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듀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소설가·영화평론가 듀나의 30년을 돌아보다 소수자적 감각을 바탕으로 쌓아가는 장르의 다양성
2024-08-23
글 : 강은교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올해는 듀나(이영수)가 PC통신 하이텔에 등장해 소설과 평론을 게시하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씨네21>이 1995년에 창간되었으니, 듀나라는 아이덴티티의 탄생이 (짐작건대 가장 폭넓은 독자층에 듀나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매체인) 이 잡지의 탄생보다 조금 앞선 셈이다. 듀나가 창간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편집장이 수차례 바뀌는 와중에도 꾸준히 영화와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게재해왔음을 고려하면 <씨네21>이야말로 듀나의 30주년을 기념하기에 가장 적절한 지면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대부분의 독자들은 듀나를 영화평론가로 알고 있겠지만, 정작 나는 SF를 애호하는 연구자로서 그의 소설에 더욱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곽재식 작가는 듀나의 단편집 <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2022)의 추천사에서 듀나를 소설가가 아닌 영화평론가로만 아는 세간의 인식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토로한다. “우리가 꿈꾸는 더 좋은 세상이라면 마땅히 반대로 듀나 작가의 영화평론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은 소설도 훌륭한데 영화평론도 잘 쓰네’라고 할 텐데.”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듀나의 정수는 영화평론이 아닌 소설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듀나라는 작가의 전체 상을 부족하게나마 그려보기 위해 그의 소설과 평론을 아우르고자 한다.

장르의 작법과 독법을 모두 알려주다

한국의 창작자들과 독자들에게 장르 작품을 창작하는 법과 감상하는 법 모두를 알려준 작가이다. 문학과 영화, 음악과 무용을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적 지식을 갖춘 듀나는 장르 소재나 관습의 출처,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사회정치적 함의와 미학적 가치의 변천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창작하고 평가한다.

먼저 듀나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듀나 이전까지 한국의 ‘창작’(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SF 소설은 번역된 해외 SF 소설과 구분되기 위해 ‘창작’이라는 말을 구태여 붙여야 할 만큼 드물었다) SF는 미국이나 일본의 SF를 어설프게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인이 쓴 소설임에도 주인공이 미국인이거나, 주인공이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배경은 미국이나 가상의 우주 제국인 식이었다. 그러나 듀나는 우주전쟁, 외계인 침공 같은 전형적인 SF 소재를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구체적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이 ‘자연스러움’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 최근까지만 해도 한국이나 한국인이 지구적·우주적 사건의 중심에 자리하는 일을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배명훈 작가가 <SF 작가입니다>(2020)에서 지적했듯, 해방 이후 한국의 ‘글로벌 이슈’란 언제나 미국이 해결해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한국인 주인공의 모험담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듀나는 SF 장르의 재료와 한국의 맥락을 성공적으로 결합해냈다. 이는 제도적 민주화의 달성, 탈냉전 국면으로의 이행 등 1990년대 초중반의 사회정치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듀나 자신이 각각의 장르 재료가 지닌 잠재력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성취다. 이러한 ‘장르 현지화’의 전환점으로는 경기도 부천 시내를 배경으로 외계 종족간의 우주전쟁을 그린 장편 <대리전>(2006)이 자주 거론되는데, 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이 작품을 ‘동네 SF’라고 평한 데서 비롯한 바가 크다. 그러나 나는 <대리전> 이전에도 듀나가 줄곧 한국적 맥락을 자신의 소설에 담아왔다는 점을 짚고 싶다. 단순히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을 뿐 말레이시아에서 한국 남성임을 가장하며 현지 여성들을 추행하고 폭행하는 안드로이드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미메시스>(1994)에서 어찌 한국 사회의 단면을 읽어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듀나가 근대국가의 제국주의적·기술관료적 욕망과 뗄 수 없는 SF 장르의 관습을 탁월하게 변용하고 전유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20세기 말의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시공간에 대한 비판적 인식, 즉 소수자적 감각이 자리한다. 당시 듀나는 도무지 우리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것 같은 재료를 가지고 우리에게 와닿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거의 유일한 SF 작가였다.

이렇게 듀나는 장르의 문법과 관습을 우리의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창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한국 장르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SF뿐만 아니라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이후 한국 장르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김보영, 곽재식 등 많은 후배 작가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듀나는 30년 동안 자신의 작품 세계를 끊임없이 진화시키며 시대적 변화와 적극적으로 소통해왔다. 이는 듀나의 최신 단편집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2024)의 표제작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MeToo 운동, N번방 사건 등 최근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젠더 폭력 이슈를 환기하는데, 성 착취 가해자의 추악함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완전무결한 피해자성에 대한 희구라는, 동시대 페미니즘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걸작이다.

