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도입부 20분은 올해 나온 다른 모든 영화보다 낫다”(제이콥 올러)라는 식의 평을 듣고 영화관에 들어간 이라면 누구나 다 영화를 보며 당황할 것이다. 호들갑스러운 상찬에 비해 눈앞에 펼쳐진 첫 장면이 너무나 평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칸영화제 프리미어 당시에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 도입부에 나오는 ‘영화 속 영화’인 <작별의 눈빛>이 실제 빅토르 에리세의 미완성 작품이란 얘기가 돌았다는데, 눈이 삐지 않고서야 <벌집의 정령>과 <남쪽>을 찍던 감독이 그런 장면을 진지하게 자기 장편영화의 도입부로 찍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문제의 도입부는 당연히 ‘영화 속 영화’일 수밖에 없을 수준으로 전화번호부처럼 기능적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숏이 야누스상이라는 것부터가 영화에 대한 도식화를 강요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중국에 간 딸을 찾아달라는 이야기나 수상쩍을 정도로 풍겨대는 구식 오리엔탈리즘 분위기조차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나 배경은 아니다. 즉 이 영화는 배우가 실종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 영화가 완성되었어도 ‘걸작’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특이한 영화다. 지난해 <거미집>을 보고 나서 문제의 ‘플랑 세캉스’ 장면에 정작 롱테이크의 쾌감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이것이 의도된 것일까 아니면 역량 부족일까를 한참 고민했던 것과 같이, 나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는 나머지 시간 동안 도입부 셀룰로이드 필름에 담긴 회색빛 밋밋함과 과포화된 상징들이 의도인지 실책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잔뜩 복선을 깔아둔 채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작별의 눈빛> 결말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듯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밋밋하고 상징으로 가득 찼으며 허무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이 스크린보다는 훌리오의 표정을 살피는 데 더 열심이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이런 밋밋함이 극중극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남달리 촬영된 부분은 오직 훌리오가 절벽 위에서 자발적 실종을 결심하는 장면 하나뿐인데, 이것이 늙은 감독의 상상 속 장면이라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실제 영화와 영화 속 영화 전부를 통틀어 아름답지 않다. 에리세는 마치 멋진 장면을 찍는 행위란 이제 오직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영화를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였다. 원래 빅토르 에리세가 숏 하나하나 공들여 찍는 데 골몰하는 감독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왜 이번에는 자신의 다른 영화와 배치되는 스타일을 추구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캐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이토록 밋밋한 장면으로 점철된 영화(속 영화)가 기적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기적’을 상상할 때 우리는 황홀하고 숭고한 장면을 상상하지, 그 반대를 떠올리진 않는다.
피할 수 없는 노화
하나의 가정: 마지막에 훌리오는 기억을 되찾았다. 이때 이 기적이란 정작 당사자에겐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내내 노화를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혐오하는 것처럼 묘사된 훌리오는 이제 자신의 노화를,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과거가 예전처럼 나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 세계에서 훌리오는 “아쉽게도 결국… 커버린 것이다”.(<남쪽>) 훌리오는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떠났던 촬영장에 돌아갈 수도 없고, 다 커버린 딸과 갑작스레 애틋한 부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20년간 어른의 책임을 회피한 채 살다 몸만 더 늙어버린 노인이라는 차디찬 현실만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잔혹한 각성이 <작별의 눈빛> 같은 평범한 작품을 보며 찾아오는 건 전혀 아이러니가 아니다. 실은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필름은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기적이 가능하다는 시대착오적 이야기다. 영화는 기적을 이루기 위해 걸작이 될 필요가 없다고. 단순히 필름이라는 물질적 조건만 충족해도 기적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라고. 영화에서 내내 이어진 단조로운 화면은 영화가 환상 못지않게 현실을 새기는 매체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서 당신은 즉각 필름에 대한 순진한 물신주의를 지적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항상 제작 시점보다 30여년 전을 배경 삼아 픽션을 찍던 빅토르 에리세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10여년 전인 2012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2년은 필름영화가 디지털영화보다 더 많이 만들어진 마지막 해이다. 눈을 감은 훌리오의 얼굴이 페이드아웃되며 필름 감기는 소리가 뚝 그치는 장면은 결국 죽은 필름영화의 눈을 조용히 감겨주는 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이 반대의 가정, 훌리오가 끝내 기억을 찾지 못했다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이 영화의 결말은 필름에 대한 애도이며,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애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폐허를 바라보며 미래로 떠밀려가는 역사의 천사처럼, 훌리오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예정된 미래로 떠밀려간다. 관객 또한 옛 영화를 바라보며 필름의 죽음이란 예정된 미래로 떠밀려가게 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엔딩은 영화가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죽음, 그리고 상실을 상기시키는 매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영화의 죽음’을 한탄하는 흔해 빠진 염세주의가 아니다. 에리세의 데뷔작이 칼 드레이어가 죽은 후 나왔다는 점을 기억하라. 에리세에게 영화란 필름영화 시절에도 언제나 기적을 바랄 수 없는 장소였다. 이 영화를 소박한 도피주의에 가까운 <파벨만스>나 공허한 회고담에 그치는 <바빌론> 같은 영화와 헷갈려서도 안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란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없는 매체였다는 뤼미에르의 케케묵은 말을 되새긴다. 그러나 불멸이란 본래 불가능한 꿈이 아니던가? 훌리오는 기억을 되찾은 채 눈을 뜰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 보아야만 한다. 육체는 늙고 이름은 바뀌어도 영혼은 이어질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