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이미 우린 SF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듀나 인터뷰
2024-08-23
글 : 이다혜

- 데뷔 30주년 축하드립니다. 데뷔 30주년 기념 포럼 ‘시간을 거슬러 온 듀나’가 열렸는데요, 그에 앞서 몇달간 콜로키엄도 진행되었습니다. 행사들을 어느 정도 팔로업했나요.

= 포럼에 온라인으로 참여했고 콜로키엄 자료 PDF를 받아서 봤어요.

- 창작자이자 평론가로 긴 시간 활동해오셨는데요. 지난 30년을 돌아보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들을 떠올린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글쎄요. 전 제 과거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연인인 저에겐 정말 특별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듀나에겐 자잘한 마감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거 같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동안 엄청난 도약이나 변화를 겪은 거 같지는 않아요.

- 90년대의 창작 환경에 대해서 포럼에서 다각도로 다루어졌는데요. 처음 글을 쓰던 때가 기억나는지요.

= 하이텔과 같은 통신망 시절의 분위기가 기억이 납니다. 아마 저의 대부분이 그 시절에 만들어졌을 거예요. 단지 언제부터 그 세계에서 멀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 그 시기 과학소설 동호회에서는 해외 걸작들에 대한 소개나 감상이 주를 이루었는데요.

= 작은 그룹이었고 작은 그룹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번역되지 않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가 위계에 큰 영향을 차지했죠. 그래도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려는 시도도 꽤 있었습니다. 코니 윌리스가 그때 꽤 많이 번역됐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창작으로 연결되었는데 피드백도 딱 그런 모임에서 나올 법한 것이었어요. 그 결과 제가 있긴 했으니까 저에겐 중요한 시기였죠. 저 자신은 다른 창작물에 대한 피드백이 활발한 편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전 백 단위 이상 조회수가 올라가면 만족했습니다. 피드백도 좋았지만 발동이 걸려서 계속 쓸 수 있었다는 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 꾸준히 창작하는 원동력이 있다면요.

= 폐인이 되지 않겠다는 처절한 욕구요? 일단 글을 쓰면서 저만의 세계를 만들었으니 거기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 처음 SF 소설을 써보고 싶다, 혹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 아무래도 과학소설 동호회에 가입한 게 결정적인 동기겠지요. 그전에도 안 썼던 것은 아닌데, 그것들을 완성해서 남에게 읽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독자이긴 했는데… 모르겠어요, 전 당시 이것저것 쑤셔보는 중이었습니다. 과학소설 동호회에 가입한 것도 어느 정도 우연이었던 것 같아요.

- 데뷔 30주년을 맞은 올해 중요한 소설집들이 연달아 출간되었습니다.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 단편집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와 듀나 작가 데뷔 30주년 기념 리뉴얼판 <너네 아빠 어딨니?>(구판 <용의 이>), 신작 단편을 모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이 그 책들입니다. 초기 단편과 신작 단편을 다시 검토할 때 만족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에 차이가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 다들 다양한 이유로 아쉽지요. 거기에 대해 너무 신경은 쓰지 않으려 합니다. 과거의 작품들이 아쉽다면 당시의 저와 지금의 제가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 당시의 저는 이미 죽었고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미래에 집중해야죠.

- 예전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 아주 많이 바뀌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초창기 글들을 읽어보면 소위 ‘정상적인 어른’을 그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 게 보입니다. 기혼자이고 아이도 있고 어른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죠. 그런 사람들을 그리는 게 어른 작가로서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요샌 그런 거 안 합니다.

- 성장기에 영화를 접한 방식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OTT를 통해,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영화를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른 시대였는데요.

= 아무래도 텔레비전 영화들이 저에겐 가장 중요했지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그리고 AFKN을 통해 자막 없이 본 영화들. 정영일 평론가가 소개했던 레너드 말틴의 별점도요. 전 레너드 말틴의 영화 가이드를 한권 갖고 있었는데, 너무 자주 읽어서 분해되어버렸습니다. 전 이 책에 소개된, 제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영화들을 사랑했어요. 그것들은 종종 제 꿈의 일부가 됐고 결국 소설 속에 슬며시 녹아들었습니다. 그 뒤에 비디오와 DVD 시대가 왔고 제 갈증은 많이 사라졌지요. 지금은 정말 영화 보기가 쉬운 시대인데, 궁금한 영화에 대한 갈망이 주는 쾌락은 많이 사라진 거 같습니다. 한 영화를 느긋하게 사랑하기엔 보는 작품이 너무 많기도 하고요.

