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커버] 끝까지 놓지 않은 마지막 퍼즐 조각, <미키 17> 스티븐 연
2025-03-04
글 : 이자연
사진 : 오계옥

좀비 사태를 정면 돌파하는 의협심 강한 피자 배달부(<워킹데드>)는 마음 앞선 환경운동가(<옥자>)가 되고, 의미심장한 말로 미스터리한 아우라를 펼치던 청년(<버닝>)은 두발로 디딘 땅이 무르게만 느껴지는 이민자의 외로운 얼굴(<미나리>)이 된다. 오랜 시간 누적된 분노 끝에 선 한국계 미국인 대니(<성난 사람들(비프)>)는 또 어떤 삶으로 이어질까. 스티븐 연의 선한 얼굴은 마치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듯 작품 속에 생동하는 인물의 모습으로 반듯하게 변모한다. <옥자> 이후 봉준호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을 마친 스티븐 연은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박자로 <미키 17>의 티모를 이룬다. 철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욕심 많은 파일럿은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다각적 투쟁과 성장을 자극하는 동시에 자기만의 자유를 꿈꾼다. 여러 형태의 삶을 거쳐온 스티븐 연을 직접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코 복제될 수 없는 고유한 이야기가 이 안에 있다.

- 보육원 시절부터 미키의 오랜 친구이자 열등감을 자극하는 티모를 맡았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연락했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역할을 제안받았을 때 조금 망설였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든 생각은 ‘와, 이 사람 뭐야?’였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는 티모. 단순히 역할이 미워 보여서 망설였던 것은 아니고, 티모라는 사람을 인간 스티븐 연이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봉준호 감독의 설명을 듣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향한 믿음이 떠올랐다. 감독님의 전화를 받으면 무엇이든 그냥 하게 된다. 그냥 그렇게 된다. (웃음) 배우와 감독 사이에 쌓인 신뢰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이 과정도 좋았다. 티모라는 캐릭터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봉 감독님이 내게 맡기려 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 역할을 맡겠다고 답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

길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

- 원작 소설 <미키 7>을 읽었나.

읽지 않았다. 게을러서. 진짜 게을러서. (웃음) 근데 감독님도 소설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그도 배우들이 원작 소설을 읽기를 바랐던 것 같지는 않다. 감독님의 시나리오 자체가 원작을 각색한 또 다른 세계니까.

- 처음엔 티모를 이해하는 데 심리적 거리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확히 그를 어떤 인물로 바라보았나.

티모를 가만히 보면 누구나 공감할 지점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티모가 마음 편히 느낄 방식은 아니다. 티모도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줄여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타고나기를 자아가 너무 크다. 그러니 티모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또 많은 걸 원한다. 자유도, 존중도, 생존도, 안전도, 명예도. 모든 걸 갖고 싶어 한다.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를 때 보인 그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엔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무척 정당한 선택이었다. 티모는 오직 자기 기준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합리적으로 찾아 나선다.

- 원작 소설에서 티모의 원형 캐릭터인 베르토는 미키와 훨씬 더 상호적이다. 미키의 질투와 열등감, 우정과 추억을 동시에 이끌어내는 인물로서 입체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에 반해 영화 속 티모는 조금 더 단순화됐다. 개인의 서사를 부각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모가 강한 인물로 정리됐다. 스토리라인이 줄어든 인물을 연기하는 과정이 어렵진 않았는지.

원작과 비교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번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큰 그림을 믿고 따르는 게 중요했다. 그의 모든 전작엔 그가 건설한 하나의 세계가 있지 않나. 모든 캐릭터가 비중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기능과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원래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영화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인물이 각자의 자리를 알아야만 한다.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다. 티모는 미키 곁에서 기본 배경처럼 존재하다가 특정한 순간에만 등장하고 사라진다. 온전히 혼자 있는 모습을 볼 기회도 별로 없다. 전체 그림의 토대를 다져주는 베이스 같달까. 티모는 늘 누군가의 옆에, 뒤에 있다. 난 티모의 그런 점이 좋다.

- 평소 캐릭터를 체화하는 과정에서 시나리오에 충실한 편인가. 배우의 의견이나 해석을 더하거나 전사를 상상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

물론 두 가지 방식 모두 활용한다. 상황에 따라 몰입하는 방식이 다르다. <미키 17>은 영화 자체가 거대한 퍼즐 같았다. 봉준호의 손길로 정교하게 짜인 퍼즐. 그래서 나는 이 퍼즐 안에서 기꺼이 하나의 피스가 되기로 결정한 거다. 물론 다음에 또 다른 작업을 함께하게 된다면 접근 방식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티모에 한해서는 내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드러내기보다 큰 그림 속에서 은은한 조화를 이루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한편의 스토리가 잘 흘러가기 위해 배우로서 자신의 몫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한 미덕이다.

