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씨네21>의 추천작 가이드 ①
2024-10-01
글 : 씨네21 취재팀

전,란

김상만/한국/2024년/127분/개막작

전쟁(戰爭)의 괴로움은 비단 싸우고(戰) 다투는(爭) 일에만 있진 않다. 적과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격변의 혼란(亂)이 시작된다. <전,란>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을 배경으로 서로 어지럽게 엮인 채 다투는 두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다. 아비의 빚 때문에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천영(강동원)은 이름난 무가(武家)에 노비로 팔린다. 무가의 외아들 종려(박정민)는 그런 천영에게 마음이 간다. 마음씨 고운 종려가 천영을 챙기는 사이 무예에 빼어난 재능을 지닌 천영은 종려의 수련을 돕고, 둘은 어느새 몸종과 양반이란 신분을 넘어 친구가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자 모든 게 뒤집힌다. 종려는 선조(차승원)의 호위무사가 되어 한양을 떠나고 남겨진 천영은 의병이 된다. 이윽고 전란의 세월을 지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눈다.

넷플릭스 영화 <전,란>의 칼끝은 재미를 향한다. 박진감 넘치는 극적 구성의 재미, 화려하고 묵직한 액션을 보는 재미,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를 모두 갖췄다. 제작과 각본에 참여한 박찬욱 감독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장르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김상만 감독이 유려하게 풀어낸 이 작품은 촬영, 미술, 음악, 의상, 분장 전 분야에서 고르게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가운데 비장미 넘치는 액션이 무게중심을 잡는다. 여러 영화들(특히 한국 시대극)의 익숙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되 속도와 무게, 박력 있는 전개와 적절한 유머를 균형감 있게 녹여낸 왕성한 소화력 또한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강동원, 박정민 두 배우의 안정된 연기를 기둥 삼아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등 배우의 매력을 십분 살린 독특한 캐릭터 해석이 보는 맛을 더한다. 사극이란 좋은 무대 위에서 ‘대결’이란 본질에 집중한, 웰메이드 사극 대작이다. /송경원

아노라 Anora

션 베이커/미국/2024년/140분/아이콘

아노라(마이키 매디슨)는 스트립 클럽에서 일한다. 어느 날 그에게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러시아 재벌 집안의 청년 이반(마크 에이델쉬타인)은 러시아어에 능한 아노라에게 흥미를 보이며 클럽 밖에서의 만남을 제안한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낸 지 오래지 않아 라스베이거스에서 충동적으로 혼인 신고를 한다. 소식을 접한 이반의 부모는 하수인을 보내 경멸이 담긴 협박을 건넨다. 유쾌한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흘러가던 <아노라>가 경로를 틀어 여긴 더이상 꿈의 장소가 아니라고 경고하는 순간이다. 숀 베이커 감독은 <스타렛> <탠저린> <레드 로켓> 그리고 <아노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성노동자들에게 주목해왔다. 이들의 노동과 삶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대상화하지 않는 태도의 바탕엔 그들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접근이 바탕이 됐다. <아노라>에서도 클럽 안팎의 아노라의 삶을 동시에 조명하며 그가 처한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주제를 확장한다. 아노라가 기대한 건 계급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랑’을 외치던 이반과의 안정되고 행복한 삶이었다. 그러나 아노라가 그 사랑의 실체를 목도했을 때 영화는 손쉬운 위로를 던지지 않으며, 이 섬세함이 <아노라>가 지닌 미덕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크림> 등에서 활약한 마이키 매디슨은 이번 작품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선보이며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공고히 했다. 2024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조현나

플로우 Flow

긴츠 질발로디스/라트비아, 프랑스, 벨기에/2024년/85분/오픈 시네마

갑작스러운 대홍수가 세상을 뒤덮은 어느 날, 천재지변의 공포에 휩싸인 검은 고양이는 수재(水災)로부터 유일하게 자유로워 보이는 돛단배로 향한다. 그 안에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여우원숭이, 카피바라 등 다양한 종이 은신하고 있다. 어느덧 작은 배는 모두의 피난처가 되었다. 각기 다른 신체 능력, 소통 방식을 지닌 동물들은 공통 어려움을 앞에 두고 조금씩 서로를 맞춰나간다. <플로우>는 공통분모 없는 동물들의 생존 본능과 생애 의지를 조명하지만 그들에게 쉽게 안락함을 내어주지 않는다. 거대한 새에게 사냥당하는 고양이의 모습이나 소용돌이치는 폭풍우 등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불쑥 찾아오기 때문이다. 동물도 트라우마를 갖는다. 순록 떼를 보기만 해도 대홍수가 일어나던 순간을 떠올리는 고양이의 불안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장면마다 인간의 문명과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플로우>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롯이 동물들만이 폐허가 된 물의 광장을 지키며 세상을 이어나갈 뿐이다. 생명 다양성의 아름다움, 자연의 위엄과 공포, 생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 이타심과 존중 등 현대사회가 놓쳐가는 귀중한 가치를 그대로 낚아채는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힘이 느껴진다. 특히 동물들의 신체성, 역동성을 실제 모습 그대로 구현해냈고 대사 한마디 없이 이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동물들의 표정 묘사 등을 구체적으로 구현했다. 아름다운 음악 또한 <플로우>에 힘을 싣는다.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심사위원상, 관객상, 음악상 등 총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자연

