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례 감독의 여섯 번째 장편다큐멘터리영화 <열 개의 우물>(2023)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인천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던 여성 노동자와 빈민 지역에서 살며 아이들을 돌봤던 탁아운동 활동가들을 방문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빈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여러 유형의 사회운동을 초점으로 하지만 영화의 참된 주제는 일하는 여성들이 협력했던 탁아운동이라는 숨겨진 역사의 발굴에 있다. 주요 인물은 1970년대 말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투쟁에 참여한 농민 안순애와 탁아운동에 헌신한 책방 주인 김현숙·류효순, 탁아운동에 동참했다가 정치인이 된 홍미영 등이다.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진실을 믿지 않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 김미례의 면모는 이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주목에서 확인된다.
김미례는 2003년부터 대략 3년에 한편 정도 장편다큐멘터리영화를 연출했다. 주로 현장에 살며 자본의 횡포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조건, 일상에 초점을 둔 영화들이다. 그는 레미콘 운전사나 일용직 노동자, 마트 계산대와 판매대의 여성 노동자, 한국통신 노동자, 그들의 존재가 지워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혁명가와 그들의 지원자, 인천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와 공부방 교사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저들의 존재 양식은 일반적이지 않다. 법적, 제도적, 인도적 보호장치에서 배제된 비주류의 비주류, 노동운동 진영 안에서조차 소외된 사각지대, 그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입 밖으로 꺼낼 수조차 없는 완전한 추방자들이 김미례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김미례의 영화들을 잇는 것은 ‘노동자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을 부정당한 삶’이다. <열 개의 우물>은 김미례의 대다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담긴 작품으로, 삶의 환원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강조하는 감독은 특정 인물이나 그들의 특성을 도식적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기 위해 관찰 영화의 방식을 취한다. 영화는 지치지 않고, 연민이 넘치는 카메라를 통해 노동자, 빈민 운동가, 농민들의 현재와 과거를 끈기 있게 연결하면서 깊이 있는 인간 이해에 도달한다.
추방자에 관한 기록들
김미례의 두 번째 장편다큐멘터리영화 <노가다>(2005)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프레임의 왼쪽을 가득 채우는 한 남자로, 그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기나 긴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로 시작하는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을 부르고 있다. 서러운 사연을 잔뜩 품고 있을 것 같은 구성진 노랫말과 밭고랑처럼 깊게 팬 이 남자의 주름은 앞으로 다가올 이야기에 대한 실마리를 넌지시 보여준다. 일용직 건설 현장 노동에 평생을 바쳐온 늙은 노동자의 넋두리. 그는 이 장면을 촬영하는 김미례의 아버지이다. 영화 <노가다>를 여는 최초의 숏은 김미례의 초기작들은 물론이고 이후에 올 영화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시청각적 특이성이 없는 이 신(scene)이 뇌리에 남는 까닭은 그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영화 <노동자다 아니다>(2003)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으나 대법원으로부터 법적 노동자 지위를 부정당한 레미콘 운전사들의 고된 여정이 여기까지 이어져 건설 노동 현장에서 소진된 세월을 한스러워하는 늙은 노동자의 탄식으로 연결된 건 아닐까, 하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같은 문맥에서 <외박>(2009)은 김미례 영화 세계의 분수령이었다. 이랜드 홈에버 노동자들의 510일 파업 투쟁을 모티프로 한 이 영화는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동네 마트를 수시로 드나드는 ‘나’는 계산대의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그들 앞에서 잠시도 멈춰본 적이 없다. 빠른 계산과 포장을 돕기 위해 정해진 경로에 따라 손과 발을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의 기계적인 동작 뒤에 놓인 것들을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외박>은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던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우리가 바라보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마트 계산대를 점거하고 바닥에 누워 농성 중인 여성 노동자들을 촬영한 수평 트래킹숏으로 열린다. 카메라의 수평 이동 방향, 리듬을 따라 그래픽으로 재현한 하얀 나비들이 프레임을 가로지른다. 가사(家事)의 굴레에 갇힌 존재, 불편부당한 노동조건에 저항하는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은 이전의 노동 다큐멘터리영화들과 종류를 달리한다. <외박>의 주인공들은 노동자이자 여성이다. 이전까지 노동자들에 헌신했던 김미례의 카메라는 우리의 개념 속에서 생각지 못하고, 상상하지 못하는 또 다른 추방자의 삶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 영화의 장면 설계를 주재하는 원리는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차별적 지위에 있는, 여성과 남성,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변방의 대조이다.
