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스에서 내려 잠시 길을 헤매던 남자가 말한다. “여기가 이렇게 연결되네요”라고. <미망>에 참 어울리는 대사다. 김태양 감독은 단편영화 <달팽이>(2000)와 <서울극장>(2002)의 중편 길이의 에피소드를 ‘여기’에 ‘이렇게 연결’하며 트릴로지 형식의 장편영화로 탄생시킨다. <달팽이>가 <미망>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린 4년여의 시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지만, 김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똬리를 틀고 머무는 것들을 바라보려 한다. 변해버린 것들을 힐난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사라진 것들을 상실과 체념으로 끌고 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각 에피소드는 이어지면서도 단절되고, 동일한 곳으로 회귀하면서도 이전보다 한뼘 더 크게 원을 그린다. <미망>은 그렇게 작품 속에 나이테를 새긴다.
감정의 잔여물, 갈피 잃은 마음참 알 수 없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 왜 변하고 왜 변하지 않는지. 그러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맬 수밖에. <미망>은 이 ‘알 수 없음’ 앞에 남자(하성국)와 여자(이명하)를 마주 세운다. 두 사람은 어긋나기 일쑤다. 여자는 좀 달라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자신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핸드폰 번호를 바꿔 관계를 정리하기도 하고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몇년이 흘러도 여전히 모더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남자는 자신이 향하는 목적지조차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사람이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며 변하는 게 뭐 있겠냐던 그는 몇년 뒤 전시회를 여는 화가가 되어 여자 앞에 나타난다. 남자는 그렇게 변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렇게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남아 있는 감정의 잔여물을 마주할 때, 남자와 여자는 당혹스러워하고, 멈칫거린다. 너무 빠른 작별 인사처럼.
<미망>은 남자와 여자가 과거에 어떠한 관계였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남자와 여자가 애써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슬쩍 드러날 때마다 <미망>은 더 애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작품이 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자신의 목적지인 서울극장에 가까워지자 횡단보도 앞에서 남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붉은색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너무 빠른 인사가 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든다.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그렇게 끝맺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마음에 비해 너무 빠르게 찾아온 결별. 이별 선언과 함께 감정도 다 말라버리는 것이라면 참 좋겠지만, 아프지 않을 만큼 잘 숨겨놓았다고 생각했던 주머니 속 바늘 하나가 내 몸을 따끔하게 찔러댄다. 남자와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와 행동으로 남아 있는 마음을 감추려 하지만, 재채기만큼이나 사랑하는 마음도 감출 수 없다고 믿는 (듯한) 김태양은 영화 곳곳에서 여전한 감정의 잔여물을 화면 위로 슬쩍 건져 올린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전화를 받는다. 통화 상대가 여자에게 저녁에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본 모양이다. 이때 여자는 머뭇거리며 남자의 반응을 짧게 살핀다. 김태양은, 그리고 이명하는 이 짧은 리액션에 여자의 마음을 담아낸다. 이 장면은 세 번째 에피소드의 한 장면과 공명한다. 카페 소우에서 남자가 기타 연주를 곁들여 장기하의 <별거 아니라고>를 부르는 장면에서, 여자는 다시 한번 전화를 받기 위해 카페 바깥으로 향한다. 열린 문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리고, 전화를 끊은 여자는 그 노랫소리에 귀 기울인다. 카메라는 여자의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본다. 그 순간, 여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여자는 몇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를 만나 흔들리는 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자와 헤어진 남자는 끊었다던 담배를 꺼내 문다. 이제는 희미해진 줄 알았던 감정이 선명하게 번져오는 순간의 담배 한 모금. 그렇게 남아 있는 마음은 남자와 여자를 흔든다. 김태양은 ‘이제 아는 길이라고, 맨날 다니는 길’이라고 자신하던 남자가 잠시 갈피를 잃고 담배 한 모금을 찾게 되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소제목을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라는 의미의 ‘미망’(迷妄)이라 부른다.
‘덕분에’, 사라진(질) 자리를 채우는 이야기들

카페 소우에서 남자가 앉던 자리에 여자가 잠시 머물고, 여자가 바깥으로 나간 후에는 뒤늦게 도착한 후배가 그 자리를 채운다. 비워진 자리는 그렇게 계속 채워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좀더 흥미롭다. 남자가 버스에서 내린다. 하지만 (남자와 함께 버스 바깥으로 이동할 것이라 생각했던) 카메라는 남자를 따라가지 않고 텅 빈 버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영화를 끝맺는다. 한때는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비워진 자리들, 내일이면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를 태우고 같은 곳을 맴돌 버스. <미망>은 이 비워진 버스가 우리의 삶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여러분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가길 바라겠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곧 사라질 서울극장에서 <미망인>에 대한 해설을 마무리 짓던 여자의 말이다. 김태양은 여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전한다. 실제로 <미망>은 을지로, 종로, 광화문 일대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사라진(질) 것은 서울극장만이 아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남자와 여자가 걷는 곳곳에는 새로운 빌딩을 짓는 공사 현장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두 차례 등장하는 누군가의 죽음 역시 사라지는 이미지와 연결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여자 엄마의 죽음이 간단히 언급되고,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친구의 죽음이 남자와 여자를 재회하도록 한다. 여자는 죽은 친구의 자리를 그에 대한 기억으로 대신하자고 한다. 사라진 것들을 당신이 기억하는 한, 그것은 당신의 기억으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김태양 감독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들을 ‘멀리서, 그리고 넓게’ 바라보려 한다. 지리학자 이푸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이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모두가 유사하게 공유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 공간이라면, 나만의 경험과 사연이 스며들 때 공간은 장소가 된다. 그렇기에 추억의 대상은 장소이지 공간이 아니다. 결국 자신에게 장소가 많다는 것은 내면에 사유재산이 가득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망>은 을지로, 청계천, 종로, 광화문 일대를 공간이 아닌 장소로서 바라보려 한다. 그곳에서 인물들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공간을 장소화한다. 이순신 동상의 칼자루가 그렇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지체 높은 양반과 마주치는 것을 피해 걸으며 형성된 ‘피맛골’이 그렇다. 그들은 그곳이 어떤 사연이 새겨진 장소로 자신에게 기억될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곳은 사랑이 시작된 장소이자, 애잔하면서도 미련스러운 미련이 묻은 장소이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고백이 묻힌 장소이며, 남아 있는 마음을 외면한 뒤 뒤돌아 걷던 장소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곳을 다시 지날 때 그 기억이 마음에서 불현듯 솟아오른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된다면(이푸투안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동 중 정지”의 순간), 그때 그곳은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가 된다.
짧은 한숨과 함께 남자의 노래를 듣던 여자에게, 그리고 입구를 서성이던 여자를 슬쩍 살피던 남자에게 소우가 어떤 의미의 장소로 기억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짧은 시간 덕분에 소우는 영원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설령 언젠가 그곳이 사라지더라도, 그들에게 그날의 소우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의 소우는 불멸의 장소다. 김태양은 현재를 기록하지만, 아주 먼 언젠가의 그곳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그날의 그곳을 바라보려 한다. 애잔함도 추억으로 남았을 그 언젠가의 그곳에서 말이다. <미망>이 사라지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긍정의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3막의 소제목이 ‘멀리 넓게 바라보다’라는 의미의 ‘미망’(彌望)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