몽골말 죽이기 To Kill a Mongolian Horse

쟝샤오쉐엔/말레이시아, 홍콩/2024년/98분/아시아영화의 창

뛰어난 경마 기수였던 두 친구 사이나와 하싸는 전통 기마극단에 취업한다. 아버지의 빚과 도시에 사는 아들의 학비를 위해 사이나는 일을 늘리고 가축을 팔지만 오랜 세월 함께한 흰 말과 농장만큼은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토목 회사는 농장과 말을 팔라며 사이나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안한다. <몽골말 죽이기>는 몽골의 고도발전 속 본연의 위치를 위협받는 객체들을 포착한다.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너른 들판과 지평선 너머에서 길어 올린 여명은 무던히 밝은 도시와 대비되는 농밀한 아름다움을 품는다. 역시 미려하게 그려진 전통 기마극은 몽골의 찬란한 역사와 사이나가 꿈꾸던 기수로서의 미래가 맞닿은 환상의 시공간이자 열악한 노동환경이라는 불쾌한 현실의 장소다. 이처럼 몽골의 언어, 전통문화, 자연환경 등 나날이 침식되는 가치들을 붙잡는 장샤오쉐엔 감독의 집요함이 미덥다. 사이나와 말이 오늘날의 풍경에 반항하는 듯한 최종 시퀀스는 시대에 뒤처진 이들에게 허락된 마지막 자유를 가늠하려는 체념으로 읽혀 더욱 가슴이 시리다. /박수용 객원기자

아벨 Abel

엘자트 에스켄디르/카자흐스탄/2024년/120분/뉴 커런츠

<몽골말 죽이기>가 도시로 밀려나는 인물을 거쳐 몽골의 들판을 이야기한다면, <아벨>은 카자흐스탄의 초원을 빌려 인간의 욕망과 부자유를 관찰한다. 소련이 붕괴된 1993년, 남부 카자흐스탄의 협동목장도 해체된다. 목자들은 각자의 몫을 받으려 이합집산하고, 잇속만 챙기는 관료의 행패는 소련 시절보다 더 극심하다. 정직하게 살아온 늙은 양치기 아벨에게 하루아침에 정치화된 마을은 잔혹하기만 하다. <아벨>의 건조한 화법은 화폐화된 양과 땅에 무심하다. 대신 영화가 따라붙는 대상은 유목민의 낭만이 말소된 들판 위의 인간이다. 오프닝의 빼어난 롱테이크를 비롯해 집 안팎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숏들은 인물간의 관계와 욕망의 흐름을 완벽하게 추적한다. 때로 좌표계를 상실한 들판 위 방황이 시대의 혼란한 방향감각에 접하더라도, 이야기는 이내 집이라는 자본이자 원점으로 바삐 발을 돌리며 아벨 가족에게 침투한 현대사회의 리듬을 주지시킨다. 모든 것이 돈인 세상에서 이제는 사람이 울타리에 매인 존재가 되었다. /박수용 객원기자

나미비아의 사막 Desert of Namibia

야마나카 요코/일본/2024년/137분/아시아영화의 창

<나미비아의 사막>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불규칙한 인물이 지닌 매력의 극단을 보여준다. 가와이 유미가 연기하는 21살의 카나는 얼핏 무기력증에 빠진 청춘처럼 보인다. 주변인의 자살 소식을 들어도 당최 공감되지 않고, 직장에서도 그저 영혼 없는 말만 반복한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듯 구는 애인에게 주니가 난 그녀는 곧 자유분방한 아티스트 하야시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참이다. 권태로운 연애에서 불안정한 사랑으로 적을 옮긴 그녀는 언제부턴가 신경질적인 분노를 토해내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닌 카나는 그저 시대의 위태로운 표상으로 쉽게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다. 가와이 유미의 다면체적 얼굴이 구현한 비정형의 인물은 그녀가 마주한 남성이나 사회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적 방황의 불균질한 궤적을 집요하게 추적한 야마나카 요코의 <나미비아의 사막>은 공허와 불안으로 화면을 압도한 가와이 유미의 저력에 힘입어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 /최현수 객원기자

그랜드 투어 Grand Tour

미겔 고메스/포르투갈, 이탈리아, 프랑스/2024년/129분/갈라 프레젠테이션

미겔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는 그가 16mm 필름에 담아낸 동남아 여행의 기록물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촬영을 마치기 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장벽을 마주했으나, 셧다운 기간엔 현지 크루들의 도움을 받아 원격으로 촬영 및 제작을 이어갔다. 1917년, 영국의 공무원 에드워드는 미얀마의 양곤에서 애인 몰리와 결혼할 계획을 세운다. 식을 올리기로 한 날, 에드워드는 몰리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여행을 떠나버린다. 결혼을 결심한 몰리는 에드워드를 따라 ‘그랜드 투어’를 시작해 아시아를 횡단한다. 두 사람의 노정은 태국부터 일본, 필리핀, 베트남 등 다양한 곳으로 이어지며 그때마다 들려오는 내레이션 역시 해당 국가의 언어로 바뀐다. 후반을 장식하는 몰리의 여정이 전반의 에드워드의 여행보다 좀더 극적이다. 일부 여행지는 다큐멘터리의 접근 방식을 취했으나 몇몇 국가의 전통과 자연경관은 환상처럼 연출됐다. 두 연인 역시 꿈의 영역으로 들어가듯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자취를 좇게 한다. 129분의 러닝타임 동안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들며 <그랜드 투어>는 다양한 감각적인 시도를 꾀한다. 두 연인의 엇갈린 여정을 다루며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는 점에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함께 초청된 지아장커 감독의 <풍류일대>와 비교해봐도 좋을 작품이다. <그랜드 투어>는 미겔 고메스 감독의 6번째 장편영화로, 그의 연출작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77회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조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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