<외박>의 여성 캐셔들처럼 사회의 가장 주변부에 서식하는 ‘배제 경험’은 김미례의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것이다. 노동은 숭고하지만 노동운동은 반드시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는 것이 김미례의 판단이다. 그들 내부에선 힘과 지위, 젠더의 위계가 잔존하며, 오염된 정치의 논리도 작동한다. <외박>은 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주류 노동운동의 목표 지향성이 초래한 부조리를 묘사한다. 투쟁 기간 민주노총의 개입과 무책임한 뒤처리, 초기에 파업을 지원하다가 돌변한 여성 노동자의 남편, 진보 정치인들의 의례적인 공수표 따위가 서사의 한축을 이룬다. 김미례가 이룬 성취는 이 체질적으로 형성된 주류와의 거리 두기에 있다. 대다수의 영화에서 제재 요소를 좇아가며 기록하는 방식을 위한 그의 카메라는 현상과 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외박>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와 남성 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경계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강조한다.
삶의 지형을 압축하는 풍경의 영화
<열 개의 우물>에는 네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지만, 실질적인 주인공은 동일방직 여공 출신의 농민 안순애이다. 1970년대 동일방직 해고자 복직 투쟁에 가담했던 기억이 현재까지 안순애의 내면을 지배한다. 모진 시간을 견뎌 이제 할 만큼 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즈음, 안순애는 도망치듯이 인천을 떠났다.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을 만큼 헌신적이었으나, 몸과 정신을 지배한 죄책은 떠나는 날 안순애가 보았을 법한 파란 하늘, 노란 은행잎에 이입된다. 안순애는 “근데, 요로케 논 안에 비친 풍경이 나는 이쁘더라고요. 각각 다 있어요. 경포대에서 하늘에 다리 하나, 바다에 다리 하나, 그대 눈빛에 다리 하나, 술잔에 다리 하나 이렇듯이 요로케 녹색일 때, 주변의 풍경이 물속에 있는 게 나는 너무 좋더라고”라고 말하는 첫 대사와 함께 소개된다. 풍경에 대한 그녀의 안목은 안순애를 구성한다. 피로하고 긴 여정의 끝으로 가기 전 하늘과 나뭇잎, 가로수를 찍은 풍경 숏은 시간을 되감는다.
나는 김미례가 언제나 경관(landscape)의 영화를 찍어왔다고 생각한다. 반복적인 경관 숏들을 요체로 한 시각화 전략은 촬영감독 박홍열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탐구적인 촬영감독이자 다큐멘터리 연출자이기도 한 박홍열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2019)에서 김미례의 자질, 그러니까 의미에 강박된 인위적인 구도나 설명적인 앵글을 회피하는 성향을 풍경을 통한 시청각 스토리텔링 전략으로 승화하는 데 일조했다. 작가 세계가 익어감을 입증하는 다수의 풍경 숏에서 우리는 무기력, 패배감, 희미한 의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다채로운 투사(透寫)를 만난다. <노동자다 아니다>에서 총파업 투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적색분자로 낙인 찍혀 해고된 유진레미콘 운전사의 부박한 처지는 길섶에 핀 보라색 들꽃과 나란히 놓인다. <산다>(2013)에서 인터넷 통신 수리기사로 복직한 전직 한국통신 노동자 이해관의 심란하게 헤쳐진 마음은 프레임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전신주와 전선의 복잡한 교차 형상으로 치환된다. 카메라가 순간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포착한 세계의 경관은 모든 장면과 함께 울려 퍼지며 영화 전반에 서정적인 운율, 복귀, 반복을 만들어낸다.
김미례의 영화는 경관을 형성하는 자연 요소들의 색과 질감, 소리, 빛, 움직임에 몰입하여 인간과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 사이의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를 기술한다. 건축과 거리, 한때 그곳에서 살았던 삶의 세부를 묘사할 때 쇠락한 바닷가의 진흙, 대문, 풀, 들꽃, 나무, 다리, 철로, 전신주는 인간의 역사, 생애, 됨됨이, 내면을 대체한다. 감각을 환기하는 풍경 묘사의 절경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다. 이 영화에서 자본과 권력에 죽임을 당한 동지들의 원통함을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는 늙은 활동가의 다짐은 안개 낀 철로 교각과 갈매기 떼가 끼룩대는 바닷가 마을의 경관 숏 위에서 서술된다. 이곳은 늑대 부대의 핵심 멤버였던 다이도지 마사시의 고향 구시로시(釧路市)이다. 수감 중인 다이도지를 지원하는 사촌 형 오타 마사쿠니가 낭독하는 다이도지의 시는 안개로 자욱해진 바닷가 마을의 풍경 위를 흐른다. 이미지의 목가적인 회화성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빌딩의 인공적 전경과 히스테리컬한 사이렌 소리에 의해 무참히 깨어진다. ‘사망 8명, 부상 300여명’을 타전하는 신문 기사에 이어 시골 마을의 시정(詩情)과 냉혹한 마천루 숲들의 기계적인 몽타주가 대비를 이룬다. 이 강렬한 병렬 배치 신에서 김미례는 도시 건축의 인공성을 자연의 진실(나무, 철로, 들꽃, 하늘)과 병치하면서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시각적, 물리적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영화의 종결부에 구시로는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다이도지가 다발성 골수암으로 사망했다는 부음이 여전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마스나가 도시아키, 1977년 석방되어 아랍으로 간 늑대 부대원의 소식으로 이어질 때, 리드미컬한 풍경 시퀀스는 온 세상을 얼려버릴 것 같은 겨울의 경관 요소들을 강조한다.