범작과 망작을 포괄하는 복수의 계보 속에서 평론하기

듀나의 소설이 한국 장르문학에 새 지평을 열었다면, 그의 평론은 영화와 대중문화 작품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듀나는 해당 작품을 평가할 때 장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이 자리한 계보를 짚어내고 이를 통해 공정한 평가를 내린다. “어떤 작품의 독창성을 평가하려면 그 작품을 이루는 것들 중 무엇이 인용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은 듀나 평론의 기본 원칙이다(<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이하 <옛날 영화>).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 대한 비평이나 최근 한국의 SF영화를 다룬 비평들에서 듀나가 지적하듯, 자주 간과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히 SF와 같이 축적된 장르 관습이 그 자체로 작품을 구성하는 경우라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각각의 SF 작품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역사적 현실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행 텍스트들이 형성해온 거대한 상호텍스트적 세계, 이른바 ‘메가텍스트’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듀나의 평론은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온 소재의 독창성을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클리셰라는 이유만으로 작품의 장르적 성취를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피해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듀나가 계보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거나 수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듀나는 “세월이 흐르며 성장하는 것은 다양성”(<옛날 영화>)이라는 진보주의적 믿음을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장르 계보가 상당 부분 여성, 유색인종, 노동계급을 배제하는 식으로 만들어져왔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소외된 목소리들을 포괄하는 복수의 계보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전의 목록만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범작들, 심지어 망작들도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중문화의 역사는 소수의 명작만이 아니라 다수의 범작과 망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모두가 장르의 다양성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듀나에게 있어 범작과 망작을 포함한 모든 작품들은 장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장르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토대인 셈이다. 이러한 듀나의 방법론은 언제나 이전의 성취를 바탕으로 발전하는 대중문화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하나의 지침이 되어준다.

마지막으로, 계보를 중시하는 듀나의 ‘잘난 척하는’ 태도에 대해 변호하고 싶다. 듀나는 트위터에서 ‘여러분이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종종 꼰대 취급을 받곤 한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여성 서사’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이다.) 눈앞에 놓인 작품의 장점이나 결점이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이들에게, 계보 속에서 작품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듀나의 참견은 아무래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든 이가 듀나만큼 방대한 분량의 소설, 영화, 드라마를 섭렵할 수는 없으며, 그럴 의무도 없다. 그러나 듀나의 이러한 ‘꼰대질’과 그에 뒤따르는 장대한 레퍼런스 목록은 (지난 7월에 열린 듀나 데뷔 30주년 기념 포럼 ‘시간을 거슬러 온 듀나’에서 UC 데이비스의 김규현 교수가 지적했듯) 결코 ‘내가 너보다 많이 알지?’라며 으스대거나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비록 듀나는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2001)에서 자신을 스놉이라 인정한 바 있지만, 동시에 타인의 언어에 자신의 판단이나 평가를 외주주는 것을 엄격하게 경계하고 있기도 하다. 말인즉슨, 듀나는 독자들에게 직접 작품을 접하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듀나의 평론은 언제나 독자들을 더 넓은 세계, 즉 옛날 영화들과 소설들이 펼쳐 보이는 과거의 세계로 초대한다. (이는 온갖 레퍼런스들로 가득 찬 듀나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듀나의 초대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화답은 기꺼이 그 여정에 동참하여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다.

30년 내내 지켜온 일관성의 세계

듀나의 소설과 평론은 그 방법론과 관점에서 일관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듀나가 언급하는 레퍼런스의 범위가 너무나 광대한 나머지,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이 섭렵했을 리는 없으므로 듀나는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집단일 것이라는 추측이 종종 제기되곤 한다. 소설 쓰는 듀나와 평론 쓰는 듀나가 따로 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듀나가 초창기에 스스로를 ‘듀나와 그 일당들’이라고 복수로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누군가의 익명성 뒤에는 무언가 비겁한 술수가 숨어 있으리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피상적인 판단일 뿐이다. 막상 듀나의 작품 세계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러한 추측이 별 근거 없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취향의 차원에서든 문체의 차원에서든, 듀나만큼 소설과 평론을 넘나들며 30년 내내 견고한 일관성을 유지해온 작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듀나가 한명이라는 데 기꺼이 내기를 걸 수 있다. 만약 혹시라도 훗날 진상이 밝혀졌을 때 내가 틀린 것으로 드러난다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SF 소설가 앨리스 셸던이 남성이라고 단언했다가 지금까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로버트 실버버그처럼 나를 마음껏 놀려도 좋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추천할 만한 일은 듀나가 한명인지 여러 명인지(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추측하는 쓸데없는 게임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듀나의 소설과 평론을 직접 읽기 시작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