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나의 그날로 돌아가는 마법 - 김해인 편집자의 <룩백> 에세이
2024-10-17
글 : 김해인 (문학동네 만화편집부 편집자)

“만화는 그냥 읽기만 하는 게 나아. 직접 그릴 게 못돼.” “그럼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참으로 성가시고 어렵다. 왜 하냐고? 왜 하겠어… 하고 입을 떼면 오직 한 가지 이유가 떠오르다가도, 또 너무 많은 이유들이 입에 고인다. 왜 만화에 관련된 일(만화편집자)을 하게 되었냐는 물음을 종종 들을 때마다 그런 심정이다. 좋아서… 하고 답하기엔 너무 순수해 보이니까, ‘때 좀 묻은 답을 해야 하나?’ ‘아니 근데 정말로 나 이 일을 왜 하지….’ 하다 보니 떠오르는 어떤 날. 12살의 나는 동네 서점에서 장안의 화제라는 일본 만화 신간 1권을 산다. 얼마나 재밌는지 한번 봐주겠다는 마음으로 두근두근 래핑된 비닐을 뜯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집에 걸어오는 동안 읽는다. 신호등을 건너며 읽는다. 몇몇 사람들이 쳐다본다.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책을 들고 읽으며 집으로 걸어간다. 개천을 지나고 헉헉대며 언덕을 오르고…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하니 어느덧 만화책도 마지막 장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현관문을 여는 대신 뒤를 돈다. 그길로 다시 언덕을 내려가서, 개천을 지나서, 헉헉거리며 서점에 도착한다. 서점에 가는 동안 스스로를 나무라며. 2권은 왜 안 사온 거야, 너 바보야?!!! 집에 걸어가는 동안 만화책을 읽고 그 만화가 너무 재밌어서 코앞까지 도착한 집 앞 현관에서 다시 서점으로 달려갔던 그날의 기억이, ‘왜?’냐는 질문을 파고 파고 파다 보니 떠올랐다. 고작 이런 날이 왜라는 근원적이고도 초거대한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다마는….

여기 한 아이가 있다. 오타쿠의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춘기가 다가오고, 만화 같은 건 접겠다고 선언한 이 아이는 자신의 만화를 너무 좋아한다고, 당신의 팬이라고 말하는 어떤 아이를 만난다. 방금까지 만화를 그만둔다고 말한 아이는 돌연 거짓말을 한다. 사실 만화 공모전을 위한 신작을 그리고 있었다고. 뻔뻔히 큰 소리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세찬 비가 내린다. 우산도 없이, 아마 있었어도 펼칠 생각도 못했을 아이는 팔을 점점 크게 흔들더니, 물웅덩이를 손으로 내려쳐 물보라를 일으켜본다. 발장구를 크게 친 걸음은 깡총거리는 투스텝이 되어 춤을 추는 듯하다.

다수가 <룩백>의 명장면으로 꼽을 이 장면은 만화에서는 단 세 페이지에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 세 페이지, 특히 주체할 수 없이 신난 후지노가 빗속에서 투스텝을 밟는 장면은 양 페이지에 걸쳐 풀컷으로 그려져 있다. 원작자 후지모토 다쓰키는 <룩백>을 그리면서 만화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거두었다고 말했는데, 이 장면은 더더욱 그렇다. 이 세 페이지에는 대사도, 내레이션도, 말풍선도, 쏴아아아처럼 흔히 빗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조차 없다. 다만 출판만화가 할 수 있는 특별한 연출로 그려져 있다. 출판물은 제작 과정에서 반드시 잘려나가는 종이의 일정 영역이 있고, 만화는 특히나 그림이 잘리지 않도록 안전히 그릴 수 있는 다치키리(断ち切り, 재단선)에 맞추어 그려야 하는데, 풀컷은 다치키리 프레임, 재단을 넘어서 그려진 그림이다. 한 장면이 된 오른쪽, 왼쪽의 양 페이지를 꽉 채우고, 채우다 못해 종이를 넘어가는 그림. 지면을 넘어 이 세계로 넘어오겠다는 마음의 폭발. 후지노의 감정은 원작 만화 속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나는 이 장면에서 후지노의 주체할 수 없는 신남, 동료이자 팬 쿄모토를 만난 감격을 느꼈는데, 영화를 함께 본 만화가님은 강한 해방과 자유를 느꼈다고. 약 1분30초 길이로 그려진 영화 속 빗길 장면은 무엇 하나라고 말할 수 없는 아이의 감정을 보다 풍성하게 보여준다. 여전한 것은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후지노의 얼굴.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빗물을 닦지도 않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묻고 싶다.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만화를 그리면 신이 나서, 쿄모토가 있어서, 만화를 그려도 된다는 해방감을 찾아서….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겐 어떤 것도 만화를 그리는 이유가 될 지도.

