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비평] 지붕이 된 어두운 방에서, 함께와 혼자, <새벽의 모든>
2024-10-16
글 : 이보라 (영화평론가)

후쿠시마 료타는 헤이세이 30년간(1989~2019) 일본 문학의 내러티브를 논하며 재난의 자장에 있는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인 정서를 발견한다. 가령 그는 다이쇼 시대(1912~26)에 활발히 생산되던 ‘유토피아’가 1923년 간토대지진과 부딪히면서, (연역적인 진단이지만) 그러한 묘사가 마침 찰나의 “현상”으로 그려지던 게 흥미롭다고 간주한다. 그는 이같은 양상이 헤이세이에서 대두되는 ‘덧없음’의 감각으로 이어졌으리라 짐작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재와 연관되지만 진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신·아와지를 지나 동일본대지진까지 일본인들은 파국을 목격했지만, 어째서 세계는 아직 말소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모순적으로 외부의 강력함과 내부의 무상함을 동시에 감각하는 분열의 세대에게 시공간은 고정되지 못한 채 다만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시선을 옮기면 동시대의 대표적인 예시로 하마구치 류스케가 떠오른다.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내파된 지진과 그 ‘이후’는 인물들에게 거의 선험적으로 각인된 상실(감)이고, 이로써 마침내 극복해야 할 심급이다. 그것이 내 발밑을 지탱하는지 흐르는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로, 그러나 일단 있다는 걸 전제해야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셈이다. (한편 김혜리 기자는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일본 연호에 따르면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두편이긴 하나) <에반게리온>의 “세상이 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어떻게든 폐허 위에서 이어나가려고 하는” 한 세대 사이 감각의 낙차를 언급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아사코>에서 지진은 극장에서 일어난다. 공연을 앞두고 암전된 극장에서 갑자기 진동이 인다. 간신히 불이 켜지지만 샹들리에는 무대로 떨어져 산산조각 난다. 그러니까 진동은 픽션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극장에서 허구의 진입로를 차단한다. 사람들은 바깥-현실로 나가, 역설적으로 그 흔들리는 땅을 밟아야 한다.

<새벽의 모든>에서도 지진이 발생한다. 이때 인물들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중이다(나는 무엇보다 영화 속 두 청년이 성실하건 게으르건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주지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편에서 지진은 꽤 강한 진동을 일으킴에도 어쩐지 ‘이후’와 연루되는 기제로 쓰이지는 않는 듯하다. 이 점이 의외다. 정전이 일어나는데도 인물들은 이 진동을, 조금 포장하자면, ‘느끼는’ 듯 보인다. 집단적 반응이나 조직적 대처가 없는 대신 모두가 불이 꺼진 일터에서 그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위만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다음 장면에서 두 주인공은 밖에서 함께 걷고 있는데, 이는 불안에 잠긴 시민의 발걸음이 아니라 직장인의 노곤한 퇴근길을 담는 데 가깝다. 게다가 야마조에는 지진이 별로 무섭지 않다며, 발작을 처음 경험한 것은 몇년 전 평소처럼 라면을 먹다가였다고 털어놓는다. 재난이 남긴 것들에 주목하는 정동이 근래 더 보편적이었다면, 이제 지진과 거의 무관해지려는 듯한 의지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개인적 증상과 사회적 징후를 분리하려는 이 제스처가 <새벽의 모든>에서 특히 인상적인 지점이었다(물론 그 둘이 이제 이미 너무 밀착된 바람에 아예 구별 불능의 상태가 된 것일 수도 있겠다고,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여하간 <새벽의 모든>에서는 강박적이리만치 인물과 세계는 물론, 인물과 인물도 서로에게 명확한 거리를 약속한다. 심지어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졌음에도 그들은 결코 공적인 거리를 흩뜨리지 않는다(단적인 예로, 야마조에의 병원에 동행하고 매번 그의 집을 찾아오며 연락의 대리인까지 되어주는 오오시마와의 사이는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까?).

