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죄가 없다. 삶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 때 우리는 이 묵직한 울림의 단어에 너무 많은 책임을 미루곤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놓을 때 그 무기력한 낙담조차 정해진 운명인 걸까.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1992년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연출한 뒤 네 번째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31년의 세월이 걸린 건 이미 정해진, 필요한 일이었던 걸까.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예상외로 단호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어떤 길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닦여 있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오직 눈을 떠 바라보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이 있으니, 그게 바로 영화의 운명이라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유명 배우를 추적하는 어느 영화감독의 걸음에 동행하는 영화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는 한 TV프로그램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22년 전 실종된 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미겔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배우 훌리오는 당시 미겔이 준비 중이던 두 번째 장편영화 <작별의 눈빛>을 찍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와 함께 미겔의 영화도 중단됐고 미겔에게 남은 건 변변치 않은 경력뿐이다. 본인의 아픈 상처이기도 한 영화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미겔은 내내 과거로부터 도망쳐 다녔지만 결국 훌리오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훌리오의 흔적을 찾아 미완의 영화를 다시 바라보는 길 위로 예정된 불안과 기이한 환희의 빛이 쏟아진다.
운명과 자유의지
운명이란 단어를 사용할 땐 앞뒤 행간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사 세상의 일들이 모두 결정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는 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떤 결정의 이유로 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미겔은 왜 22년이 지난 뒤에야 훌리오를 찾기로 결심한 걸까. TV프로그램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 아니면 훌리오에게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이제 와서 훌리오를 찾는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미겔이 새삼 훌리오를 찾기로 결심한 게 실패한 과거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어떤 심경으로 이미 정해진 (쇠락의) 운명과 닮은, 실패한 영화의 잿더미를 헤집는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문을 열 열쇠는 의외로 이 질문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가 제시하는 건 답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차라리 열쇠의 형태를 감상하는 시간에 가깝다. 빅토르 에리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행동의 이유는 그다지 중요치 않고 설명되지도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추적의 플롯을 취하고 있지만 훌리오의 사연은 그저 미겔을 길 위에 데려다놓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대신 영화는 미겔의 행동들, 그 궤적이 품고 있는 신비와 가능성에 집중한다. 과거의 궤적을 복기하는 미겔의 여정을 통해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결국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다. 미술관, 필름 보관소, 영사실을 경유하는 미겔의 행보가 기억 속에서 지웠던 것들 혹은 세월에 지워졌던 것들을 생생하게 우리 앞에 복원시킨다. 이미 찍혔지만 제대로 응시된 적 없는, 아직 관객을 만나지 못한 영화의 파편들은 미겔의 여정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난다. 마치 이미 결정되었지만 현실이 되기 전엔 알 수 없는 운명(이란 이름의 미래)을 상상하는 영화처럼. 과거의 잿더미는 목격자, 그러니까 미겔(과 그의 동행자인 우리)을 만날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역시나 영화처럼.
영화는 현재를 포착함으로써 존재를 기록한다. 아니 이건 지나치게 방만한 표현 같다. 범주를 좁혀보자. 필름(영화)은 빛으로 사실을 찍어내고 현재를 붙잡는다. 20세기 영화, 좁혀서 1950년 이후 거론되는 이른바 ‘모던 시네마’는 이러한 ‘사실의 포착’과 ‘해석의 가능성’에 기반한 채 진실을 탐구해왔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빛의 판화, 진실의 프리즘이라 해도 좋겠다. 진실은 하나인가. 그럴 리가. 그리하여 미겔의 미완성 영화 <작별의 눈빛> 역시 배우가 사라지는 바람에 ‘종료’당했지만 22년 만에 다른 형태로 깨어날 기회를 얻는다.<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며 새삼 영화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다. 적어도 빅토르 에리세 감독에게 운명이란 질문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정해져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길이 없고, 실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우리는, 개인은, 한 사람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이야기 혹은 사건은 사고 같은 것이다. 이유 없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과격하고 적어도 인간의 능력으론 이유를 특정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때 우리가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건 일어난 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뿐이다. 리액션의 선택만이 우리를 증명하고 자유롭게 한다. <해리 포터> 속 덤블도어 교수의 지혜를 빌리자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다. 미겔(아니 빅토르 에리세) 또한 선택했다. 필름을 소생시켜 영사기의 빛과 소음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목격자가 되어주기로.
존재를 되새기는 과정의 기적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존재를 탐문하는 자기 반영적인 결과물이다.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큰 틀에서 미겔이, 아니 빅토르 에리세가 믿는 ‘영화가 무엇인지’ 윤곽이 드러난다. 물론 이걸 빅토르 에리세=미겔, <작별의 눈빛>=<상하이의 약속>(제작이 취소된 빅토르 에리세의 미완성 영화)처럼 단순한 등치와 상징으로 읽어낸다면 그보다 더 평면적일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진정한 예술에 대한 고뇌나 불변하는 영화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강변 따윈 없다. 그저 쇠락하는 운명, 예정된 결과가 빅토르 에리세라는 한 창작자의 궤적 위에 자연스럽게 겹칠 따름이다.
미겔이 찍어놓은 필름, 미처 영화로 완성되지 못한 <작별의 눈빛>은 이미 결정된 과거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작별의 눈빛>은 정해져 있되 안개 속에 가려진 운명과도 같다. 아직 인지되지 않은 과거, 목격을 통해 확정되지 않은 정보는 닥치지 않은 미래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작별의 눈빛>을 미완의 운명이라 불러도 좋겠다. 완전히 결정되어 있어 수정이 불가능한 형태.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관객(미겔)과 동행 중인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자유롭게 읽어낼 여지를 확보한다. (결정된) 운명을 대하는 (자유)의지의 발현. 오직 상영되어 관객을 만날 때마다 거듭 새로 태어나는 의미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결정되었지만 여전히 잠재된 모든 가능성에 대한 꿈이다. 그걸 우리는 다른 말로 (20세기의) 시네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는 앞에 하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 명제의 온전한 문장은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오직 의심,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주어진 쇠락에 순응하는 대신 저항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빅토르 에리세는 여전히 의심하고 저항한다. 아마도 30년의 세월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빅토르 에리세는 지금도 영화의 존재를 의심한다. 고로 우리는 목격한다. 거기에 영화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