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터뷰] 사랑엔 위기가 필요하니까, <말할 수 없는 비밀> 서유민 감독
2025-02-06
글 : 정재현
사진 : 백종헌

서유민 감독의 세계를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단연 사랑영화일 것이다. 각자의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후 그들과 마찬가지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똑같이 휘말리는 <외출>(2005)과 신체의 시한부와 사랑의 시한부가 얼마나 동일한지 정공법으로 묻던 <사랑>(2007)은 서유민 ‘작가’가 허진호 감독과 함께 고민해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였다. 서유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내일의 기억>(2021) 또한 스릴러의 외피를 둘렀지만 그 내막은 어느 부부의 슬픈 사랑 이야기였다. 그리고 2025년 1월. 서유민 감독의 사랑은 피아노와 초자연현상을 타고 <말할 수 없는 비밀>에 가닿았다.

- 원작 영화의 팬이었다고 들었다. 좋아하는 영화인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대만영화 중 한편을 리메이크하는 일에 부담은 없었나.

원작을 정말 좋아했다. 요즘처럼 관광객들이 몰리기 전 원작의 촬영지인 타이베이의 단수이구를 찾아 여행했을 정도니까. 제작사인 하이브미디어코프로부터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 부담이 컸지만 기분이 좋았다. 멜로 작품 제작이 귀해지는 시대 아닌가. 작가일 적부터 멜로영화를 주로 썼던 만큼 이 기회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스릴러로 입봉했지만 내심 데뷔도 멜로로 할 줄 알았다. (웃음)

- 작가 시절 썼던 이야기에 비해 주인공들이 젊고 어려졌다.

내 손으로 어리고 순수한 사랑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어찌나 행복하던지. 누구에게나 각별한 첫사랑의 한때를 프레임으로 담을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설레게 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청춘의 순수한 열정을 가득 느낀 현장이었다. 그 기운이 후반작업까지 이어졌다. 이야기 덕에 덩달아 젊어지는 듯했다.

- 원작과 이번 작품 사이엔 20년에 가까운 시차가 있다. 국가가 달라진 것 못지않게 시대가 달라지며 변했을 수밖에 없는 연애 풍속을 어떻게 반영했나.

유준(도경수)과 정아(원진아)가 보이는 사랑이 동시대적인 멜로로 보여야 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유준과 정아의 또래들에게 피드백을 받았다. 각색의 가장 큰 숙제는 ‘스마트폰을 어떻게 처리할까’였다. 지금 청춘들의 연애와 사랑을 그리는 데 스마트폰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서 “나는 휴대폰이 필요 없어”라고 짚는 정아의 대사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굴곡을 만드는 데에도 집중했다. 하염없이 연인을 기다리는 주인공은 더이상 소구되지 않는다. 자꾸만 사라지는 상대를 의심도 하고 직접 찾아 나서기도 하는 능동성이 필요하다. 사랑도 후회도 이별 통보도 직접 하는 주인공이 관객들과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겠더라.

- 원작의 주요 사운드트랙인 <Secret>을 동일하게 사용했다. 리메이크만의 고유성을 살리는 새로운 선곡은 고려 대상에 없었나.

회의 중 우리만의 <Secret>을 새로 작곡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런데 음악 자체가 좋고 이만큼 서사에 안성맞춤인 곡이 없었다. 원작 고유의 무드를 살리되 원작의 팬들이 만족할 만한 곡으로도 <Secret>이 제격이었다. 고수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원작에서도 자전거가 무척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한국의 대학교가 웬만하면 평지에 지어지지 않는데도 (웃음) 유준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와 집을 오간다.

자칫 진부한 선택으로 비칠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만이 선사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대체할 오브제가 마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감성이 우리 작품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실 내가 자전거를 좋아한다. (웃음) 오래전 시간강사로 일하던 대학교가 언덕에 있었는데도 매번 강의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 음악적 재능이 출중한 세 배우가 음대생으로 출연한다. 아이돌 출신인 도경수 배우야 말할 것도 없고 원진아 배우는 <해피 뉴 이어>의 삽입곡을 가창한 적 있다. 신예은 배우는 근래 드라마 <정년이>에서 음악적 재능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도경수 배우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빠른 속도로 극 중 필요한 피아노 연주를 습득했고, 곡에 리듬을 부여할 수 있는 운지법까지 익혀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원진아 배우는 연습벌레다. 촬영 당시 원진아 배우와 같은 층의 숙소를 썼는데 휴차 때면 어김없이 <Secret>을 연습하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신예은 배우는 어린 시절 음악 전공과 연기 전공을 놓고 고민했을 정도로 이미 완성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바이올린도 연주할 줄 알아 쉽게 배역에 적응했다.

-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면 떠오르는 피아노 배틀 장면이 새로운 앵글과 분위기로 재탄생했다. 음악이 지닌 힘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피아노 2대가 등장하는 장면을 ‘영화적’으로 촬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배틀을 관전하는 학생이 마치 원작 속 아이스크림 선배처럼 곡의 해설과 중계를 곁들이는 장면을 찍기도 했다. 그런데 배경이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미 청중들은 각 음악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 같았고, 동된 음악이 텍스트 이상의 설명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철저히 음악에만 집중해 장면을 구상했다. 태혁이 곡을 모차르트풍으로 연주하면 유준이 이를 한껏 변주해내고, 이어 쇼팽풍으로 연주하면 유준이 이를 더 업그레이드하는 식이다. 피아노 배틀의 감성은 전적으로 도경수 배우의 클로즈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초조함을 비치다 연주가 지속되니 ‘해볼 만한데?’ 싶은 만족감, 그리고 후반의 신명까지. 도경수 배우가 미묘한 표정 변화만으로 장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냈다.

- 수많은 멜로영화를 써왔다. 사랑 이야기를 쓸 때의 대원칙이 있다면.

언제나 큰 이별의 순간이 한번은 있어야 한다. 엔딩과 무관하게 사랑의 큰 위기가 있어야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공고해지고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질주도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이번 작품에서 유준이 슬픔을 머금고 이별을 먼저 선언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후회가 남아야 다시 사랑을 좇을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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