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중반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햇살 아래 해사하게 웃는 스크린 속 원진아가 낯설다. 지금껏 배우 원진아가 그린 여성들은 자연광 아래에서 산책하기보다는 백열등 아래에서 과로하길 택했고, 미소 짓는 날보다 한숨 쉬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정아(원진아)는 운명의 장난처럼 만난 유준(도경수)과 자주 걷고 많이 웃으며 상대와 관객의 마음을 간질인다. 원진아 역시 정아가 낯설었다. 첫사랑, 피아노, 대학생…. 배우 생활 10년 동안 경험해본 적 없는 요소들의 집합체인 정아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원진아는 수없는 분석과 연습의 날들을 보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을 마친 이후 원진아는 낯섦에 중독된 듯 시트콤과 정통 연극, 웹 예능프로그램에 도전했다. 자신을 실험하길 주저하지 않는 배우 원진아가 7년 만에 <씨네21>을 찾아 지금껏 선보인 수많은 타인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호명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은 항상 출연 전 걱정이 앞선다. 원작에 폐를 끼치지 않되 관객들에게 기시감을 주어서도 안된다. 그래도 배우가 달라진다면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컸다.
- 처음 연출진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어떤 배역을 맡든 감독님을 만난 첫날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전한다. 아무래도 배역 제안을 건네는 분들은 작품 속 나만 보지 않았겠나. 캐릭터와 연관된 인간 원진아의 삶을 창작자들에게 전했을 때 배역이 풍부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서유민 감독님을 만난 첫날에도 정아와 나 사이의 닮은 지점이나 나와 엄마와의 관계 등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았다. 나와 다른 성향을 보이는 캐릭터를 만날 때도 “나라면 다른 삶의 방향을 선택할 것 같다”고 말하는 편이다.
- <날 녹여주오>의 초반부를 제외하면 배우 데뷔 이래 대학생을 연기한 적이 없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 <라이프>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 등 줄곧 사회에 진출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여성을 연기했으니까.
데뷔 초 몇 독립영화에서 고등학생을 연기한 이후로는 주로 전문직 여성을 연기했다. 걱정이 앞섰다. 스무살 언저리에만 느낄 수 있는 풋풋한 감정을 내가 되살릴 수 있을까. 첫 연애 당시의 감성을 기억한다고 해도 이걸 어색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 등등. 그런데 배우로서 싱그러운 사랑에 한껏 빠진 얼굴을 남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작품에서 직업, 생계 등 내가 처한 여러 현실을 고려한 연애만 했다. (웃음)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아무 고민 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 시기상 <지옥>의 아기 엄마 소현,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의 3년차 마케터 송아를 연기한 후 바로 <말할 수 없는 비밀>에 합류했다. 색채가 전혀 다른 두 작품을 끝낸 후 청춘 로맨스에 들어올 당시 모드 전환이 잘 이루어졌나.
워낙 온 앤드 오프가 쉽게 된다. 현장에서도 컷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사실 <지옥>과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는 촬영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격일로 번갈아 연기하는 날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촬영을 마칠 즈음엔 바로 시트콤 <유니콘>의 출연을 결정지었다. 몽글몽글한 날들로 가득한 정아로 살다 늘 분노하고 돈에 눈이 뒤집힌 애슐리를 연기하는 일이 재밌었다.
피아노 앞의 정서
- 정아를 연기하기 위해 녹록지 않은 피아노 연습 과정을 거쳤다고.
