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비평] 반대를 위한 반대 명제, <조커: 폴리 아 되>가 뮤지컬 장르로서 가진 활력은?
2024-10-10
글 : 이병현 (영화 평론가)

<조커: 폴리 아 되>는 1편에서 2년 뒤인 1983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1편이 끝나고 모두가 궁금해했던 진실은 영화 초반 허무하게 밝혀진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이번 작품에서 5명을 죽인 죄로 재판을 앞두고 있고, 희생자 목록에 1편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상담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전편에서 가장 모호하게 처리됐던 부분을 간수의 지나가는 대사로 설명하고 넘어간다. 이번 영화가 1편과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 나는 기대감과 동시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후속작이 전편과 다른 방향을 택한다는 건 도박이다. 성공하면 잭팟을 터뜨릴 수 있지만 실패하면 몰수패에 그친다. 난 이 도박이 성공하길 간절히 바랐다.

앞서 아서 플렉이 재판을 앞두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 이번 작품은 기본적으로 법정물 형식이다. 아서 플렉, 일명 ‘조커’는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다. 2년 전 세상은 잠시 떠들썩했지만 크게 바뀐 건 없고, 단지 아서 플렉을 다룬 TV영화만 나왔을 뿐이다. 변호사는 그를 아동 학대 탓에 이중인격을 갖게 된 환자로 만들어 죄를 경감하려 한다. 아서는 짐짓 그 전략을 따르지만 아주 내키지는 않는 눈치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는 대부분 교도소와 재판정을 오가며 진행된다. 교도소나 재판정에서 벌어지지 않는 모든 신은 대부분 환상 속 장면이거나 영화가 끝나기 30분 전에 몰려 있다. 1편의 겉멋 든 매력 대부분이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에서 긴급 수혈받은 듯한 길거리 장면에 있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이 선택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1편에서도 고담이라는 도시는 그리 매력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아서가 조커로 거듭난다는 명백한 운명으로 달려가기 위해 고담 시민은 죄다 아서에게 적대적인 NPC(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2편에서도 주 배경이 되는 교도소와 법정은 그리 활기찬 장소가 아닌데, 최소한 NPC 스킨은 갈아 끼워졌던 1편에 비해 2편에서는 똑같은 NPC가 똑같은 방식으로 주인공을 괴롭히기 때문에 아서에게 감정이입하는 일은 배로 힘들어졌다. 영화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등장인물 ‘할리퀸’을 추가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1편에 비해 상당히 규모가 축소된 상태에서 호아킨 피닉스와 레이디 가가라는 두 스타가 펼치는 2인 뮤지컬로 활력을 채우려 시도한다.

개봉 전 많은 이의 궁금증을 유발했던 뮤지컬 장르 도입은 대부분 아서라는 인물의 환상과 연관돼 있다. 뮤지컬 장르의 대원칙은 노래와 춤을 지배하는 자가 이야기도 지배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리멸렬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중이라도 캐릭터가 뮤지컬 넘버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건 사랑에 빠진 청년이 세레나데를 부를 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팔 조이 같은 반영웅이 순진한 여성을 꾈 땐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였다. <팔 조이>는 뮤지컬 넘버가 지닌 강력한 힘과 이를 통한 일방적 소통 방식은 일견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는 드문 작품이다. <조커: 폴리 아 되>는 뮤지컬 장르에서는 잘 다뤄지지 않았던 후자의 영역까지 탐구한다. 한편 이건 아서를 다시 한번 비극적 결말로 몰아넣는 잔인한 결정이기도 하다. 예고편에도 나오는 우산 장면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아서는 현실과 다른 환상을 보는 인물이다. 실제로는 검은색인 우산이 아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형형색색 물드는 것처럼, 영화에서 뮤지컬 장면은 대부분 아서의 안쓰러운 현실을 반영한 판타지로 이뤄졌다. 작중 아서가 할리퀸을 향해 “노래가 아닌 말로 해줘!”라고 외치며 흐느끼는 장면은 아서의 자기방어용 망상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장면인데, 영화 내내 괴로운 현실 앞에서 심리적 철수를 반복하던 아서는 이 지점에서 자신이 할리퀸에겐 투사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아서는 할리퀸이 부르는 노래를 막지 못하고, 이제 그에게 뮤지컬 넘버는 주어지지 않는다. 뮤지컬 안에서 할리퀸이 쏜 총에 하복부를 맞은 것처럼, 그는 현실에서도 하복부에 칼을 맞아 죽는다.

호아킨 피닉스는 빙 크로스비처럼 부르거나 프레드 아스테어처럼 춤추는 배우는 분명 아니며, 레이디 가가는 한 장면을 제외하면 평소와 달리 속삭이는 듯한 김 빠지는 창법을 쓴다. 할리퀸이 시원하게 소리를 올리며 조커가 탭댄스를 추는 장면 하나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뮤지컬 장면은 뮤지컬 하면 떠오르는 쾌감을 주는 대신 단지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폭력적인 판타지를 고발하는 역할로만 기능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진정 수정주의 뮤지컬 장르의 효시라고 불릴 만 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수정주의 뮤지컬 따위를 원한단 말인가? 때론 대중이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영화가 있는 법이라지만, 이 수정주의 뮤지컬이 달성한 목표란 대체 뭔가?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개봉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과거 이 작품에 그런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으며, 호평이든 혹평이든 모두 영화에 대한 과대평가라는 요지의 평을 인문 잡지 <한편>에 기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소한 1편은 나름의 매력을 품은 영화였다. 뉴 할리우드 클래식과 무성영화에서 길어온 제스처를 쪼아먹으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활력 잃은 현대 할리우드영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이코드라마 같았다고나 할까? 비슷한 경향에 속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나 <바빌론> 등이 영화의 역사를 직접 호출하며 다소 낯 뜨거운 회고를 보여주거나 <파벨만스>가 감독의 ‘자서전 비슷한 것’에 그친 데 비해, 나름대로 작품 안에서 영화사를 소화하려 노력한 솔직함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조커: 폴리 아 되>는 1편에 가해졌던 별 의미 없는 찬양과 비판에 응답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1편에 대한 주석에 머무르며, 정작 자신의 존재 의의는 전혀 증명하지 못한다.

<조커: 폴리 아 되>는 관객에 대한 믿음이 없는 영화다. 분명 일부 관객은 아서 플렉을 이번 영화에 나오는 조커 분장 추종자처럼 영웅시했고, 그 반대편에서는 조커를 영화 속 검사(이름이 하비 덴트인걸 빼면 공허한 캐릭터)처럼 처단해야 할 괴물로 받아들였다. 일부는 조커를 영화 속 변호사처럼 이 사회가 만들어낸 환자로 보고 동정했다.

영화는 셋 모두 틀렸다고 말하며 아서 플렉은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싶었던 한 쓸쓸한 인간이었다고 강변한다. 이 주장은 그다지 흥미롭거나 새롭지 않으며, 1편의 주제를 그대로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1편을 찬양하거나 비판하거나 얼치기 정신분석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하거나 시도하지 않았던 많은 관객에게 2편은 지나치게 친절한 주석으로 다가온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후속편 전체를 <조커>라는 신화 부수기로 채운 건 관객의 지적 능력을 향한 모독이다. 안타깝게도 <조커>는 구태여 반대할 만한 가치가 없는 테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 에서 <조커: 폴리 아 되>는 안티를 위한 안티테제다. 자기가 만든 허수아비를 자기가 때리는 것처럼 보기에 지루한 구경거리는 없다. 다행히 토드 필립스 감독이 코미디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라니, 정도 없고 반도 없는 이 시리즈가 3부작이라는 합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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