- 미국영화,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작가님을 매혹시켰을까요.

= 아무래도 도피처였지요. 저는 20세기 후반 남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있다면 일단 찌르고 봤습니다. 서구의 영화와 드라마는 제가 겪어야 할 현실에 대한 비교적 좋은 대안이었습니다. 전 30, 40년대 할리우드영화들을 더 좋아했는데, 제 부모 세대 영화광들의 ‘추억의 영화’ 느낌이 덜 났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제가 ‘추억의 영화‘들을 싫어한 건 아니지만요. 장르물이 많다는 것도 장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만족스러운 장르 경험을 하기는 어려웠으니까요.

- 읽고 본 작품이 늘어날수록 새로움을 느끼고 매혹되기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본 작품들에만 매여 있어도 안된다는 강박 또한 존재하고요.

= 이전 작품에만 머물 수는 없죠. 가끔 온라인에선 옛날 SF가 좋았다는 향수 섞인 글이 올라오는데, 아니, 지금 SF가 존재하는 건 그걸 쓴 사람들이 옛날 SF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과거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옛 작가들이 하지 않은 걸 해야죠. 전 과거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과거가 없는 척은 더더욱 못하겠고.

- 리뷰, 나아가 평론을 쓰기 시작한 방식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 하이텔에 일기처럼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 <씨네21>에서 작은 자리를 마련해주었지요. 그리고 제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전 그냥 떠밀려갔던 거 같아요. 사이트를 만든 건 <씨네21>의 칼럼 연재가 끝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계속 말하지만, 전 폐인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뭔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 아끼는 장르들을 처음 접한 시기와 주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제 세대 사람들은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축약본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동서추리문고가 나타났습니다. 동네 문방구에서 몇 백원씩 주고 사면서 제 라이브러리를 넓혀갔지요. 아무래도 SF의 비중이 낮았기 때문에 더듬더듬 원서를 읽어야 했고요. 그렇게 해서 읽은 책들은 다들 비슷했습니다. 제 리스트엔 페미니스트 작가들 비중이 조금 높았는데 그게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최근 듀나 작가님의 소설 영어판이 잇달아 출간되었습니다. <평형추>의 영어판 <Counterweight>(2023)에 이어 이번에는 단편집 <Everything Good Dies Here>(2024)도 출간되었어요. 이번에 소개된 작품은 단편선집인데요. 어떤 작품을 실을지에 대해 작가님과 논의가 있었나요. 한편 <평형추>의 리뷰는 <뉴욕타임스>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 아뇨. 전혀 논의가 없었습니다. 단편들은 모두 역자 선택이에요. 원래는 <아직은 신이 아니야>의 몇몇 챕터도 발췌해 실을 계획이었는데, 그 책은 나중에 따로 전체가 번역될 예정입니다. <와이어드>의 평자가 제 책을 토머스 핀천의 소설과 비교했습니다. 머리 맞고 골방에 갇혀 10년 동안 한국 드라마만 본 핀천이 쓴 소설 같다나요. 많이 웃었는데, 핀천은 정말 옛날 저에게 영향을 많이 준 작가입니다.

- SF영화에 대해서는 비평문을 여러 차례 게재했습니다만, 한국 SF 소설에 대해서는 많은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 SF에 대한 글을 꽤 썼습니다. 제 책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에서도 SF의 비중은 커요. 단지 동시대 한국 SF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글을 쓰기엔 몇몇 작가들은 저와 너무 가까워요. 제가 과연 충분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 동시대에 활동하는 한국 SF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작가님의 의견도 듣고 싶었습니다.

