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예술가 미할 바신스키는 왜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걸작이 영화가 아닌 인생이 되리라 판단했을까?”
미겔(마놀로 솔로)이 집필 중인 소설의 한 문장이다. 영화가 아니라 자기 인생이 하나의 걸작이 되어버린 예술가의 삶이라. 마치 31년 만의 귀환으로 세계영화계를 들썩이게 한 빅토르 에리세 본인의 처지를 비유한 듯하다. 말 그대로 자기 반영적인 이야기.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영화에 대한 영화, 이른바 메타 영화인 이유는 영화나 극장을 소재로 사용해서만은 아닌 셈이다. 빅토르 에리세 본인이 지닌, 혹은 본인에게 주어진 영화적 인식론이 서려 있기 때문에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메타 영화의 지위를 쥐게 됐다. ‘메타’란 뜻에 담긴 대로 감독의 자기 반영적 태도가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메타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엔 하나의 수식이 더 붙어야 한다. 빅토르 에리세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로 눈을 감고 닫으려 한 것은 바로 20세기풍의 메타 영화다. 빅토르 에리세는 아직 그런 과업을 행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이중 하나다. 영화보다 감독의 이름이 큰, 20세기란 영화사의 황금시대에 발자국을 남긴 이들. 달리 말해 영화라는 상상보다 감독이라는 실재가 거대하게 작동하는 작품들이 바로 20세기식 메타 영화다. 자기 자신을 영화사의 어떤 요소 자체로 전환할 수 있는 이름들. 시간의 결빙을 끌어안고 부동의 조소가 된(될) 이들의 권리와 책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들의 20세기식 메타 영화가 이제 끝나감을 알리는 종소리다.
자신의 죄를 투영한 영화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오프닝 시퀀스가 보여주는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훌리오(호세 코로나도)가 연기한 탐정 프랑크, 프랑크에게 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집주인 레비, 그리고 레비의 하인인 린위다. 레비는 린위를 두고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듣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는 현명한 이”라고 설명한다. 눈과 귀를 열고 있으나 말은 할 수 없는 상태. 적확하게 극장 내 관객의 역할을 설명하는 문장이다. 린위를 관객이라 칭한다면 프랑크와 레비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레비는 어떠한 일을 제안하는 제작자이고, 프랑크는 그 실무를 수행하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타국에 있어 아직 찾을 수 없는 레비의 딸을 ‘영화’라고 이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작별의 눈빛> 마지막에서 결국 프랑크는 레비의 딸을 찾아다준다. 그러나 딸은 레비의 딸임을 거부하고, 그녀와 해후한 레비는 영화에서 금세 죽고 만다. 이는 하나의 영화를 찾았다면(만들었다면) 이제는 그것의 오롯한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영화 제작자의 처지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결국 프랑크(감독)는 반쪽짜리 임무를 수행한 셈이다. 미겔의 말마따나 ‘고전적인 모험 이야기’였어야 할 <작별의 눈빛>을 완성하지 못한 원죄는 미겔의 것만이 아니다. 부녀의 만남을 완전히 성사시키지 못한 프랑크의 책임으로도 볼 수 있다. 몇겹의 층위로 형성된 이 미장아빔의 형태를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모든 죄가 미겔=프랑크=영화감독으로 빗대지는 빅토르 에리세 본인의 과오로도 여겨진다는 것이다.
<작별의 눈빛>이란 미완의 영화는 김수용이 만든 메타 영화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과 흥미롭게 조응하며 20세기식 메타 영화의 속죄 의도를 다시금 뚜렷하게 만든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은 제작자의 폭압으로 인해 강제 은퇴하게 된 노년의 배우 진규(김진규)가 죽은 줄 알았던 딸 정임(남정임)을 스타 배우로 만들어 속죄하려는 이야기다. 종국에 진규는 아주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하고, 정임과 함께 부녀 사이를 연기한 뒤 촬영장에서 죽는다. 정임은 진규가 죽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작별의 눈빛>과 같은 반쪽짜리 해후. 여기서 진규와 정임이 출연한 영화의 감독은 ‘김수용’ 본인이다. 프랑크 혹은 미겔이 빅토르 에리세 본인과 다름없듯이.
<작별의 눈빛> 그리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속 부녀의 영화는 자신의 영화(사)를 제대로 종결짓지 못했다는 빅토르 에리세와 김수용의 고해와도 진배없다. 31년 만에 돌아와 20세기에서 21세기로 전환된 영화사의 격동에서 잠시 눈을 돌렸던 빅토르 에리세, 영사기사 막스(마리오 파르도)의 말처럼 ‘영화 역사의 90% 이상’을 짊어진 필름 시대의 인물로서 필름 시대의 종말을 뒤늦게나마 말하는 그의 죄를 프랑크(훌리오)와 미겔에게 대속한 것이다. 한편 온갖 검열과 강력했던 스튜디오 시스템, 제작자와 돈의 폭거로 인해 영화의 예술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느낀 김수용의 자책은 진규라는 노배우, 그리고 <어느 여배우의 고백>에서 꾸준히 영화미학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전 감독(전창근)의 역할에 전이된 것이다. 즉 20세기의 거장들은 각자가 지닌 영화적 죄를 자체적으로 구원하려는 차원에서 자신들만의 메타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들은 교도소에 산다
막스의 집엔 니컬러스 레이의 데뷔작 <그들은 밤에 산다>(1949)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들은 밤에 산다>는 은행 강도 사건에 연루된 두 남녀가 한 자동차를 타고 밤새워 도주하는 할리우드의 고전이다. 장뤼크 고다르에게 ‘자동차 한대와 남녀만 있다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을 하게 하며 <미치광이 피에로>(1965)를 만들게 한 그 작품이다. <그들은 밤에 산다>에 대한 고다르의 말을 변용하자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교도소와 두 사람만 있다면’ 만들어질 수 있던 20세기풍의 메타 영화다.
