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실패의 역사를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 실화 바탕으로 하는 <행복의 나라>가 법정물의 장르 문법을 통해 시도하고 성공한 것
2024-08-15
글 : 임수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는 2005년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이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당시 법원은 논픽션 다큐멘터리에 해당하는 세 장면을 삭제 후 상영 결정을 내렸다. 이에 제작사 (주)MK픽처스측은 가처분 이의 신청소송을, 박지만씨측은 영화상영금지 및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3년에 이르는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1심에서 법원은 가처분 결정을 취소하는 대신 피고(제작사 MK픽처스)가 원고(박지만)에게 명예훼손 배상금 1억원을 지급할 것을 명했다. 당시 한국독립영화협회, 여성영화인모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 등 4개 영화 단체는 해당 판결이 또 다른 사법검열이자 정치 판결이라고 주장하는 성명서를 냈다. 양측 모두가 항소하며 진행된 2심 조정에서 법원은 1. <그때 그사람들> 상영 시 시작 부분에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을 넣고 2. 박지만씨는 (주)MK픽처스에 1심 판결에 따른 가지급물 1억원을 반환하며 3. (주)MK픽처스는 이 영화 내용으로 인해 영화 속 등장인물과 연관된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는 공식적인 보도자료를 배포하라고 판결했다.

추창민 감독의 <행복의 나라>는 <그때 그사람들> 이후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 한국 상업영화가 10·26 사건을 다루는 방식의 다각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동시에 현실의 사법 체계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이후 박정희 시대와 그 유산에 대한 평가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화려한 휴가> <스카우트> <택시운전사> 등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작품이 꾸준히 기획되고 천만 고지를 넘는 대중적 성공까지 이끌어내면서 전두환 시대를 읽는 프리즘도 다양해졌다. 보수단체의 저항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법정에서 영화의 내용을 검열하는 촌극은 벌어지지 않는다. <남산의 부장들>을 위시한 역사 재현 영화들은 실존 인물과 이름을 달리한 캐릭터를 내세워 법적 분쟁을 피해가는 한편 그 시대의 공기를 각기 다른 장르로 재해석하고 있다.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와 김재규의 관계에서 남자들의 얽히고설킨 치정을 발견, 장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 같은 프렌치 누아르로 10·26 사건을 재현했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에 맞선 이태신(정우성)이란 가상의 영웅을 상상하며 실패한 역사를 위로하고 하나회의 잔당이 장악한 권력 집단을 폭로한다.

<행복의 나라>는 1979년 10월26일 김영일 중앙정보부장(김재규 모티브, 유성주)의 대통령 암살로 문을 열고 12월12일 전상두(전두환 모티브, 유재명) 계엄사령관의 군사 쿠데타를 클라이맥스에 배치한다. 앞선 영화들과의 비교가 불가피한 대목이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은 중앙정보부장 김영일이 아닌 그의 수행비서관, 박태주(박흥주 모티브, 이선균)이며 러닝타임 중 상당 비율이 재판 신에 할애된다. 박태주는 당시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다. 때문에 군법회의법에 따라 3심제가 아닌 단심제가 적용(지금은 “사형을 선고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단서 조항이 추가됐다)되고 사형선고가 집행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 최대의 정치 게이트에 유명세를 타고 싶어 하는 정인후(태윤기 모티브, 조정석) 변호사가 뛰어든다. 그는 법적 대리인으로서 박태주를 처음 마주한 자리에서 군사재판을 피하고 일반심을 주장하자고 제안하지만 박태주는 군인은 군법을 지켜야 한다며 이를 거부한다. “재판엔 규칙 같은 게 없다.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고 믿는 정인후는 원칙을 고집하는 그가 답답하기만 하다. 법정에서 단심제 위헌을 주장해보지만 오히려 재판부를 겁박하고 있다며 경고 고치를 받는다. 그다음에 정인후가 제시하는 카드는 사건 당일 “대통령을 쏘겠다”는 표현이 직접 언급된 것은 아닌 만큼 박태주가 대통령 시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 또한 군인이 궁극적으로 따라야 할 최고 명령권자는 대통령이며 군인이 그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따른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검사의 주장에 의해 반박된다. 무엇보다 군인은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올곧은 신념을 지키는 박태주 스스로가 김영일의 말이 대통령 시해를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향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고 평가되는 에피소드, ‘육본이냐 정보부냐’를 재판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증거로 상상했다는 점이다. 정인후는 중앙정보부가 아닌 육군본부로 향하면서 김영일이 즉각 체포된 점을 강조, 당시 ‘육본’으로 가자고 의견을 낸 박태주는 상급자의 뜻을 따를 의사가 없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내란이 진짜 목적이었다면 그들의 세력이 버티고 있는 중앙정보부로 가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 박태주는 굳이 육군본부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10·26 사건은 김영일 중앙정보부장의 개인적 일탈일 뿐 내란 공모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를 증언해줄 인물이 차에 동석하고 있던 정진후 육군참모총장(정승화 모티브, 이원종)이며 그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정인후가 고군분투하는 내용은 픽션이다. 하지만 김재규와 전두환, 한국 정치사의 운명을 바꿨다고 하는 일화가 당시 함께 있던 인물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 중심으로 각색되어 법정물의 중요한 재료가 된 것은 충분히 창의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역사 재현 영화는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곧 스포일러가 된다. 김재규를 포함한 기소자들에게 전원 사형이 집행됐다. 실존 인물 박흥주 대령은 16일 만의 졸속 재판 이후 사형이 확정되고 다른 기소자들의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80년 3월6일 사망했다. 영화는 정인후 변호사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재판에서 졌다는 승패의 기록이 아닌 생명 경시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는 몇달 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 알고 있다. <행복의 나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사법 체계가 정치 세력에 의해 어떻게 휘둘리고 오히려 생명의 존엄성을 해쳤는지 법적 논리와 법정물의 장르 문법으로 고발한다. <그때 그사람들>을 둘러싼 외적인 법적 논란이 영화만큼 독한 블랙코미디가 됐다면 <행복의 나라>는 가장 공정해야 할 법정에서 진행된 최악의 정치재판으로 사법 체계의 부조리를 영화 내적으로 끌어온다. 이는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소시민적 각성을 강조하거나 권력 집단의 갈등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하는 이전의 흐름과 구분되는, 한국 상업영화가 실패의 역사를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 일부 신에서 감정이 서사를 앞서는 등 모든 면에서 매끈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행복의 나라>가 거둔 성과는 명확하다. 최근 10년간 나온 상업영화만으로도 역사 연대표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이어지는 기사 ‘영화로 정리하는 20세기 대한민국 근현대사 픽션 영화 정리’ 참고) 역사영화가 충무로에서 매혹적인 아이템이 된 지금, 대중영화에는 성공 법칙에 고착화되지 않은 서사와 장르적 탐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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