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분기 2~3만 관객을 이끌며 주목받은 <그녀에게> <딸에 대하여> <장손>엔 흥미로운 공통점이 보인다. 그녀, 딸, 장손과 같은 포괄적 의미의 대명사를 제목에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세 작품이 유사하게 취하려 하는 영화적 전략을 고스란히 예견하는 대목이다. 세 작품은 특수한 사건이나 인물,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 주변의 보편적 안건인지를 드러낸다. 더하여 누구나 그 보편적인 이야기의 당사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에게 부담 없이 주지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은 실제 관객수에서 드러났듯이 많은 관객에게 영화를 적절히 소구할 수 있는 서사적 방법론으로 작용했다. 독립영화의 주제적 다양성을 개성 있게 펼치는 한편, 보편타당한 내러티브를 적용한 높은 완성도의 작품이 같은 시기에 비슷한 성과를 낸 것이다. 비교적 관객이 적게 든 <해야 할 일>도 위 세 작품의 논리를 비슷하게 적용하지만, 결말에서 다소간의 태도 차이를 보이며 또 다른 해석의 필요를 부른다. 이처럼 일련의 네 작품이 함께 보여준 여러 징후를 살피다 보면 독립영화의 영토가 지금의 관객과 마냥 멀리 있지 않다는 긍정의 가능성과 이와 함께 수반되는 주의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어떻게 저게 남의 일이야. 우리라고 저렇게 안될 줄 알아?”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 엄마(오민애)가 동료 요양보호사에게 토로한다. 엄마는 오랫동안 제희(허진)라는 치매 노인을 돌보고 있는데 제희가 요양병원에 옮겨질 상황에 처한다. 동료 요양보호사는 제희가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냐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는다. 이에 대한 답으로 엄마가 서두의 말로 반격한 것이다. 엄마의 태도는 남의 아픔과 비극이 언제든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관용의 따스함으로 여겨진다. 딸 그린(임세미)이 동성 연인 레인(하윤경)과 함께 엄마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됐을 때,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퀴어의 세계가 본인의 집에 들어서는 이 순간을 엄마는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제희의 사례로 느낀 ‘언제든 내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은 ‘언제든 내가 소수자의 가족이 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그린과 레인의 처지를 엄마가 차차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이처럼 그들의 세계가 곧 우리의 세계와 진배없다는 너른 태도의 변화가 네 작품의 드라마에 모두 담겨 있다.
<그녀에게>는 잘나가던 정치부 기자 상연(김재화)이 발달장애인 아들을 낳게 되며 겪는 인생의 굴곡을 그린다. 장애인 아들의 양육에 힘을 쏟느라 상연은 차곡차곡 쌓아오던 본인의 기자 커리어마저 포기하기에 이른다. 어디 하나 마음 기댈 곳 없던 상연은 장애인 부모로서 먼저 살아오던 한 대학 선배에게 여러 조언을 구하며 버텨낸다. 종국에 이르러 <그녀에게>는 장애인 자녀를 가지게 된 또 다른 부모에게 상연이 조언을 해주는 마무리를 택한다. 이는 ‘그녀’라는 지칭 대명사와 같이 장애인 부모라는 정체성도 언제든 누구에게나 순환적이고 보편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의미를 품는다.
<장손>은 ‘장손’이라는 한국 가족 체계의 보편적인 역할을 중점으로 내세우며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이끈다. 3대가 모인 제삿날, 장손 성진(강승호)은 조부모에게 무조건적 내리사랑을 받고 다른 가족들은 공공연하게 소외된다. 가부장제에 엮인 여성들의 불합리한 가사노동, 장손이란 미명하에 책임져야 하는 갖가지 의무와 그에 따른 부당한 이득까지 다뤄진다. 동시대를 살아온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체득했을 법한 전통적인 부조리다.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은 조선 회사 인사과로 전입한 준희(장성범)가 자신의 친밀한 동료들을 어쩔 수 없이 해고 대상으로 처리해야 하는 곤란함을 그린다. 자본주의 구조는 노동자와 인간의 삶을 사회에서 언제든 탈락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이에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탈락을 타인의 일로만 간주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언제든 해고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지금의 해고자들을 더 측은하고 진정성 있게 바라봐야 한다’라는 현실적이되 따스한 관용의 논리가 <해야 할 일>에 서려 있다.