계몽의 터널을 통과한 다큐멘터리스트
<열 개의 우물>은 인물과 이슈에 초점을 둔 내러티브, 방문과 추적의 경로와 과정,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풍경 이미지, 음악이 기본 원소로 사용되는 김미례 영화의 형식적 일관성을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의 작법에서 관습적인 이런특질들의 목록을 작가의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요점은 이 모두를 아우르면서, 한국 다큐멘터리의 뿌리 깊은 경향, 특히 노동자들의 현실을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다루는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행동주의 노선과 그가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김미례는 액티비스트가 아니다. <노가다>의 일용직 노동자는 변방의 존재이고, 일본 건설 산업의 고질 관행으로부터 유래된 피라미드 시스템이 낳은 기형적 지위에 있다. <노동자다 아니다>의 레미콘 운전사들은 회사로부터 통제당하는 노동자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사업자라는 굴레에 갇힌다. 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는 <외박>의 여성 노동자들은 가정에서, 일터에서 중층적인 억압에 시달린다. <산다>의 한국통신 노동자들은 파괴당한 노조운동의 후과(後課)로 전국을 떠도는 처지에 놓인다. 일본의 제국주의 유산을 깊이 반성하고 투쟁해온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혁명가들은 수십년간 억류된 영어(囹圄)의 존재들로 유령 같은 생을 살았다. <열 개의 우물>의 인천 십정동 공동체 여성들은 한때 동고동락했던 유대가 깨어진 채 각자의 현재를 살고 있다. 김미례의 주인공들은 이처럼 계층화된 시선, 차별적인 인식에 따라 미처 보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며,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작가는 비인간화의 구조적, 역사적 근원을 조사하고 밝혀내는 한편, 이 비주류의 비주류들로부터 삶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다큐멘터리는 인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다양한 맥락과 관습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 예술이며, 다큐멘터리스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조사하고 발견하는 것임을 깨우친 영화감독은 많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경시되거나 곡해되는 문제를 발굴함으로써 다큐멘터리 감독은 주변 현실을 정의하고 익숙해지는 과정을 촉진한다. 그것은 최소한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세상에 범람하는 생각, 주장, 관점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해결책 중 하나는 수십년 동안 영화를 통해 우리를 안내하고 다른 사람의 상황에 자신을 두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들의 창의적인 작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살아남는 것이 예술이 되는 나라에서 김미례는 반복적으로 이 일을 해왔다.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없다. 때때로 영광과 용기의 순간을 찍었지만 대부분 좌절, 냉담함, 고통, 참회를 기록했다.
<열 개의 우물>의 라스트신으로 이동해보자. 목가적인 충북 음성의 안순애의 집에서 촬영한 마지막 인터뷰는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자아낸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진격의 와중에 꽹과리를 치다가 참혹한 죽음의 광경에 넋이 나간 무명의 전사를 빌려와 안순애는, “나도 비슷하지 않았나, 모르면서, 무섭고”라고 동일방직 투쟁 당시를 회고한다. 영화 내내 스토리텔링을 위한 구성적 장치로 활용되었던 벚꽃 이미지로 넘어가기 전 안순애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린다. 카메라는 그 얼굴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다. 압축적인 묘사와 숏 구성의 논리, 리듬은, 한 인간의 깊은 심부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도로를 횡단하는 일에 보낸 시간이 김미례의 미학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와 더 큰 방식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안순애에게 발견하고, 공감하는 것은 투쟁의 의지가 아니다. 승리나 패배의 결말도 아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서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일을 하는 인간의 삶이다. 농민 안순애는 충청도의 작은 촌락에서 여전히 그녀의 삶을 산다. 이것은 계몽의 터널을 통과한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정직한 결론이다. 모든 논평은 관찰에서, 정치는 태도에서 나온다. 김미례의 영화에는 노동과 지식에 대한 뚜렷한 존경심이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투명하게 비춰보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작은 결의가 있다. 이 무명의 투지에 대한 헌신이 아니었다면 한국 다큐멘터리의 지형도는 더 볼품없고, 시시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