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영화를 사고 파는 플랫폼에서 드라마, 웹툰, AI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 콘텐츠에 대한 해외 투자를 끌어내겠다는 야심은 무모할 정도로 도전적이었다. 아메리칸필름마켓(AFM) 한복판에서 열린 ‘유녹(U-KNOCK) 2024 인 라스베이거스’(이하 유녹)는 이곳에 모여든 콘텐츠 제작자, 제1금융권, 창투사, 북미 투자자들의 관심으로 열기가 뜨거웠다. 유녹이 열리기 하루 전이었던 11월6일에 만난 한국콘텐츠진흥원(이하 콘진원) 유윤옥 콘텐츠기반본부 본부장은 벌써 다음 스텝을 고민하고 있었다.
- 해외투자유치 지원 프로그램을 준비한 목적이 무엇인가. 투자는 시장 질서에 맡겨야 하지 않나.
콘텐츠 산업은 민간 부문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일 때 가장 폭발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장 논리에 따르면 콘텐츠 산업에 성공 가능성이 보일 때 민간 부문에서 자금이 몰려야 한다. 하지만 민간 부문에서 콘텐츠 산업 특성을 잘 모른다면 투자할 수 있는 경로와 기회가 없거나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콘진원이 직접적인 지원이나 투자를 하는 게 아니라 민간 자본이 자연스럽게 콘텐츠 산업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제작사와 투자사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도 그래서다.
-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이후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주목받는 상황에서 해외 자본이 한국 콘텐츠에 관심이 많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지 않나.
한국 콘텐츠의 성공 가도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해외 자본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유입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OTT 시장을 베이스로 해서 오리지널리티의 대부분을 플랫폼사가 가져가는 구도로 형성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 투자 시장에서 활동하는 투자자와 해외 투자자간에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국내 콘텐츠에대한 해외 투자자의 신뢰도가 빠르게 상승할 것이다. 콘진원이 양쪽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면 당장은 낯설고 어색하겠지만 3, 4년 후에는 신뢰도가 쌓인 네트워크가 형성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국내외 투자자가 같은 라운드 안에서 움직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 창업투자회사뿐만 아니라 IBK 기업은행, 신한은행 같은 제1금융권도 라스베이거스에 공모한 것이 인상적이다. 콘텐츠 산업은 리스크가 커서 원금을 회수하는 게 그 어떤 산업보다 어렵다. IBK 기업은행 정도를 제외하면 제1금융권에서 직접 투자한 사례가 거의 없는 것도 그래서이지 않나.
제1금융권은 원금을 보장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한 곳이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투자를 하라고 하면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둔 유의미한 성과 중 하나는, 지난 4월 콘진원과 신한은행이 ‘문화콘텐츠기업 금융지원 활성화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신한은행은 신용보증기금(이하 신보), 기술보증기금(이하 기보)에 각각 5억원씩 출연해 문화콘텐츠기업들이 신보·기보 보증서 연계대출을 이용할 때 보증한도 10억원 이내에서 최대 2년간 연 0.8%의 보증료를 지원한다. 문화콘텐츠 기업들은 보증료를 지원받으며 이용할 수 있는 대출 규모는 총 625억원 수준이다. 이 자금을 통해 융자를 받아야 하는 문화콘텐츠 기업들에는 보증료가 감면된다. 그렇게 넣어 보니 자금 소진율이 매우 빠르더라고 한다. 은행은 10억원을 넣었고, 신보와 기보로부터 보증을 받아 융자를 제공해 금리에 따른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선 보증료와 이자 감면 혜택까지 받으면 저리로 융자를 받을 수 있고, 은행은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양쪽 모두에게 윈윈이다. 현재 신한은행은 추가 출연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칠 만큼 만족도와 자금 소진율이 매우 높다. 민간은행인 신한은행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보면 제1금융권의 다른 은행도 당장은 공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콘텐츠 산업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제조업, 서비스업처럼 콘텐츠 산업 또한 탄탄한 금융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으면 산업으로서 성장하기가 어렵다.
