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고 싶은 의지가 큰 것은 희망일까 불행일까. <플로우>는 절멸의 시대로 시작된다. 계단, 원형무대, 거울, 집 등 인류 문명의 흔적으로 가득하지만 어디에서도 인간을 찾아볼 수 없는 지구. 갑작스러운 대홍수와 함께 검은 고양이는 하릴없이 물살에 휩쓸리고 만다. 몸을 숨길 곳을 급히 찾았을 때에는 느긋한 돛단배 한척만이 그를 받아줄 뿐이다. 그곳에서 고양이는 골든 리트리버, 카피바라,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를 만난다. <플로우>는 귀여운 옷을 입고 두발로 서서 인간의 언어를 내뱉는 여느 애니메이션과 포맷이 사뭇 다르다. 현실 속 동물들 모습 그대로, 인간의 시선과 간섭을 최소화하여 이름도 대사도 없이 영화 속 상황에 존재하고 흘러간다. 그렇게 습성도 성향도 제각기 다른 이들은 생존욕구라는 본능에 기대어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사실 대홍수가 아니더라도 예상치 못한 집단생활은 고양이에게 다소 난처한 재난이나 다름없다. 경계선이라곤 모르는 골든 리트리버는 부담스럽기만 하고, 모든 물건에 집착하는 여우원숭이나 이곳저곳을 무심하게 활보하는 카피바라는 통제 불능의 대상이다. 설상가상 몸집이 배로 큰 뱀잡이수리의 등장. 어쩐지 자신을 응시하는 것만으로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뱀잡이수리는 예상과 다르게 온기를 전한다. 동족만 챙기던 다른 이들과 달리 유일하게 고양이의 사정을 가엽게 여기고 생선 한 마리를 나눠준 것이다. 안이 아닌 밖을 본 것, 내집단이 아닌 외집단을 챙긴 것. 무리의 질서를 무너뜨린 죄로 뱀잡이수리는 다른 새들로부터 버림받는다. 이것이 그가 보트에 함께하게 된 이유다. 재난을 다루는 실사영화가 으레 집단 속 개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고백하듯, <플로우> 또한 무리 생활을 통해 동물들의 감정을 극대화한다. 뒤돌아 날아가버리는 야멸찬 새들을 어떻게든 쫓아가던 뱀잡이수리가 결국 멈춰섰을 때, 그의 뒷모습은 어떠한 표정도 보여주지 않지만 소속감을 박탈당한 자의 허망함과 외로움, 공포심이 그대로 새어나온다. 여우원숭이의 사연도 다르지 않다. 인간이 남긴 잔재를 모아온 그는 다른 여우원숭이 무리에 끼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며 환심을 사려 하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 역시나 여우원숭이에게 남은 것은 돛단배로 맺어진 집단뿐이다. 이들은 수재(水災) 속에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자신과 같은 동족에게 소속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익숙한 무리가 제공하는 안전망을 갈망한다. 생존을 위해 ‘함께 살아간다’는 명제는 실내 환경에 익숙한 고양이(그리고 인간)나 야생 환경에서 자라온 동물 모두에 공평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땅이든 물 위든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돛단배는 선택받은 자의 생명을 위임하는 노아의 방주가 아닌, 더이상 어디도 갈 수 없는 낙오자를 위한 최소한의 피난처이자 디스토피아적 세상에 남은 마지막 구원이다.

튼튼한 요새 덕일까. 동물들은 조금씩 각자의 자리를 찾아나간다. 넓은 하늘을 전방위로 활보해온 뱀잡이수리는 익숙하게 노를 저으며 뱃사공의 노역을 대신하고, 잠재된 사냥 능력을 일깨운 고양이는 물고기를 잡아와 함께 나눠먹는다. 다른 이와 함께 사는 삶의 가치를 아는 골든 리트리버는 작은 종탑에 갇힌 다른 개들을 찾아 구해준다. 물론 머릿수가 늘어나면서 배 안 면적이 줄어들고 식량 보급 문제가 염려되지만 동물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히 찾아나간다. 온통 물바다가 된 세상은 사실 <플로우>의 스토리라인이나 장면을 자칫 단조롭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애 의지가 높은 이들이 슬픔과 절망에 머물지 않고 변화를 기꺼이 통과해가면서 영화는 변곡점을 유려하게 완성한다. 보트 한척에 기대 유유히 물 위를 흘러가는 심플한 이야기가 당장의 인간 사회를 연상시키며 다층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도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생명의 본질을 은유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자락에 다다를 즈음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작디작은 고양이. 고양이의 크기가 너무 작다. 모진 대홍수 앞에서, 돛단배의 돛 위에서, 섬에 남은 문명의 폐허 앞에서. 재난이 벌어졌을 때 도망치는 것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가여운 모습은 자연 앞에서 무력한 인간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고양이.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유기체. <플로우>의 방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플로우>가 고양이의 현실적인 몸동작, 반응, 얼굴 표정, 목소리 등을 구현하는 게 중요한 미션이었던 이유는 애니메이션으로서 역동성을 중시하는 미덕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생존을 갈망하는 작은 생명체의 몸부림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마치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작은 규모의 예산으로, 더구나 오랫동안 인간이 귀엽다고 여겨온 애니메이션 장치들을 과감히 버리고서 무성영화를 택한 용기는 오직 생동하는 신체만이 삶을 목말라 하는 순수한 본질을 적확하게 전달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춥고 축축하고 습하다. 시간이 흘러 돛단배에서 내린 동물들은 새로운 섬을 찾지만 상황이 다르진 않다. 이 섬에 새롭게 정착할까, 다시 떠날까. 그저 결정의 몫만이 남을 뿐이다. 낯선 땅을 밟은 동물들에겐 이제 오직 두 가지 희망이 남는다. 살고 싶다는 것. 그리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것. <플로우>의 간결하고 단순한 조건은 생각보다 강력한 생에 의지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