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극장에 다녀왔습니다 영화를 하고 왔습니다
2025-02-14
글 : 송경원

영화 보고 왔어. 어림짐작으로도 수천번은 건넸을 이 습관 같은 대답이 근래 전혀 다른 두께로 다가온다. 예전엔 영화 보고 오면 그 영화에 대한 것만 기억에 남았다. ‘영화’가 주인공이고 관람은 당연한 기본값이었다. 영화는 보는 매체니까. 최근엔 본 내용만큼이나 점점 ‘보았다’는 행위 자체가 기억에 남는다.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못지않게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날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 영화와 만난 그날, 극장엔 몇명이 있었는지, 날씨는 추웠는지 더웠는지, 어떤 기분으로 극장에 들어갔는지에 따라 영화와 얽힌(혹은 영화로부터 물려받은) 기억마저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주는 두번 극장에 다녀왔다. 공교롭게 두편의 영화가 다 공간을 중심으로 기억과 존재를 쌓아나가는 작품이었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히어>는 한 장소에서 켜켜이 쌓이는 기억들을 축적하여, 삶의 의미를 꿰뚫고자 시도한다. 공간, 나아가 시점마저 고정시킨 채 세상을 관통하려는 로버트 저메키스의 모험심은 새삼 ‘보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한편 브래디 코베 감독의 <브루탈리스트>는 역사의 상처, 고난의 기억을 재료 삼아 거대한 현대영화의 신전을 축조했다. “어떤 격변이 있어도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만들고 싶다는 라즐로의 동기는 영화의 순수한 욕망과 닮았다. 어떤 의미에서 두 영화의 야심은 비슷해 보인다. 영화의 언어를 확장시켜 시간을 초월하고, 마침내 스크린 너머까지 시공간의 통로를 뚫고자 하는 무모하고 아름다운 시도.

영화란 무엇일까. 골동품상이 된 기분으로 이 케케묵은 문장을 다시 꺼내면, 주변 사람들은 이제 ‘이 자식, 또 시작이네’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귀를 닫을 준비를 한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도망칠 법도 한데 그래도 맞장구라도 쳐주는 이들에게 새삼 감사를 보낸다. 이 답 없는 질문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건,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반응이 갱신되기 때문이다. 몇년 전부터 나에게 영화는, 대상으로서의 ‘명사’보다는 행위로서의 ‘동사’로 자리매김했다. 특정 영화의 관람을 넘어 ‘영화라는 행위’를 한다는 감각에 가깝다. 상영 일정에 맞춰 영화를 고르는 과정, 스케줄을 조정한 후 영화관까지 가는 시간, 극장을 나서며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경험까지. 영화와 연결된 모든 체험이 곧 영화(의 일부)가 된다.

‘보는 것’에서 ‘하는 중’으로 영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나니, 스크린의 다양한 존재 형태와 가능성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그저 보지 못했을 뿐이었던 걸까. 여러 방식으로 시도되었던 가능성들이 이제야 인식되었다고 해도 좋겠다. 아니면 영화가 극장 바깥으로 나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극장산업의 위기와 균열은 (의도했건 아니건) 역설적으로 대안적 상상의 싹을 틔울 공간을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호 특집 기사로 취재한 마이크로시네마는 단순한 소규모 상영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때론 취향으로 뭉치고, 종종 공간 너머로 확장되어, 마침내 영화라는 행위가 애초에 지녔던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적극적 행동의 산물.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이뤄지는 대화는 결국 영화를 대상에서 행위로, 요컨대 보는 매체에서 하는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바야흐로 영화와 극장, 익숙한 단어 사이 관람을 중심으로 한 녹슨 기억들이 떨어져나가고 새롭고 생경한 체험들이 채워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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