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화라는 근육 기억, 오진우 평론가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
2024-11-14
글 : 오진우 (평론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한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 그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을 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던 도중 한곳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곳엔 용접공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도 용접을 해보겠다고 말한다. 그의 실력에 사람들은 감탄한다. 사장은 일을 하려면 통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통장을 만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2002)의 인상적인 대목이다. 노동자의 삶을 그렸던 카우리스마키답게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에게서 지울 수 없었던 단 하나는 노동의 흔적이다. 몸에 새겨진 기억들. 이른바 ‘근육 기억’(Muscle Memory)은 “반복을 통해 특정한 움직임의 수행력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의미한다.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 훌리오(호세 코로나도)도 예외는 아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기억과 존재에 관한 영화적 탐구의 여정을 그린다. 그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정이다. 이 두 영역은 ‘영화’처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데트>(1955)에서의 기적은 물질과 정신이 하나라고 분석한 카렌 O. 카스톤의 지적처럼 빅토르 에리세는 영화에서 언급되는 ‘드레이어의 기적’이 지금의 이 시대에도 가능한지를 관객에게 묻는, 그러기를 바라는 기적의 영화다. 훌리오가 눈을 감으며 디졸브되며 소멸하는 영화. 에리세가 바라는 기적은 아마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영화가 다시 점화하는 것일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포함해 빅토르 에리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시제는 ‘과거’다. 영화감독 미겔(마놀로 솔로)과 편집자인 친구 막스가 필름 보관 창고에서 나눈 대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일종의 “고고학”이다. 기억이 흩어지는 와중에 훌리오가 간직한 물건들과 그의 신체에 남겨진 기억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단서들로 영화에 제시된다. 여기서 후자의 기억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영화가 신체에 각인될 수 있는 기억으로 보는 관점은 에리세의 영화의 원체험과 관련이 깊다. 에세이영화 <라 모르테 루즈>(2006)에서 에리세는 어린 시절 처음 봤던 영화 <주홍빛 발톱>이 선사한 공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어린 시절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어린 에리세는 서슬 퍼런 프랑코 독재 시절과 영화 속 연쇄살인마이자 친절한 우체부인 ‘포츠’의 모습을 겹쳐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적인 체험은 이후 그의 첫 장편영화인 <벌집의 정령>(1973)의 아나(아나 토렌트)를 통해 재현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도 에리세의 영화적 체험의 관점은 유지된다. 훌리오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그것은 관객으로서 우리가 스크린을 바라보며 갖는 영화적 체험과는 무관하며 배우로서 갖는 육체적 활동에 가깝다. 그렇게 보는 것은 아마도 미겔의 관점이겠다. 훌리오는 감정과 몸짓을 통해 하나의 인물을 창조해온 배우다. 미겔은 영화를 통해 훌리오의 신체에 남아 있는 영화의 흔적들을 발굴하려고 한다. 먼저 훌리오가 남긴 물건들을 살펴보자. 이 물건들은 의미를 상실한 채 ‘훌리오’라는 정체성으로 접속하기 위한 기호로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미겔은 그러한 기호를 통합해 현재 ‘가르델’이라 불리는 한 남자의 영혼, 즉 훌리오를 깨우려고 한다. 미겔은 우선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인 목소리와 얼굴을 활용한다. 하지만 헛수고로 돌아간다. 미겔은 훌리오와 함께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고, 해군에서 익혔던 매듭법을 알려주었지만, 훌리오는 여전히 가르델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미겔이 택한 최종 수단은 바로 영화다. 훌리오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 중에 영화 소품이 있었다. 훌리오가 사라지는 바람에 제작이 중단됐던 <작별의 눈빛>에 쓰인 사진과 체스 말이 그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작별의 눈빛>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훌리오가 맡은 역할은 ‘프랑크’다. 그는 한 남성이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수락한다. 중간이 텅 빈 <작별의 눈빛>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 프랑크는 딸을 찾아오고 의뢰인과 대면시킨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훌리오에게 스크린은 거울일까? <작별의 눈빛>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일련의 과정 역시 육체적이다. 아버지 앞에서 딸은 부채를 꺼내 ‘상하이 제스처’를 보여주며 사진 속 모습을 재연한다. 얼굴과 몸짓과 목소리를 통해 부녀는 서로를 확인한다. 마지막엔 아버지는 딸의 눈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보려 한다.

현실에서 미겔은 훌리오와 그가 맡았던 프랑크를 대면시킨다. 정확하게는 <작별의 눈빛>에서의 프랑크와 그가 찾은 소녀의 투숏과 훌리오와 미겔을 몽타주한다. 왜 훌리오와 프랑크를 1:1로 몽타주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영화는 단순해졌을 것이다. 이 영화는 훌리오의 실존만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미겔 역시 훌리오를 찾으러 다니면서 마주한 것은 자신의 실존이다. 중단됐던 자신의 영화 <작별의 눈빛>의 미완성된 부분을 현실에서 몸소 체험하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해 스크린은 단순히 훌리오의 정체성 복원을 위한 발굴 현장이 아니라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 불가분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현장이 된다. 이 4명의 얼굴이 하나의 스크린 위에서 뒤섞이며 복잡미묘한 감정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눈물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감정적 호소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며 하나의 이미지가 다시 등장한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조각상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조각상은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며 영화 전체를 곱씹게 만든다. 에리세는 시작부터 이 영화의 전부를 보여준 셈이다. 하나의 몸을 두고 두개의 얼굴이 붙어 있는 조각상.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이 두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느꼈을 여러 감정들은 이 조각상에 들러붙어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형상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훌리오 혹은 미겔일 수도 있다. 아니면 빅토르 에리세가 찾고자 하는, 현재는 소멸되고 있는 ‘영화’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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