= 지난해과 지지난해엔 요새 한국 작가들의 SF를 서구 SF보다 더 많이 읽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연말에 계산해 보니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신기했어요.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영향을 받느냐.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 동시대 한국 작가들과 공통된 대기를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겠죠.

- <씨네21> 1464호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찮기 그지없다”라고 썼습니다. 알고리즘이 큐레이션을 제공하는 시대, SNS든 OTT든 “우리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진” 타임라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대에, ‘새로고침’이 의미 있게 하기 위한 작가님의 방법이 있을까요.

= 전 지난해부터 이전에 읽었던 고전들을 한달에 한권씩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취향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읽었던 책들에 대한 제 생각을 다시 확인하고 그걸 통해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 가지들이랄까 그런 걸 찾고 있는 중이에요. 세계문학전집의 고전 리스트는 옛날보다 지금이 더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그 무개성과 강압성 때문에 제 취향에서 벗어난 독서가 가능하거든요.

- ‘무개성과 강압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 모든 고전 리스트는 무개성과 강압성을 추구합니다. 과거의 수많은 책에서 정선된 것이고 그 때문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이죠. 물론 정말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계문학전집 리스트만 해도 꽤 빨리 변해요. 당연히 고전이라고 생각했던 책들 역시 잊히고요. 지금의 세계문학전집과 이전 것을 보면 리스트가 완전히 다릅니다. 여성과 비서구 작가들이 늘어나고 장르적으로도 더 다양하지요. 하지만 그런 리스트들이 추구하는 무개성과 강압성은 지금처럼 자신의 취향 안에 갇힐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출구도 있겠죠.

- SF 미스터리, 고전적 미스터리에 비해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리는 거의 창작하지 않는 편입니다.

= 정통 미스터리 단편집을 한권 냈으니 거의 안 쓴 건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전 무대가 되는 세계를 통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SF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지요.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다보면 세계를 고칠 수 없다는 게 종종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일단 쓰기 시작했다면 그 세계의 현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죠. 아무리 벌어지는 사건이 비현실적이라도요. 동시대 배경의 추리소설을 쓰면서 느낀 건데, 전 ‘막연한 현재’를 갖고 추리소설을 못 쓰는 거 같습니다. 시공간의 정확성이 중요하더라고요.

- 저는 <민트의 세계>는 성장물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왔는데요. 로맨스나 성장물에는 관심이 없거나 쓸 생각이 없다고 반복해서 얘기하셨어요.

= <민트의 세계>에서 민트는 전혀 성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 캐릭터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고 제법 영리하지만 철저하게 얄팍하지요. 단지 이 애에겐 장점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자신의 힘을 의미 있게 쓰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민트는 자기보다 고민이 많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서 목표를 멋대로 빼앗아옵니다. 전 이게 꽤 재미있는 동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민트는 힘을 쓰는 것 자체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뭘 하고 놀아도 좋은데, 그래도 목표에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본격적인 성장물을 쓰려면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더 커야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조금 더 긴 소설들을 써야겠죠. 전 얼마 전에 신일숙의 <1999년생>의 속편인 <2023년생>을 썼습니다. <1999년생>은 모범적인 성장물입니다. 하지만 전 이 소설을 쓸 때 제 캐릭터의 성장보다는 신일숙이 만든 세계를 제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지요. 전 신일숙이 만든 캐릭터 몇명을 등장시켰습니다. 중년을 넘겨 다들 좀 꼰대가 됐는데, 이것도 성장일까요. 로맨스를 안 쓰지는 않습니다. <첼로> <태평양 횡단특급> <추억충>은 로맨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체질상 로맨스 작가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로맨스를 써야 할 때 전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최단 거리를 찾습니다. 로맨스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은 정반대로 가죠. 전 로맨스를 쓸 때 주로 프랑스 고전 작가들을 모델로 삼습니다.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이나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의 사랑> 같은 책 말이죠. 제가 좀 덜 민망해하며 작업할 수 있는 스타일을 그 소설들이 제공해주는 거 같아요.

-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님은 현시대를 사는 어른들에 냉정하다는(혹은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소년 주인공들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힐 때가 있고요.