역할에 주어진 기술을 연마할 때는 매번 같은 단계를 거친다. 우선 무작정 신난다. 작품이 아니었다면 평생 해볼 일 없는 취미를 익히면 내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생길 거라는 기대도 크다. 그 마음은 이내 두려움과 공포로 바뀐다. 피아노도 마찬가지였다. 7살 때 피아노를 잠깐 배운 게 전부였는데 그때 <바이엘> 1권도 채 못 떼고 그만뒀다. 일단 피아노를 대여해 집에 설치한 후 맹연습에 들어갔다. 그리고 현장에서도 제작진이 접이식 피아노를 마련해줘 거듭 연주를 손에 익히려 애썼다. 시작 3일차쯤이 공포의 절정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긴장이 몰려오더라. 화장실에 가는 것도 포기하고 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 내리 3시간을 연습만 했다. 3주 정도 지나니 악보는 못 읽어도 손가락이 모든 순서를 외웠다. 정아를 연기하려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내가 어색해 보이면 안됐다. 누가 봐도 피아노와 친숙한 사람인 듯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물리적으로 피아노 앞에 오래 머물러보았다. 미신인 걸 알면서도 피아노에 ‘내가 열심히 할 테니 너도 내게 다가와달라’며 빌다시피 연습했다. 요새 다시 피아노를 배워볼까 싶다. 누구도 나한테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시키지 않지만 그냥 한번 더 피아노에 비는 것이다. ‘내가 널 다시 찾았으니 영화 흥행 좀 시켜줘라~’ 하는 마음으로. (웃음)
- 영화 시점의 주체는 유준이다. 따라서 유준이 처음 정아를 만난 순간, 관객도 처음으로 정아와 마주한다. 정아가 등장하는 첫 숏에서 염두에 둔 분위기가 있나.
의도가 불필요한 숏이었다. 예쁜 척을 해도 이상하고, 유준을 보고 놀라자니 맥락과 맞지 않았다. 미래로 왔다는 확신조차 없는 상황에서 유준을 만났고, 그렇다고 나쁜 짓을 벌인 건 또 아니니 벙찌고 멍한 얼굴이면 충분했다.
- 정아는 언제나 유준에게 물음표를 남기고 사라지는 미스터리한 캐릭터다. 그런데 배우 본인은 정아를 유령보다는 실재하는 사람처럼 표현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에 출연한다고 하자 지인들이 하나같이 “그래서 네가 귀신이야?”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되레 귀신처럼 보이지 않으려 했다. 요는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정아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최종 상영본에선 삭제됐지만 정아의 전사를 일부 촬영했고 이에 관해 감독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90년대에 음악을 전공하려면 가정 형편이 뒷받침돼야 할 텐데, 한부모가정에서 어렵게 자라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는 정아를 시기하는 동기들도 많지 않았을까. 엄마(강말금)를 실망시키고 싶진 않은 정아가 고독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꿈꾸듯 몰두할 수 있는 매개가 피아노다. 피아노 앞에서만은 한없이 순수하고 예쁜 정아를 만들려니 자연히 밝은 모습이 우선적으로 튀어나왔다.
- 첫사랑 감성을 표방하는 영화지만 유준을 향한 정아의 마음만은 정통 멜로에 가깝다. 보고 싶지만 가까이 갈 수 없고, 사랑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정서 말이다.
그래서 정아에게 다가가는 게 어려웠다. 나는 정아가 굉장히 성숙한 아이라고 봤다. 유준 말고는 정아를 보는 사람이 없지 않나. 유준이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게 정아에겐 가장 힘들고 괴로운 일이다. 정아가 유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러 왔을 때 하필 유준이 인희(신예은)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나. 그때도 정아는 질투보다는 슬픔이 컸을 터다. ‘유준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간 속에서 사랑을 해야지. 그게 유준이를 위한 길이지’라며 떠나길 택한다. 작품의 제목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고 이 문장이 정아를 지칭할 테지만, 나는 어쩐지 정아가 그게 무어든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비밀을 털어놓으면 더는 변명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야 편하겠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모두의 행복을 위해선 무거운 짐을 혼자 감내하는 게 차라리 정아에겐 편한 길이다.