시간은 흘러 아이는 쿄모토와 서로의 이름을 따 ‘후지노 쿄’라는 필명으로 함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쌔벼파서’ 완성한 단편의 제목은 <메탈 퍼레이드>. 둘은 눈을 뚫고 도착한 편의점에서 <메탈 퍼레이드>의 입선 결과가 실린 잡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펼친다. 처음 만화를 그려 번 돈으로 시내에 나간다. 하루 종일 써도 5천엔밖에 못 쓴 데이트를 한다. 그 모든 순간 쿄모토보다 앞서가고 있는 후지노의 등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다고 결심한 쿄모토가 다른 길을 찾아 떠나고, 후지노는 홀로 프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뿐이었던 동료 쿄모토를 잃는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후지노는 쿄모토를 영영 만날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만화를 그리는 날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된다. 혼자가 된 후지노는 죽은 쿄모토의 방 문을 연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만화 <샤크 킥> 11권을 읽는다. “이 몸이 나설 차례군!” 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아래 적힌 것은 ‘12권에서 계속’. 돌아온 후지노는 연재를 중단했던 만화 <샤크 킥> 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12권이 될 원고를, 좁은 방에서 <샤크 킥>을 읽고 다음 권을 기다렸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다시 펜슬을 쥔 후지노가 있는 공간은 작은 유리창만 있었던 좁은 방에서 통유리창 밖으로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방이 되어 있다. 사각사각 하는 연필 소리는 툭툭탁탁 하는 태블릿 펜슬의 기계음으로 바뀌어 있다. <나카요시> <주간 소년 점프> 등 동경하던 꿈의 연재 잡지가 차지했던 자리는 <샤크 킥> 단행본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단행본의 책등에 적힌 저자명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후지노 아유무’가 아니라 ‘후지노 쿄’다. 홀로 넓은 방 안에 등을 보이고 앉아 만화를 그리고 있는 후지노에게, 나는 또 묻는다.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지금의 넌, 그때와 너무 달라진 너는 왜, 어떻게, 무엇으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거냐고. 지금, 어떤 것도 만화를 그리는 이유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이 질문은 그만할게.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참으로 성가시고 어렵잖아. 오직 한 가지 이유가 떠오르다가도, 또 너무 많은 이유들이 입에 고이는 질문이잖아…. 다만 ‘왜 만화를’이라는 질문에 후지노가 어떤 날, 어쩌면 잊고 있었던 그날을 떠올리기를. 팬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마구 신이 나서, 만화를 그리고 싶은 맘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해방감과 자유에 젖은 채 거세지는 빗속을 달렸던 날을.

여기서부터는 두 사람에게 이런 평행 세계도 있었으면 하는 나의 망상. 그날을 떠올리던 후지노는 그날 따라 피로했는지(만화가는 늘 피곤하니까) 태블릿 PC에 고개를 박고 깜빡 잠에 든다. 잠든 후지노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4컷 만화 그림이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방 안에서 살짝 펄럭인다. 그 순간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는 후지노 뒤로 방문이 열리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떤 아이가 조심스레 들어온다. 신기한 듯 방 안을 가득 채운 만화책을 둘러보던 그 아이는, 잠든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속삭인다. “역시 후지노 선생님은 만화의 천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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