네편의 영화는 이야기 전개의 매끄러움을 위해 시나리오 작법의 계기적 사건을 적절히 활용한다는 유사성도 있다. 계기적 사건이란 통상 2시간짜리 영화에서 10~20분 내외에 일어나는 극적 변곡점을 일컫는데, 네 영화에 모두 통용된다. 해당 시간대에 <딸에 대하여>의 엄마는 그린과 레인을 집에 들이게 되고, <그녀에게>의 상연은 아들이 장애인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해야 할 일>의 준희는 동료들을 해고해야 하는 사태에 처하고, <장손>에선 장손인 주인공 성진이 제사를 치르는 집에 오며 본격적인 가족드라마를 펼치기 시작한다. 계기적 사건을 적절히 활용한 작법은 소수자를 다루는 영화의 뾰족한 주제를 보편적인 플롯과 감정의 전달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빛은 어디에나 있기에
네 작품은 서사뿐 아니라 공통의 이미지를 통한 포용의 감각을 내뿜기도 한다. 네 작품의 마지막쯤엔 늘 의미심장한 빛이 주인공에게 찾아든다. <그녀에게> <딸에 대하여>가 세상의 빛에 조심스레 축복받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린다면 <장손> <해야 할 일>은 빛이 언제나 당신들의 어둠을 지켜보고 있다는 모종의 서늘함을 안긴다. 전자와 후자의 구체적 방식만 다를 뿐 전체적 방향성은 같다. 소수자, 주변인, 혹은 그들에게 부당한 이익을 취한 이들의 세계가 우리네 현실과 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빛의 광범위한 물리적, 관념적 보편성이 다수 관객을 포섭할 수 있는 비유적 이미지로 작용한다.
<그녀에게>의 마지막은 아들 지우(빈주원)가 상연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숏으로 끝난다. 상연네 가족은 장애인 자녀를 둔 다른 가족들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는 중이다. 박수를 치며 웃는 상연의 뒤로 노을빛의 플레어가 강하게 내리쬔다. 한편 <딸에 대하여>의 엔딩 타이틀이 올라오는 숏에서 엄마는 제희의 장례식장 한편에 있는 방에 누워 곤히 잠을 청한다. 문을 등지고 옆으로 누워 있는 그녀의 뒤엔 한창 그린과 레인의 친구들이 즐겁게 술판을 벌이고 있는 거실의 빛이 조심스레 들어온다. 이렇게 <그녀에게> <딸에 대하여>는 그 세기의 정도가 다를지라도 외부의 빛이 삶의 큰 변곡점을 겪은 소수자의 가족에게 점차 스며든다는, 그들의 일상적 태도가 이 빛을 매개로 점차 변화한다는 시각적 증상을 보여준다.