그 점과 연관해 나는 미야케 쇼 영화의 아름다운 지점 중 하나였던 ‘접촉’의 친밀함이 <새벽의 모든>에 들어서며 도리어 ‘전달’의 거리감으로 변모한 게 흥미롭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그는 땀으로 범벅된 복서의 신체, 타자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주먹, 거기에 음성을 대신하는 수어의 (소리치는) 손으로 근육의 역량을 선보였다. 유운성 평론가는 <와일드 투어> 후반부에서 타케의 고백을 정중히 거절한 우메가 그의 팔을 잠깐 잡았다가 떠나는 장면을 두고 존 포드의 <친구 사이>(Just Pals)의 영향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렇듯 잠깐이지만 신체가 서로 만나는 순간의 긴장감을 때로는 비애로, 때로는 관능으로 담아내던 미야케 쇼는 이번 영화에 이르러 인물간 접촉을 경계한다(혹은 접촉에 비근한 행위로 후지사와가 야마조에의 머리를 잘라줄 때조차 미야케 쇼는 어떠한 종류의 ‘로맨틱함’도 개입할 여지가 없도록 고정된 롱숏으로 담아낸다).

대신에 여기서 반복되는 행위는 바로 무언가를 전해주는 몸짓이다. 후지사와의 엄마가 장갑 크기를 짐작하기 위해 손을 잡아보듯이 모녀 관계에서 서로 맞붙는 행위는 무리 없이 가능하지만 다른 인물들에게 이와 같은 터치는 쉬이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한 움큼의 거리를 확보한 채로 무언가를 건네주고 또 건네받는 장면들의 근사함이 따로 있다. 이를테면 모두가 퇴근한 밤 다시 회사를 찾은 야마조에가 사장의 맥주를 자신이 따르겠다며 유리병을 건네받(고 따른 후 건네줄)을 때나, 이직이 확정된 후지사와가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밀 때(그녀를 격려하던 사장은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자 사직서를 주머니에 조용히 넣는다). 또는 야마조에가 츠지모토에게 ‘쿠리타 과학’에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전하자 츠지모토는 눈물을 흘리는데, 이를 본 그의 어린 아들이 “이거 써”라며 손수건을 전달하는 장면도 그러하다. 후지사와는 처음 보는 오오시마에게까지 새해 부적을 나눠주지 않던가.

거리(감)는 궁극적으로 관객과 관객의 사이로 수렴한다. 후반부에 이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데, 그곳은 곧 극장이다. 쿠리타 과학의 사람들이 기획하는 돔 형태의 플라네타륨은 오늘날 우리가 유실 중인 극장이라는 장소를 환기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인가? 각자의 자리에 앉고는, 잠깐을 꼭 함께하는 이상한 합의의 장소. 동시에 불이 꺼지면 극도로 혼자가 되는 고립의 장소. <새벽의 모든>은 천체 관람이라는 행위를 주요 테마로 끌어옴으로써 우리의 이 약속이 어둠에서 시작했음을 일러주면서 다시금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의 모습을 체현한다(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밝은 방이라고 일컬을 만한 공간도 있는데, 바로 탕비실이다. 이 회사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탕비실이 사무실 중앙에 마치 커다란 박스처럼 우뚝 자리하도록 설계된 건축 구조다). 사람들은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머리 위의 별들을 응시한다. 스탠리 카벨이 “스크린의 한계는 그것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담는 하나의 용기(container) 혹은 수용력(capacity)의 형태로 나타난다”라고 말하듯 영화는 무형임에도 역설적으로 물리적이라, 둘레를 그리기보다 부피를 채워야 지속 가능하다. <새벽의 모든>은 무한 갱신되는 우주라는 공간을 빌려 주형(mold)과 다름없는 스크린을 경계 없는 지붕으로 소생시킨다. 물론 이 찰나의 공간에서 관객은 함께인 동시에 혼자이다. 장엄한 경험 뒤에 그들은 다시 흩어질 테니까. 거리를 두고서, 이렇게.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송승언,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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