= 제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년물을 써달라고 의뢰를 받기 때문입니다. (제 최근 단편인 <자코메티>도 청소년 단편 앤솔러지인 <녹아내리기 일보직전>에 실렸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 제가 어린 시절 읽었던 청소년이나 어린이 주인공 소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제가 청소년 주인공을 쓰는 걸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동시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사실주의 소설은 절대로 못 쓸 거 같아요. 쓸 생각도 없고. 전 제가 청소년이었던 시절을 좋아 적도 없습니다. 근데 그와 별도로 전 동시대 한국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전 한국 어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의 상당 부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른 주인공을 내세우더라도 이 사람들이 아주 어른처럼 행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그 때문에 제 주인공들의 청소년 비중이 실제보다 높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작가님의 작업 루틴에 대해 들려주세요. 소설의 경우 청탁을 받고 시작하는 작업이 많을지, 청탁과 별개로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궁금했습니다.

= 일단 늘 굴리는 이야기들이 몇개 있긴 합니다. 어떤 것들은 몇십년째 머릿속에서 구르고 있지요. 이번에 쓴 단편 <자코메티>의 아이디어는 20세기에 나온 것입니다. 그 옛 아이디어가 새 환경에 떨어지니까 이야기가 완성이 되더라고요. 보통은 청탁을 받은 뒤 이야기를 짜는 편입니다. 전 대부분 내용을 모른 채 이야기를 시작해요. 중반을 넘어서면 지금까지 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게 되고 그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끝난 뒤에도 그걸 느낄 수 없다면 큰일 난 거죠. 제가 얼마 전에 끝낸 단편이 바로 그런 꼴이라 전 지금 난처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할 텐데요.

- 많은 창작자들이 X와 같은 SNS에 빠져 지내는 시간 때문에 창작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곤 합니다.

= 맞습니다. 전 트위터를 이렇게 많이 해서는 안돼요.

- <씨네21>에 싣는 글들을 포함해, 예정된 장기 마감에 끼어드는 급한 마감들을 조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합니다. 지난 몇달 동안 전 계속 소설 마감에 실패하고 있어요. 단행본 마감이어서 그런 것이긴 한데, 조금 미칠 거 같습니다. 그래도 잡지 마감 같은 건 최대한 성실하게 맞추려고 합니다. SNS를 안 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요.

- 글을 쓸 때 돌아다니면서 모바일 기기로 쓴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특별히 잘 써지는 장소나 이동방식이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 Byword라는 앱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며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지금과 같은 날씨에는 쇼핑몰 같은 곳밖엔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없죠. 날씨가 좋으면 가끔 하천으로 나가긴 하는데요. 하여간 책상에서 글을 쓴 건 거의 10년 전이 마지막입니다. 바람의 화원 방영되었을 무렵에 넷북을 샀는데 그 뒤로 데스크을 거의 안 썼어요. 이게 저에게 좀 나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집중력 같은 데에.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해나가야죠.

- 소설과 평론 모두 마찬가지인가요.

= 네, 마찬가지입니다. 전 처음부터 쓰는 편입니다. 앞 문장이 없으면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해요. 그래서 글이 막히면 난처해집니다. 그냥 그 자리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 포럼 때 소설가 곽재식 작가님의 발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처음 듀나 작가님이 데뷔했던 때에는 한국적인 문제의식에 관심이 없는 탈한국적 작가 취급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한국 배경 SF를 정착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고요. 흔히 한국 소설에서는 리얼리즘이 중요시된다고 하고, 그런 사고방식은 장르(소설)에 대한 비평을 협소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장르소설은 원래 탈국가적인 장르적 비현실성을 공유하는 거 같습니다. 채만식이나 김내성의 추리소설을 보면 30년대 조선의 풍속 묘사도 볼 수 있지만 그걸 넘어서는 장르적 비현실성이 있고 그건 서구 추리소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요. 양쪽을 다 봐야 하는데. 근데 그건 옛날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 리얼리즘과 한국적인 면에만 집착하면 비평 자체가 불가능하죠.

- ‘다시 읽기’ ‘다시 보기’도 많이 하나요.

