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왕> 역동성과 추락이 모두 담긴 부산 앞바다
1970년대 부산에는 독특한 이름의 마약이 일본으로 수출되기 시작한다. 그 이름은 바로 “메이드 인 코리아”. 이두삼(송강호)은 기묘한 이름의 히로뽕을 들고 자칭 애국형 무역을 진행한다. 금 밀거래 조직의 세공업자에 불과했던 이두삼이 대담한 범죄를 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산의 공간적 특성 때문이다. 부산은 수많은 물자가 오가는 한국 최고의 무역도시이자, 증거를 인멸하기 쉬운 망망대해의 해안 도시다. 우민호 감독의 <마약왕>은 화려하고 분주한 동시에 짙은 그림자를 내포한 이두삼의 생애에서 부산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건져냈다.
욕망에 충실한 이두삼은 부산을 기반으로 서울과 일본을 넘나들며 세력을 확장한다. 다양한 지역을 오가지만 이두삼의 뿌리는 부산에 있었다.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이어진 촬영에서 <마약왕>의 부산 촬영 일수는 무려 49회차에 달한다. 커가는 이두삼의 야욕처럼 <마약왕>의 부산 촬영기는 바다와 내륙, 야외 로케이션과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실내 세트까지 공간을 가리지 않고 진행됐다.
<마약왕>의 제작을 맡은 김진우 프로듀서, 조화성 미술감독, 고락선 촬영감독, 당시 로케이션 지원을 담당한 부산영상위원회 경영지원팀 이승의 팀장과 나눈 인터뷰를 바탕으로 화려하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1970년대 부산의 모습을 전한다. <마약왕>의 부산 제작기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우민호 감독, 이용수 프로듀서가 과거에 남겼던 이야기들도 함께 더했다.
몰락과 파멸의 감옥, 만리동 별장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에서 촬영된 만리동 별장 내부는 김진우 프로듀서에 따르면 “프로덕션에서 가장 공들인 공간”이다. 만리동 별장은 이두삼이 부를 축적하고, 마약을 직접 제작하며, 사람을 불신한 채 몰락하는 모든 순간이 담겨 있다. 세트 디자인을 담당한 조화성 미술감독은 만리동 별장에 대해 “역동적이었던 이두삼의 단칸방 시절과 대비를 주어 쓸쓸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고 밝혔다.
우민호 감독에 따르면 <마약왕>을 연출하게 된 계기는 신문에 게재된 사진 한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마약왕을 잡는 과정이 찍힌 신문 사진을 봤다. 부산 민락동 별장에서 잡혀 나오는데 문 앞에 군인, 경찰들이 카빈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이미지에서부터 출발했다.” 산탄총을 들고 공권력에 반항하는 실존 마약왕의 이야기는 욕망에 잠식된 이두삼의 캐릭터에 이식되었다.
묵직함으로 대비되는 김인구의 수사망
호텔과 별장, 나이트클럽 등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가는 이두삼과 달리 그를 쫓는 김인구(조정석) 검사가 머무는 공간은 소박하다. 부패한 기존 수사반을 뒤로하고 미싱 공장에 새롭게 잠입 수사 캠프를 차린다. 금정구에 위치한 세영섬유에서 촬영한 해당 장면은 당시 부산의 시대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우민호 감독은 김인구라는 인물을 “‘마약왕’이라는 이 사회의 변종 괴물을 바라보는 ‘제3자의 눈’”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이두삼의 수사를 맡은 김인구의 첫 등장은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잡는 롱테이크 신이었다.
화려한 범죄 세계의 제왕으로 자리 잡은 이두삼의 대척점에서 김인구는 줄곧 옅은 색감의 공간과 함께한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김인구의 색채적 특징으로 “차분하고 묵직함”을 꼽았다. 미싱 공장, 취조실 등 어둡고 수수한 공간을 통해 “역동적인 범죄 세계의 반대편에 선 현실”(조화성 미술감독)을 드러내려 했다.
돈과 야욕이 일렁이는 부산 앞바다
<마약왕>의 선상 촬영은 부산시의 도움이 컸다. 김진우 프로듀서는 남구에 있는 요트 선착장 다이아몬드 베이에서 촬영했을 당시 “위험하고 까다로운 상황이었지만 해경과 부산영상위원회의 도움으로 먼바다까지 나가 안전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특히 직접 배에 올라타 카메라를 들어야 했던 고락선 촬영감독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육지와 달리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였다. “30분 정도 바지선을 끌고 나가서 배를 묶은 채로 돌려가면서 촬영했다. 특히 바다 위에서 맞는 밤에는 조명이나 초점 등에서 어려움이 많았다.”(고락선 촬영감독) 위험한 촬영이었지만 그럼에도 부산 앞바다는 <마약왕>이 반드시 담아야 했던 공간이었다. 실제 조사 과정에서 “마약의 원재료를 판매 및 밀수할 때, 부산 앞바다쪽에서 요트를 사용해서 했다는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마약왕>의 여성들, 김정아와 성숙경
조화성 미술감독은 1970년대의 범죄 세계를 잭슨 폴록의 추상화처럼 “무규범의 강렬함이 산발적으로 떠도는 역동성과 화려함의 시대”라고 평가했다. <마약왕>이 전반적으로 화려한 색감을 사용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소는 김정아(배두나)의 펜트하우스와 성숙경(김소진)의 음악학원이다. 당대 부의 상징인 피아노를 가르치는 이두삼의 본처 성숙경은 “범죄의 수혜를 받는 존재”다. “꿈같은 시절을 표현하기 위해 화사한 톤의 색상을 구성했다.”(조화성 미술감독)
이두삼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만나는 로비스트 김정아의 펜트하우스 역시 강렬한 색감이 도드라진다. 달맞이길에 위치한 루엘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김정아의 펜트하우스는 성숙경의 음악학원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김정아를 “남성 중심의 범죄 세계에서도 독자적인 역동성을 지닌 여성”이라고 소개한 조화성 미술감독은 “쨍할 정도로 강렬한 색”을 사용하여 펜트하우스를 꾸몄다.
부산의 열기가 가득 담긴 <마약왕>의 에너지
<마약왕>이 그려낸 야욕의 화려함은 부산 특유의 뜨거운 열기와 맞물려 흥미로운 시너지를 형성했다. <마약왕>의 제작부장을 맡은 이용수 프로듀서는 “촬영 당시 성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촬영을 길게 한 이유”로 “아직도 촬영한 적 없는 많은 장소”가 여전히 많이 남은 점을 꼽았다. 김진우 프로듀서도 “부산에서 촬영할 동안 스태프들의 만족도가 높았다”며 “호의적인 부산 시민들의 협조”와 “부산만이 지닌 휴양지의 여유”가 <마약왕>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김진우 프로듀서는 프로덕션 초창기부터 많은 도움을 준 부산영상위원회에 감사를 표했다. “영화 촬영에 있어 가장 협조적인 도시를 꼽자면 부산이다. 부산시와 부산항만공사에 긴밀한 협조를 구할 수 있었던 데에도 부산영상위원회의 애정 어린 도움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