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제 나는 안다/ 들뜬 기분으로 모든 걸 내어주는 일은 모두를 도망가게 한다는 사실을 나의 구멍을 들여다보면 너도 떠나가 버릴 걸 잘 알아.” 유선혜의 시 <그게 우리의 임무지>가 이렇게 심산한 마음을 드러내는 풍경을 응시하는 일은 무척 즐겁다. 시 속의 광경은 즐거움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아아, 독자는 그저 행복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구멍 안에 무엇이 있는지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모두 내어보여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시는 SNS에서 바이럴되었다. 다음의 대목이다. “이건 내 폐예요/ 조금 지저분하죠?/ 제가 골초라…/ 이건 제 간이에요/ 조금 딱딱하죠?/ 제가 알코올의존증이라….” 장기를 모두 밖으로 꺼내 하나하나 소개해주고 싶던 시절로부터 멀리,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이 시집의 표제작인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역시 어딘지 풋 웃음이 나오는 엉뚱함이 뜻밖의 필연처럼 보이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시다. 문자 그대로의 시다. ‘사랑’과 ‘멸종’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는 이 시를, 제목의 명령을 따라 단어바꿈해 읽어보는 것이 독법의 시작이다. 예컨대 이런 구절. “공룡들은 사랑했다 번식했다 그리하여 멸종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한 공룡들의 이름을 외우고/ 분류하고 그려내고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아이들은 멸종하고.” 사랑을 멸종으로, 멸종을 사랑으로 바꿔 읽으니 제대로인 것 같지만, 솔직히 이대로 읽어도 뜻이 닿는 느낌이지 않은가?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시의 제목은 제목일 뿐으로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직접 해설하는 가이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시에 적힌 멸종은 그저 멸종, 사랑은 그저 사랑인 것 아닐까?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한없이 즐거운 언어의 유희.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도 언급하고 싶은 시다.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골목길을 오르는 커플이 있다. 땀을 흘리며 “우리를 위한 집은 이 세상에 없나 봐”라고 속삭이는 사이로 갑작스러운 인서트. “은사님이 보내주신 밍밍한 사과즙/ 조각 얼음을 띄운 난꽃 향의 냉침 차/ 빛이 약하게 드는 테라스에서/ 너와 나눠 먹는 싱거운 미래/ 그런 건 없나 봐// 우리의 미래 따위.” 세상의 시세를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완벽한 집도 뒤에 두고 다음 집으로 향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뛰어놀 거실이 없다.” 정말로 그렇다.
그러나 나는 기어이 써버리는 사람
논리도 없이
비약만 있는 미래를 꿈꾸고
망해버린 꿈들을 죄다 옮겨 적는 사람
이걸 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 <반납 예정일>, 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