배우로 살 수 있겠다는 힘

- 데뷔작인 유은정 감독의 단편영화 <캐치볼>이 2015년 작품이니 올해가 데뷔 10주년이다. 돌아보면 <캐치볼>은 장르성이 강한 작품이었고, 민영 역시 범상치 않은 캐릭터였다. 여러모로 신인배우가 쉽게 도전하기엔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나.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무얼 고를 수 있는 처지가 못 돼서 작품의 선택을 받으면 그 자체로 놀랍고 감사할 뿐이었다. 연기 전공자도 아니어서 무작정 허정도 선배를 비롯한 배우들에게 연기에 관해 이모저모를 질문해가며 촬영을 마쳤다. 수많은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그저 시키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동물적인 연기를 했다. <캐치볼>을 위해 1종보통 운전면허도 땄다. 그때 처음으로 배우를 하면 연기 외의 다른 소양을 채울 수 있다는 걸 배웠다.
- 필모그래피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분기점이 된 작품은 아무래도 <지옥>이지 않을까. 작품이 공개된 이후 연기 호평이 잇따랐다.
살면서 유일하게 이 작품은 꼭 출연해야 한다며 우겨봤다. 배역이 전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3부까지의 대본을 받았고 심지어 내가 연기한 소현은 4부에 등장하는데도 이 기회를 누가 채갈까봐 걱정이 되더라.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으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와 병행하며 쉬는 날이 없어도 괜찮으니 <지옥>을 무조건 해야 한다고 외쳤다. 모성을 본격적으로 연기할 수 있다는 경험도 큰 행운이었다.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 편히 즐기고 온 현장이기도 하다. (웃음)
- 2023년엔 <파우스트>로 연극무대에 올랐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배우가 자신을 새로이 실험해보고픈 의지가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나는 정말 겁이 많다. 그래서 자연히 고민도 많은데 <파우스트>도 <지옥>처럼 단번에 출연을 결정한 경우다. 우선 작품의 엔딩이 탐났다. 이 장면을 매일 라이브로 해낼 걸 그려보니 상상만으로 짜릿했다. 수락 전엔 행여 무대 경험이 없는 내가 작품에 민폐를 끼칠까 근심이 들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장고 끝에 악수를 두는 경우가 꽤 있더라. 그렇다면 나의 직감대로, 큰 번뇌 없이 결정을 내리는 편이 맞겠다는 판단하에 출연을 확정했다. 나를 고른 분들은 무대 경력도 오래됐고 안목도 뛰어나니까 그들의 선택을 믿은 것이다. <파우스트>를 하길 정말 잘했다. 배우 인생 8년차에 <파우스트>를 만나 다행이었다. 돌아보면 내가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생기던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업계 전반이 얼어붙어 있던 시기라 들어오는 작품의 편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자존감이 바닥이라 어쩌면 평생 연기를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회의마저 들던 차였다. 그때 <파우스트>의 그레첸을 만났다. 내가 연기를 재밌어한다는 걸, 평생 연기만 하고 살아도 괜찮겠다는 걸 <파우스트> 덕분에 알았다. 앞으로 10년은 더 배우로 살 수 있겠다는 힘을 얻었다.
- 최근엔 <지구마불 세계여행2>로 배우 원진아의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견한 시청자들도 많다. 이 여행을 어떻게 추억하나.
<파우스트>에 이은 두 번째 터닝 포인트다. 나는 MBTI로 예를 들면 극도의 ‘J형’이다. 삶에서 닥치는 예기치 못한 변수를 크게 두려워했다. 그런데 함께 여행한 유튜버 원지 언니를 통해 우연과 불확실성이 선물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차피 삶은 내 통제 바깥의 영역이라는 걸 인정하고 난 후 많이 밝아졌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을 사는 중이다.
- 차기작 <아이 쇼핑>이 연내 공개를 앞두고 있다. 지금 귀띔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말할 수 없는 비밀>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액션 연기를 하고 싶다고 인터뷰마다 말하고 다녔는데, 그 꿈을 이룬 작품이다. 큰 결심을 하고 들어간 작품인 만큼 나조차도 화면에 담길 내 모습을 기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