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고양이의 작은 움직임마저 자연스럽게
2025-03-11
글 : 이자연
<플로우> 초기 아트워크 공개…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코멘터리와 함께
대홍수 이후의 초기 아트워크와 스틸컷(위부터).

왜 하필 고양이였을까. “내가 어릴 적에 짙은 회색 고양이를 키운 적 있다. 주변으로부터 고양이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많이 듣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강아지파에 가깝다. (웃음) 고양이들은 낯선 것을 경계하는 타고난 불안이 눈에 띈다. 그래서 표정과 몸동작이 두드러지는데 고양이의 그런 보디랭귀지를 영화적 언어로 활용해보고 싶었다. 애니메이터로서는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다. 고양이들이 특정 규칙이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무엇보다 현실적인 몸동작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면 고양이 집사님들한테 바로 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다만 이들의 모습을 굳이 과장하고 싶지 않았다. 동물들의 현실적인 동작에도 농담, 슬픔, 분노가 있다.”

물고기 초기 아트워크와 스틸컷(위부터).

대홍수와 동물들.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두 키워드가 만날 때 보통은 협심해가는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플로우>에는 인간처럼 두발로 걷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는 동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지켜본 모습 그대로 재난에 휩쓸릴 뿐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씨네21>을 만난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인간의 관점이 아닌, 동물의 관점으로 재난을 풀어내고 싶다고 설명했다. “같은 주제의 인간 이야기는 많지만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거의 없다. 또 동물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때 감정적 파급력이 더 커진다고 믿는다. 다만 인간의 언어 없이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포인트가 필요했다. 그게 홍수다. <플로우>에서 물은 두 가지 은유를 띤다. 고양이의 두려움 그리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 극적인 악당이 없는 대신 대자연이 모두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고양이 초기 아트워크

여우원숭이, 뱀잡이수리, 카피바라 등 독특한 종류의 동물들은 이들의 성향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비교적 쉽게 몸동작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농담 섞인 후문도. “접할 기회가 적은 동물들은 동작 구현에 오류가 있어도 상대적으로 더 너그럽게 받아들여줄 거라 믿었다. (웃음) 그럼에도 최대한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넣었다. 우리가 이룬 것은 리얼리즘보다는 내추럴리즘에 가까울 것이다. 무엇보다 이 역동성은 온전히 우리 애니메이터들과 피에르 모스케 슈퍼바이저의 덕이다. 고양이가 고개를 돌리는 짧은 장면조차도 모두 레퍼런스가 있었다. 영상 자료를 찾고, 관찰하고, 참고하며 모든 현실성을 불어넣었다.”

여우원숭이와 뱀잡이수리의 초기 아트워크(위부터).

<플로우>가 대중적 관심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프리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블렌더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실시간 렌더링 소프트웨어 이브이가 제공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버전의 시각적 실험을 좋아하는 감독으로서 소프트웨어의 간편성은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동물들의 다양한 형태 변화를 시도하거나 다각도로 카메라앵글을 바꿔본 것도 모두 이 덕분이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끊임없이 시도해볼 수 있었다. 소프트웨어가 무료인 점도 엄청난 장점이다. <플로우>는 프랑스 영화산업 기준으로 중간 규모의 예산으로 제작됐기 때문에 소프트웨어를 구입할 필요가 없다는 게 엄청난 혜택이 됐다. 특히 라트비아는 영화산업 규모가 훨씬 작아서 이러한 점이 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같다.”

물에 잠긴 도시의 초기 아트워크.

여우원숭이는 일면 소비주의적인 인간의 행동과 가까워 보인다. “인간의 물건을 모으는 여우원숭이는 물질적 가치가 있어야 다른 이들이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 믿는다. 하지만 그 역시 소속감과 연결된다. 많은 관객들이 여우원숭이를 이해해주면 좋겠다. 평범하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로우>에서 여우원숭이 사회가 모두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개인도 행동을 끊기 어렵다.”

여우원숭이 집 초기 아트워크와 여우원숭이 스틸컷(위부터).

영화에서 가장 극단에 서 있다가 가장 가까워진 관계는 아마도 뱀잡이수리와 고양이일 것이다. “대부분의 새는 같은 종의 어린 새만 신경 쓴다. 그런데 딱 한 마리만이 다른 종의 동물, 고양이를 바라본다. 이종(異種)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연대하고 지지하는 마음까지 함께 담고 싶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전이되는 무언가가 인간의 것만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이들이 상대의 마음을 느낀다.”

텅 빈 원형극장의 초기 아트워크.

대사가 나오지 않는 <플로우>에서 눈여겨보면 좋은 포인트를 짚는다면 조명과 음악이다. “라디오나 연극에선 대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라면 어떨까. 언어를 대체할 영화적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작품에서 조명과 음악을 이전보다 더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썼다. <플로우>의 음악도 내가 직접 만들었다. 이후 전문 작곡가 리하르트 잘루페에게 내가 스케치한 악보를 전해주었더니 내가 묘사하기 어려웠던 음악적 아이디어를 쉽게 설명해줬다. 이런 지점을 관객들이 함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플로우> 뱀잡이수리와 고양이 스틸컷(위부터).

“고양이는 강아지와 반대되는 입장이다. 홀로 지내던 과거와 달리 다른 이들과 함께하게 되는 게 고양이의 입장이라면 강아지는 반대로 무리에서 나와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숭이와 새 모두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게 카피바라다. 아무것도 찾지 않고, 어떤 변화도 원치 않는다. 다른 이들이 논쟁할 때 카피바라만이 혼자 평온하다. 멘토나 선생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