= 보르헤스, 도일, 웰스, 맨스필드, 콘래드… . 지금은 이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전자책이 발명돼 좋아하는 단편 작가들의 작품을 어디에나 가져갈 수 있게 되었는데 정말 좋아요. 시간이 남을 때 아무 셜록 홈스 소설을 꺼내 읽을 수 있는 사치는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죠. 영화로는 버스터 키턴과 자크 타티의 코미디, 진저와 프레드의 뮤지컬, 히치콕의 스릴러영화들이 떠오릅니다. 전 종종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볼 영화를 고르는데 요새는 <사랑은 비를 타고>와 <유령과 뮤어 부인> 사이를 오갑니다.

- 독자가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에 개입하지 않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곤 하는데요.

= 아뇨, 전 개입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허망하지요.

- 나이를 먹고 관점이 변한 경우 중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을까요.

= 발자크의 소설들은 지금이 더 재미있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 소설의 깊이 때문이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나이 들면서 불완전성과 결함을 더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콘래드 장편에는 은근슬쩍 구성이 불완전한 면이 있는데 전 그 영향을 꽤 받는 거 같습니다. 다른 작가라면 공들여 묘사했을 결정적인 사건의 묘사를 회상으로 얼렁뚱땅 넘긴다거나. - 반복해 되돌아가는 작가군이 있다는 것이 작가님의 창작, 정신 활동에 있어 긍정적인 역할을 하나요.

= 긍정적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저가 되게는 하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저이니 저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해야죠.

- 최근 재미있게 읽은 비문학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 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전 그 책을 문학으로 읽었던 거 같아요. 문학 맞죠. 과학 문학.

- 데뷔 30주년 기념 포럼 때, 듀나 작가님의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을 여쭤봤었는데요. 편애하지는 않으려 한다고 얘기하셨지만 최근 작 중 <구부전> <추억충>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을 언급했습니다. 이유로는 “독자들을 비교적 잘 통제한 것 같아요”라는 짧은 코멘트가 있었고요. 이 코멘트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 지금 저의 소설들을 시작하고 싶다면 거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긴 해요. 물론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제 새 단편집에 실렸으니 그 책을 홍보하는 건 중요합니다. 통제에 대해 말한다면 쓰면서 했던 계산들이 제대로 반영됐고 그게 독자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의도와 전혀 다르게 읽어도 재미있긴 할 텐데.

-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에 수록된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에서는 작가님 소설에서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스토리텔러의 이야기입니다. 필멸자가 죽음의 불안을 이겨내는 방식으로서의 창작과 독서를 생각하게 만들어요.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종교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역시 창작에 대한 메타픽션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왜 창작하는가”라는 질문이 작가님에게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 최근 들어 유달리 그래졌습니다. 이미 우린 SF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조금은 사이버펑크물이기도 하고 조금은 밀리터리 SF이기도 하고 조금은 재난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SF라는 장르의 글을 쓰는 행위가 무엇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다음 예정인 작업은 무엇인가요.

= 앞에서 말했듯, 신일숙의 고전 <1999년생>의 속편인 <2023년생>을 썼습니다. 팬들이 저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연작 단편집 두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퀼라의 그림자>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쓰면서 좀 애를 먹었어요. 마지막 단편을 쓰기 시작할 때 제 허구의 세계에서 현실이 개입하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 혹은 비소설.

= 이지은 작가의 <츠츠츠츠>.

- 소설을 쓰되 읽을 순 없음 vs 소설을 읽되 쓸 순 없음

= 쓸 순 없음. (소설 말고 다른 걸 쓰죠.)

- 소설을 쓰다가 전개가 막히면 나는 그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 vs 딴짓을 시작한다

= 전 책상에서 소설을 안 씁니다. 돌아다니면서 모바일 기기로 써요. 그러니까 전 언제나 딴짓을 하면서 글을 씁니다.

-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 내가 즐겨하는 딴짓은.

= 트위터. 아아.

- 나에게 셰익스피어란.

= 굳이 형식적 완벽함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위대함에 도달했던 거장.

- 나의 묘비명을 쓴다면.

= 전 묘지가 없었으면 합니다. 시체는 해부용으로 기부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