<장손>의 마지막쯤 성진이 할아버지 승필(우상전)에게 막대한 돈을 받고 택시를 탈 때, 차창 바깥에선 동틀녘의 거센 햇볕이 자꾸만 성진의 얼굴을 비춘다. 가족 몰래 조부모의 유산을 받았다는 죄책감 아래 성진은 마치 본인의 민낯을 부끄러워하듯이 손으로 세상의 빛을 가리려 한다. 그러나 관객은 모두 안다. 가부장제의 구조가 만든 이 부당 취득의 현실을 영화적 재현으로 다시금 확인했다. 이 확신의 마음을 관객이 충분히 자각하며 성진을 바라보고 있음을 외부 빛의 침입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의 마지막 숏, 결국 동료들의 해고를 목격하며 별다른 저항을 펼치지 못한 준희는 연보라색 하늘의 빛을 한껏 등지고 조선소를 거닌다. 만약 <해야 할 일>이 다른 세 작품과 조금 다르게 보여준 태도, 더 많은 관객의 직관적인 공명을 이끌기 어려웠던 작품 내부적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수도 있다. <해야 할 일>의 빛은 축복 혹은 부끄러움 그 어딘가에서 복합적인 의미로 혼재되며 관객의 윤리적 판단을 지연하기 때문이다. 준희는 완전히 냉정하게 동료들을 내버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하여 그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어 투쟁한다거나 하는 적극적 행동을 취하지 않은 채 안정적인 가정을 유지했다. 성진처럼 빛의 공격 아래 대놓고 부끄러워하지도, 엄마(<딸에 대하여>)나 상연(<그녀에게>)처럼 빛의 세례를 얌전히 받지도 못할 모호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압박이 아닌 부드러운 포용으로
이렇게 네 영화는 소수자,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관객이 속한 우리의 세계로 끌어오면서 ‘너도 언제든 이렇게 될 수 있다’라는 관객의 공감성을 한껏 높였다. 독립영화의 인물들을 대상화하며 제3자의 시점으로 가늠하기보다 최대한 주관적인 감정의 동일시를 일으키며 전략적 보편성을 확보하고 빛의 이미지로 감싸안는 것이다.
이에 한동안 일련의 독립영화에 씌워졌던 ‘불행 포르노’라는 프레임은 적용되지 않는다. 타자의 처지를 아주 극적인 설정과 장치들로 덮어씌워 압박에 가까운 공감을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영화가 지닌 포용력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양자의 세계를 겹쳐냈다. 교조적이지 않은 태도에서 보다 감성적이고 온난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하여 어떻게 보면 다소 삼삼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네 작품은 각자의 개성을 통해 적절한 간을 더한다. <딸에 대하여>처럼 스릴러에 가까운 편집의 결을 살려 영화 자체의 쫀쫀한 리듬을 만들 수도 있고, <장손>처럼 한국 시골의 사계를 영화의 핵심적인 키로 잡아낸 촬영의 묘를 펼칠 수도 있다. 일정의 개성을 확보한 영화적 틀에서 인물들은 각자 힘내어 살고 있을 뿐이고, 우리의 삶도 그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자연스레 체득된다. 이로써 생긴 감정의 끈은 우리 사회의 연대와 화합을 이끄는 좋은 토대가 된다. 동시에 한 관객이 입소문을 통해 다른 관객을 정당하게 극장에 부를 윤리적 당위성도 확보된다. 이 전략적인 선택의 적합성이 많은 관객을 이끈 원동력이 됐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즉 지금의 독립영화 관객 다수는 분명한 소재의 기획과 대중적 플롯 아래, 꽤 명백한 윤리적 답안을 내놓는 파장에 이끌리는 모양새다. <해야 할 일>과 같은 복잡다단한 현실 구조의 냉혹함과 인물 심리의 모호함보다 맑고 차분한 목소리에 끌린다. 관객의 감정을 극한으로 밀어붙이거나 가슴에 응어리를 남기는 일을 반기지 않는다. 적어도 3분기 독립영화가 보인 경향과 데이터가 말하는 의의는 그렇다.
영화적 주제와 인물 심리의 직관성이 늘 옳은 방법론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시대의 요구란 시시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웰메이드와 여러 주제를 포괄했던 저예산 상업영화 규모의 작품이 한껏 줄어든 지금, 그 시장을 일군의 독립영화가 잠시 대체한 셈인지도 모르겠다. 독립영화란 독립적 주제와 보편적 대중의 간극을 넘나드는 유동적인 몸체다. 사회적 문제의 스피커 역할을 해내며 전략적인 선택을 통해 보다 넓은 관객층을 포용할 가능성을 항시 품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