 됐다.
- 12·12 사태를 묘사한 많은 작품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국군보안사령부로 강제 납치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퇴장한다. <행복의 나라>에서는 정진후 육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인물인데, 배우 이원종을 캐스팅했다.
= 실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군인이지만 문인적인 면모도 갖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을 무기력하게 그리는 매체가 많았던 듯도 하다. 김성수 감독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나약하게 보이는 게 싫어서 힘 있는 배우를 쓰고 싶었다”는 이유로 <서울의 봄>에서 정상호 역에 이성민씨를 캐스팅했다고 들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원종을 캐스팅함으로써 그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지키다 전사했던 김오랑 중령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정진후 육군참모총장을 지키는 것으로 각색됐다. <서울의 봄>에서 정해인이 연기했던 인물인데 여기서는 박훈 배우가 연기한다. 공교롭게도 박훈은 <서울의 봄>에서 허화평을 모티브로 한 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즉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 <행복의 나라>는 10·26부터 12·12까지 다루는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각색 과정에서 설정을 바꿨다. 김오랑은 누가 봐도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다. 이 사건을 다룰 때 그 인물을 꼭 넣고 싶었다. 박훈씨와 처음 작업했는데 무척 군인스럽고 단단한 매력을 가진 배우였다. 김성수 감독이 새로운 얼굴을 뽑고 싶다고 하길래 박훈과 유성주 배우를 추천했다. 김성수 감독은 박훈 배우에게 약간 희화화된 캐릭터를 시켰더라. (웃음) 여기서 김재규를 연기한 유성주 배우는 <서울의 봄>에서 진압군 진영의 최고지휘권자로 나온다.
- 고 이선균 배우의 유작이다. <행복의 나라>는 배우 이선균의 마지막 얼굴이 담긴 작품이다.
= 영화의 98%를 완성하고 마지막 개봉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일이 벌어졌다. 다시 영화를 보는데 극 중 박태주의 어느 신이 실제 선균이와 매칭되는 부분이 있더라. 마음이 답답해져서 한동안 영화에 손을 못 댔다. 이렇게 좋은 배우의 마지막 작품을 함께할 수 있어서 내게 큰 의미로 남을 것 같다. 현장 분위기도 좋았고 촬영이 끝나고 모여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다. 소년 같은 면이 있던 배우였다. 그런 모습이 <행복의 나라>를 함께 작업한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여러 버전의 엔딩이 있었는데…
- 골프장에 있는 전상두를 정인후가 찾아가는 신은 명백한 허구다. 이 신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느끼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사도 다른 신에 비해 훨씬 설명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을 이렇게 찍어야만 했던 감독의 고집이 느껴졌다.
= 골프는 권력자가 생각하는 세상과 닮았다. 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컨트롤되지 않는 공이 있다. 전상두에게는 그렇게 반항하는 공이 정인후였다. 골프장 신은 누군가 한번쯤 이야기했어야 하는 내용을 남았다. 시대가 탄압하고 은폐하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뿐 실제 많은 외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인후는 실제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을, 그 시대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 “왕이 되고 싶으면 왕이 되고 돈을 벌고 싶으면 벌어도 되는데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광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정인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몇달 후 일어나서는 안됐을 일이 벌어졌다.
= 여러 버전의 엔딩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하늘 위로 헬기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너무 직접적이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잊힌 이들의 희생도 있었다. 굳이 박태주의 사형 집행 이후 벌어진 일을 표현하기보다는 관객의 해석에 맡기고 싶었다. 그리고 생명 경시는 지금도 벌어진다. 어느 시대든 권력을 가지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