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어디든 가는 거지”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난 <퇴마록>
2025-02-14
글 : 이자연

1993년 여름, PC통신 시절 하이텔에 연재된 <퇴마록>은 이듬해 1월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모든 퇴마사가 힘을 합치기 시작하는 ‘국내편’을 비롯해 ‘세계편,’ ‘혼 세편’ , ‘말세편’까지 <퇴마록>은 완결에 이르는 동안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너른 세계관 설정과 혼합된 전례 없는 한국형 오컬트는 원작자 이우혁 작가를 한국 판타지 문학의 0세대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극초반까지 이어진 <퇴마록>의 연재 기간은 작품의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어떤 현실이 펼쳐질지 쉽게 예측할 수 없어 대중적 불안이 점진적으로 오르던 세기말 풍토는 인간을 향한 희망과 불신을 함께 품었고, 과학이나 기술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의지하고 싶어 했다. 특히 구원자의 등장과 여러 능력자가 힘을 합쳐 싸우는 인류애적 소망은 (PC통신 커뮤니티에 SF 게시판 자체가 없던 시절임에도) 오컬트를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기에 2025년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나는 <퇴마록>에는 태생적인 미션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세기말 감성이 품은 공포심을 유지하면서도 <퇴마록> 을 처음 듣는 어린 세대, 특히 극장가의 주요 타깃을 끌어안을 수 있는 현대성을 모색해야만 한다.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소설 국내편의 첫 챕터인 ‘하늘이 불타던 날’에 해당한다. 해동밀교 145대 교주인 서 교주는 대대로 내려오는 예언서를 읽고 힘을 내두르기 위해 악신에게 생명을 제물로 바치기 시작한다. 제물의 대상은 짐승과 인간을 가리지 않는다. 이에 위험신호를 느낀 다섯 호법은 서 교주와 전투를 벌일 계획으로 어린아이이자 해동밀교 수련자인 준후를 가톨릭교에서 파문당한 박 신부에게 맡기고자 한다. 과연 호법들의 저항 전투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하늘이 불타던 날’은 주요 퇴마사들이 모험을 떠나기 시작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인 만큼 <퇴마록>의 프롤로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선 영화화하기에 너무 좁은 구간을 선택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퇴마사들이 세상을 위해 왜 그토록 지리멸렬하게 싸워야 하는지 그 논리적 이유가 여기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세계관 이해를 위한 필수 요충지인 것도 사실이다.

먼저 <퇴마록>은 3D애니메이션이지만 거친 느낌의 손 그림 페인팅으로 전반적인 톤 앤드 매너를 맞췄다. 21세기형 <퇴마록>을 거듭하는 과정에도 원작에 담긴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는 화풍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를 선택하는 순간 또 다른 미션이 생겨난다. 도사와 악마, 신부의 퇴마가 격돌하는 화룡점정 장면에서 손그림 위로 3D 효과가 덧대지니 이질적인 느낌이 강해진 것이다. 박지호 로커스 CG 슈퍼바이저는 전투를 현대화하여 게임처럼 화려하게 펼쳐내면서도 2D의 감성을 움켜쥘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처음에는 모든 프레임을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보았다. 하지만 인하우스 아티스트가 현실적으로 전 과정을 통제하기 불가능했고, 다른 업체와 협업하면 예산이 초과되는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찾은 게 게임 이펙트다.”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시리즈나 <아케인>처럼 중간중간 2D 프레임을 접목하는 작품들을 예시로 3D 형태에서 2D 그림을 보완하는 스미어 프레임 기술을 더했다. “이러한 로커스의 실험은 각 캐릭터간의 작화 균형을 중시하면서도 비용과 시간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일종의 조율이었다. 국내 애니메이션이 지닌 한계를 최대한 넘어보고자 노력했다.”

이외에 적극적으로 활용된 또 다른 툴은 바로 블렌더다. 블렌더 툴은 제82회 골든글로브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플로우>를 통해 대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국내에는 이를 활용하는 아티스트가 많은 편은 아니다. “블렌더 툴의 그리스 펜슬을 이용해 3D 화면에서 2D처럼 그리면 그 부분이 3D로 구현된다. 눈물 이나 피 같은 액체는 3D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게 중요하지만 그리스 펜슬로 표현하면 조금 더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위해 아티스트를 새로 찾고 트레이닝을 하며 작업했다. 완전히 제로 베이스부터 시작한 것이다.” <퇴마록> 원작이 지닌 감수성을 깊이 있게 재현하기 위해 기술의 힘을 빌렸으나 동시에 기술로부터 잠시 벗어난 장면도 있다. 바로 어린아이 준후의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 진실을 마주한 소년의 설움과 비애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의 통곡을 프레임 단위로 하나 하나 그려넣었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레이어별로 그린 뒤 VFX팀에서 흐름에 맞게 조정했다. 이 시퀀스만 평소 작업 기간의 3배가 들었다.” 그렇다면 소설 속 90년대 비주얼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을까. 박용건 로커스 아트디렉터는 캐릭터 외형을 디자인할 때 오히려 많은 것을 덜어내는 시도를 했다. “애니메이션은 지금 만들어도 4~5년 뒤에 공개하기 때문에 그즈음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한국형 오컬트인 만큼 욕심이 앞서서 파격적인 룩도 만들어봤지만 무난하게 수용될 수 있는 선으로 조금씩 덜어냈다. 가장 심플한 게 가장 트렌디하다.” 장르성이 돋보이는 해동밀교 사찰에는 한국적인 탱화(천이나 비단에 부처의 그림을 그리는 불교의 불화)가 두드러진다. 한국적인 듯 이국적인 면모가 강한 이 탱화에도 흥미로운 작업 비하인드가 있다. “탱화 디자인을 맡은 디자이너가 인도네시아 출신이 다. 그래서 어떤 디자인을 부탁해도 인도네시아나 동남아풍의 느낌이 섞여 들어오더라. 나는 그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종교가 뒤섞인 해동밀교의 느낌이 나기도 하고. 탱화 전문가에게 맡겼다면 완성하지 못했을 비주얼이다.” 영화 속 미술적 포인트를 즐기는 새 세대의 특성까지 함께 반영한 <퇴마록>은 이제 관객을 마주할 채비를 마쳤다. 불의와 고통이 있는 어디든 찾아 나서는 네명의 퇴마사처럼, 관객의 기다림이 있는 곳이라면 과거와 미래를 포용한 채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퇴마록> 기획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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