- 이번 콘퍼런스는 게임, 시리즈, 웹툰 등 영화 이외의 다양한 콘텐츠를 주제로 한 세션들이 구성됐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영화를 사고 파는 AFM임을 고려하면 꽤나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콘텐츠 산업 전 장르에 투자와 융자 파이낸싱을 공급하는 금융팀이다. 영화, 시리즈 등 매체간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기 때문에 올해 AFM이 LA 샌타모니카에서 라스베이거스로 옮기는 줄 몰랐다. 그럼에도 우리는 AFM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콘텐츠 산업 관계자나 투자자들이 많이 몰리는 마켓에 우리 부스를 설치하면 사람들을 모으기 수월하니까.
- 당장 참가자의 반응과 분위기는 좋은 것 같다.투자를 목적으로 투자 관계자를 만나는 프로그램이 이전에는 없어서 일단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한다. 벌써 내년에 새로운 금융 상품을 만들어보자는 얘기도 나온다. 금융 관계자들이 이곳에 와서 분위기를 보고, 자신과 함께 비즈니스를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본다. 지금은 미국 시장에 와 있지만 ‘코카(KOCCA, 콘진원 영문 철자의 약자) 하우스’를 어느 마켓으로 들어가는가에 따라 오일머니가 들어올 수도 있고, 동남아시아 유수의 자본들이 붙을 수 있다고 본다. 콘진원은 해외 자본을 어떻게 끌어들일지 고민하는 거지, 모든 게 다 미국 시장에만 포커싱되어 있는 건 아니다.
- 장기적으로 콘진원이 한국콘텐츠 산업을 육성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투자 유치를 끌어내기 위해 계획하고 있거나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나.
콘진원은 콘텐츠나 프로젝트에 가치 평가를 하고 있다. 투자자는 가치 평가 등급에 따라 투자에 대한 안정성, 투자 규모를 고려한다. 투자 초기 단계의 프로젝트들은 영업 비밀이라 IP나 플롯이 외부로 드러나기 불가능한데도 투자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에 대해 투자 신뢰도가 높은 기관이나 주체에는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다. 기획 단계에서 가능성이 유망한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면 멀리 미국까지 오지 않아도 우리가 발간하는 가치평가보고서를 통해 충분히 콘텐츠를 알리고, 해외 투자자와도 연결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연간 50여건이 작성돼 한국 투자자에게만 배포되고 있는데, 영문판, 중국어판, 일본어판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해 해외 각국의 투자 시장에 소개해 그들의 투자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투자라는 건 더 많은 자본을 끌어내는 행위인 동시에 리스크를 줄이는 행위이기도 하지 않나. 기획 단계에서 투자가 개입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리스크 관리가 없을 것 같다.
콘진원은 투자뿐만 아니라 융자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작사들이 IP를 확보하려면 총제작비의 상당 부분에 자기 자본을 넣어야 하는데 자기 자본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해 공개했던 쿠팡 오리지널 드라마 <소년시대>가 좋은 사례인데, 이 작품은 국고제작지원금과 완성보증을 통한 융자지원으로 총제작비의 일부를 충당하고, IP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 많은 프로젝트가 초기 기획 개발 단계에서 IP를 확보할 수 있는 초기 자금이 없어서 이 금액을 어떻게 유치할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제작 지원금과 융자를 동시에 받는 콘진원의 복합 금융 지원을 통해 제작사는 당당하게 IP를 확보할 수 있고, 수익이 나는 만큼 돈을 리턴해서 다음 작품을 또 기획 개발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이처럼 지원금과 파이낸싱이 함께 붙이는 복합 금융 지원은 초기 기획 개발 단계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라면 해외 자본을 붙여서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몸집을 불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 유녹 콘퍼런스는 좋은 출발을 한 셈이다. 올해 반응이나 평가가 괜찮다면 내년에도 AFM 기간에 볼 수 있을까.
이것은 이벤트성 프로그램이 아니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콘퍼런스도 아니다. 한국 콘텐츠 산업에 투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투자자, 투자배급사, 제작사, 금융권, 창투사 같은 사람들이 와서 보고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내년에도 AFM에서 진행할지는 이번 행사의 결과를 보고 분석해야겠지만, 이 프로그램이 산업에서 테스트 배드(Test Bed) 역할을 해야 하는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