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연의 이과감성]
[임수연의 이과 감성] 무엇까지,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2025-02-13
글 : 임수연
<블레이드 러너 2049>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개봉 당시 관객과 평단 모두에 외면받았다가 비디오 출시 후 영화의 진가를 발견한 컬트 팬들에 의해 재평가되면서 SF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한때 서사가 난해하다는 혹평에 시달렸던 작품이지만 막상 보면 중심 갈등은 단순한 편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2019년의 LA는 암흑에 잠겨 있다. 산성비가 내리는 도시 곳곳에서 불기둥이 올라오고 혼종된 문화가 내뿜는 네온 조명이 북적이는 거리를 어지럽힌다. 희망 없는 도시를 떠나 우주 정복지(영화에서는 ‘오프 월드’라 불림)에서의 새로운 삶을 광고하는 시대, 인간들의 고민거리는 로봇 넥서스 6들이 우주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21세기 초 타이렐사에서 출시한 넥서스 6는 인간과 흡사한 복제인간으로 우수한 체력과 민첩성에 지능을 갖추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수명이 4년으로 설정된 복제인간들은 인간의 우주 개척지 탐사나 식민지 개척을 위해 착취당해야 했고 이에 반기를 든 것이다. 오프 월드를 탈출한 넥서스 6에겐 발견 즉시 제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복제인간, 즉 리플리컨트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은 경찰들이었다.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지구에 잠입한 넥서스 6를 잡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복직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리플리컨트를 더욱 잘 다루기 위해 기억을 주입하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끔 한다는 설정이 나온다. 복제인간이 기억을 갖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스스로가 복제인간이라는 자각이 없을 정도라면(영화에서는 타이렐사의 회장 엘든 타이렐의 비서이자 복제인간 레이첼(숀 영)이 그렇다) 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복제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철학적 질문을 독창적인 세계관과 감각적인 이미지로 구현한다.

1990년대부터 속편 제작이 논의됐지만 번번이 무산되다 무려 35년 만에 후속작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관객을 만났다. <블레이드 러너> 이후 30년 뒤를 배경으로 한다. 파산한 타이렐사의 유산을 물려받은 천재 과학자 니앤더 웰레스(재러드 레토)는 인간에게 오로지 복종만 하는 리플리컨트 넥서스 9을 생산한다. 블레이드 러너들은 이전 세대의 리플리컨트들을 찾아 폐기시키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그 역시 복제인간(넥서스 9)이지만 자신보다 이전 모델의 리플리컨트를 찾아 죽여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전편의 질문에 더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리플리컨트의 재생산, 즉 임신을 화두로 가져온다. 30년 전 릭 데커드와 사랑에 빠졌던 레이첼이 제왕절개로 아기를 출산한 흔적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는 인간인가 복제인간인가? 임신 여부는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였는데 그 선이 무너졌다면 인간다움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더불어 진짜 기억과 주입된 기억 사이의 대비를 통해 전편의 기억과 감정, 정체성의 테마를 흥미롭게 계승하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

영화에서와 같은 리플리컨트의 생산이 실제로 가능하느냐는 고리타분한 질문은 넣어두기로 하자. 인간 복제는 복제 양 돌리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이며 SF물에 나오는 복제인간은 윤리적 문제에 봉착해 실제 구현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SF 장르가 복제인간 소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이유는 인간성의 조건, 인간과 기계의 융합, 포스트휴먼의 문제를 고찰하기에 가장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문제와 결부해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에서 생물학적으로 주목할 설정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영화에서는 리플리컨트 여부를 식별하기 위해 DNA와 같은 생체 데이터 기록을 수집하는데, 이는 생체인식 기술을 떠올리게 한다. 지문, 홍채, 얼굴 등 개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을 수집해서 일종의 신분증처럼 활용하는 추세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리플리컨트의 DNA를 수집함으로써 이들을 관리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점을 떠올리면, 생체 정보 수집 역시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유럽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공격적인 AI 기술 투자를 경계하며 생체인식 정보 수집의 위험성을 강조해왔다. 지난해 유럽연합 의회는 AI 기술을 이용한 생체인식 정보 처리를 강하게 규제하는 내용을 담은 인공지능법안이 통과됐다. 강간·테러 등 중대 범죄 용의자 수색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법원의 사전 허가를 전제로 허용된다. 한편 영화에서 K의 생리적, 정신적 상태를 점검하는 테스트는 특정 생체 기준에 미달하는 리플리컨트를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난해 유럽연합에서 논의된 인공지능법안에는 개인의 특성·행동 데이터로 점수를 매기는 소셜 스코어링 금지 역시 포함되어 있다.

니앤더 웰레스는 인간의 로봇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리플리컨트의 생물학적 번식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제인간의 출산이 가능하다면 자본의 추가 투입 없이 노동력을 계속 창출해낼 수 있다. 합성생물학은 기존의 생물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탐구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요소를 변형시키거나 새롭게 추가하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즉 인류에 필요한 물질을 일일이 만들어내는 것보다 이를 합성할 수 있는 세포를 설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니앤더가 갈망한 대로 상품화된 리플리컨트의 DNA를 무한 복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엄청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셰릴 빈트 UC 리버사이드 영문학·미디어문화학과 교수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자본주의 생산으로 완전히 엮인 생물학의 현대 사회적 판타지를 가시화한다”고 평가한다.

영화에서는 인공장기를 만드는 기술 역시 묘사된다. 현실에서도 인공장기의 인체 이식은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혹은 동물의 배아를 이용해 인간의 장기를 만드는 기술은 이미 가시화됐다. 지지난해 왕중쿤 중국 광저우 생물의학 및 건강연구소 연구원 연구팀은 인간과 돼지의 세포를 모두 가진 ‘키메라 돼지 배아’를 만들어 인간의 장기를 갖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키메라 배아 연구는 생명윤리와 충돌하지 않는 한에서 연구의 범위가 제한되고 있지만 언젠가 인체 이식 상용화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에 계급 인식이 작동하는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세계관처럼, 현실에서는 인간과 인공장기를 이식받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공장기를 이식받아도 인간이라면 그 장기를 제공한 동물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인간과 기계의 융합으로 현 인류를 월등히 뛰어넘으리라 상상되는 포스트 휴먼의 실체는 어디까지 왔는가.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 속 과학자들은 과학이 소비자 문화와 어떻게 통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리플리컨트의 생체 데이터와 생물학적 가치가 그랬던 것처럼, 소비주의와 자본주의의 욕망은 인간의 몸에 각인된 생체 데이터와 가치도 물질화하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가 묘사한 2019년과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묘사한 2049년은 IT와 생명공학의 무분별한 발전이 인간/비인간의 정체성에 초래할 미래가 서려 있기에 더욱 음습하고 황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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