미겔의 회고에 따르면 미겔과 훌리오는 같은 교도소에 재소자로 머무른 적이 있다. 그리고 미겔이 현재 살고 있는 해안가의 시골 마을 입구엔 마치 교도소의 입구 같은 큰 철창이 있다. 훌리오가 머무르는 양로원에도 파란색의 철창이 있다. 훌리오와 미겔은 머슬 메모리에 새겨진 해군 매듭을 함께 묶으며 유대감을 쌓은 후에, 마치 아직도 그들이 군대나 감옥에 갇혀 있는 듯 철창 뒤에 함께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빅토르 에리세가 본인의 현신으로 구체화한 미겔과 훌리오의 처지는 젊을 때나 늙을 때나 언제나 재소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슨 죄를 지은 것일까.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말하는 둘의 가장 큰 공통점은 영화 속의 영화 <작별의 눈빛>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 달리 말해 자신들의 영화사에 크나큰 결락을 만들었다는 영화적 원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전술한 대로 필름의 죽음에서 도망쳤던 빅토르 에리세의 상황을 빗대고 있다. 그러므로 요약해 말할 때 20세기의 메타 영화는 죄의 표현이다. 그 죄의 무게를 진, 20세기를 통과한 거장들이 저마다의 반성적 회고를 위해 각자의 메타 영화를 만들고 있음이 다시금 말해진다.
그러니 영화나 극장을 소재로 쓰지 않았다고 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메타 영화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류일 것이다. 20세기 서부극과 형사물이 행한 폭력의 오독을 짊어진 이스트우드. 그가 자신의 영화사를 청산하며 세대의 화합을 이끈 <그랜 토리노>를 만든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자기 반영적 반성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영화를 엔터테이닝 산업의 과잉된 화수분으로 만들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트라우마를 지닌 남성들의 자아 비대증을 낭만화했던 마틴 스코세이지의 <아이리시맨> 역시 그들이 쌓아놓았던 20세기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속죄의 형태였다. 요컨대 20세기의 메타 영화란 ‘20세기의 영화를 겪은 영화감독과 그들의 지난 영화가 있어야만’ 만들어진다. 영화의 역사는 최소한 자신의 종말을 스스로 책임질 의무감에 갇혀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종결과 21세기의 도래
그리고 시대는 지나, 21세기의 메타 영화들이 도래하고 있다. 다만 분명히, 메타 영화를 표방하는 최근의 <바빌론>과 같은 작품들은 20세기의 메타 영화라 부를 수 없다. 유사한 맥락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들의 완성도와는 무관하다. 필연적으로 ‘영화 역사의 90%’ 이상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 산업 안에 포함되지 못했던 이들에게 20세기 영화사의 속죄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비디오와 노트북으로 20세기 필름의 황금시대를 추체험한 이들에게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구원론은 해당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은 이들에게 남은 일은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찬양하듯 지난 영화사의 영화와 인물들을 예찬하는 것이다. <안달루시아의 개>부터 <아바타>까지 매니의 머릿속 혹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 본인의 관념에 무수히 교차하는 고전들의 향연으로 할리우드 황금시대에 대한 상찬과 질투를 뽐낸 <바빌론>, 그리고 할리우드의 역사에서 실제 죽었던 샤론 테이트를 영화적으로 부활시키며 존중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등은 자신이 짓지 않은 죄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뒤늦은 시대에 태어났단 선천적 제약을 지니는 이들의 21세기식 메타 영화일 수밖에 없다.
물리적으로 고려했을 때, 필름 시대의 막바지에라도 젊은 날을 보냈을 최소 40년대 태생 전후의 감독들은 이제 차차 영화를 만들지 못하거나 물리적 죽음에 이르고 있다. 장뤼크 고다르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만 같던 20세기 영화의 시대가 실제로 그 거대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마지막에서 훌리오가 눈을 감을 때, 그의 눈꺼풀은 영사기의 소리에 맞춰 파르르 떨린다. 이 떨림이 멈추고 그가 눈을 뜨는 순간쯤에 <작별의 눈빛>은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질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 끝남의 순간을 최대한 지연하고 외면하려 영화를 멈췄지만, 31년 동안 도망쳐 있던 빅토르 에리세 자신의 유약함을 스스로 조소하듯 결말은 정해져 있다. 막스의 말처럼 드레이어 이후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21세기의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20세기의 영화감독들은 죽고 20세기의 메타 영화도 진정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그 종착역으로 가는 하나의 분명한 이정표이며, 우리는 그 마침표로의 이행에 서 있는 마지막 세대의 관객일지도 모른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감독(미겔 가라이) 캐릭터를 떠올렸을 때 본격적으로 구체화됐다. 영화의 기원이 어떠한 이미지나 사물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내 경험에서 비롯된 셈이다. (중략) 난 영화와 실존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영화란 내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이건 단순히 직업적인 방면에서의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실존이란 개념은 내 작가로서의, 감독으로서의, 그리고 관객으로서의 즐거움과도, 또한 영화 워크숍의 강사로서 내가 영화를 분석하는 일과도 다방면으로 연관돼 있다. 즉 전부라는 말이다.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한 가지의 문장을 빗대어 말하고 싶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언젠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듣고 ‘그것은 운명의 한 형태’라고 답한 적이 있다. 내가 그의 말을 이렇게 단순히 인용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느낌도 그렇다. 내게 영화란 운명의 한 형태다.”
-빅토르 에리세 *<Little White Lies Home> 중 ‘Cinema is a form of destiny’ (2024. 4. 8)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