- 특히 티모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미키에게 알량한 우월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 톤, 손짓이나 몸동작에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해석한 티모의 심리는 그것과 조금 다르다. 티모는 미키에게 자신이 형인 것처럼 행동한다. 미키가 익스펜더블에 지원할 때 말리지 않은 것도 미키가 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거나 당연히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니플하임 행성에 가는 게 오히려 미키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가 빚쟁이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타인의 눈에 티모의 결정이 묘하게 이기적이고 이상해 보일지라도 티모는 순수히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저 안전지대에 미키를 두고 늘 그렇듯 티모는 자기 갈 길을 가뿐하게 갈 뿐이다. 연기하면서 그런 가벼움을 드러내려고 했다.

- <옥자>에 이어 봉준호 감독과 두 번째로 작품을 함께했다. 이제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아차릴까.

그럴 리가! (웃음) 나도 아직 봉 감독님을 알아가는 중이다. 두 작품을 함께했지만 그를 완전히 이해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교포다. 교포라는 정체성은 신경 쓸 게 정말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한국인으로서 예의와 존중을 갖춰야 하고, 동시에 내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국제적인 환경에서 작업할 때 교포로서의 입장은 확실히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 것 같다. 연출자로서 봉준호 감독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삶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영화들을 만들 수 있던 것 같다. 봉 감독님은 어떤 사안에 대해 단편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려 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이 들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 단순히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정확한 액션을 취한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모순적인 존재 같달까. 세상을 직면하는 태도가 굉장히 용기 있고 대담하다.

- 티모에 관하여 봉준호 감독은 어떤 디렉션을 주었나. 함께 의논한 내용이 있다면.

나는 촬영장에서 대화가 많은 편이 아니다. 연기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대신 감독님과 전화를 많이 했다. 그때 감독님이 티모에 관해 강조하셨던 게 귀여움이다. 귀여움이 봉준호 감독 고유의 뷰티인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 인물에게 끌리고 마는 인간적 귀여움. <미키 17>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매력이 있다. 좋든 싫든, 주인공을 도와주든 도와주지 않든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다. 그래서 티모에게도 (두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으며) 그런 귀여움이 잘 보이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 하지만 일반적인 앙증맞음이나 깜찍함과는 거리가 멀다. 외형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닌, 성향이나 습관 혹은 취향에서 보여지는 인간적 면모에 가깝다. 나도 모르게 이 인물의 행동과 말을 이해하게 되는 특별한 장치 같은 거다. 아마도 그게 봉준호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인 것 같다. 정말 아름답다.

- 티모의 감정이 가장 극에 달하는 후반부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빚쟁이로부터 협박을 받은 자신을 대신해 미키에게 부탁을 들어달라는, 잔인하고 일방적인 호소를 한다.

그 장면… 티모 약간 소시오패스 같지 않나요? (웃음)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그렇지만 전사를 고려하면 이상하게만 보이진 않는다. 티모는 고아다. 이 말은 그가 오랫동안 제도권 바깥에서 살아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지닌 사람이 어떻게 시스템을 믿을 수 있을까. 시스템의 아늑한 도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시스템에 불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 미키한테 어려운 부탁을 할 때에도 (비록 뻔뻔하게 굴지만) 그 부탁이 얼마나 가혹한지 다 알고 있다. 다만 그걸 수행하는 게 미키일 때 더 수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 문득 궁금하다. 티모는 미키를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 진짜?

티모는 억지로 친구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진짜 우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타인의 요구에 맞춰 삶을 연기하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살려면 친구한테 빚을 좀 질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게 전부다. 그의 눈물도 악어의 눈물이 아니다. 진실된 눈물이다. 눈물을 그쳤을 때도 진심이고. 사람들이 서로에게 빚을 지거나 은혜를 갚을 일만 있다고 생각할 뿐, 거짓된 것은 없다.

- 스티븐 연은 배우의 궤적을 거쳐 총괄프로듀서로서도 자리매김했다. 영화 <미나리>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비프)>(이하 <성난 사람들>)까지. 지난해 뜨거운 반응을 얻은 <성난 사람들>은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 부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숲 전체를 보아야 하는 자리의 역할은 어떻게 다가왔나.

내가 <성난 사람들>의 총괄프로듀서로 참여한 이유는 이야기의 진정성을 지켜내는 수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역할은 단순히 이걸 선택하고 저걸 빼는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성난 사람들>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진짜 정확하게 담기고 있는지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성난 사람들>이 잘된 이유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경험을 굉장히 진솔하고 투명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것을 앞세우지 않고 배경의 일부로 은은하게 녹여냈다는 점이다. 정말 은은하게. 그게 진짜 어렵다. 어떤 문화를 이국에 전달하려면 그것을 맨앞에 내세우는 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해요, 저런 행동을 해요 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면서 주변에 흔하게 벌어지는 인간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체득하길 바랐다. 그게 내가 프로듀서로 나선 이유다.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일해야 하지, 하고 생각했다. (웃음) 그렇지만 언젠가 끝이 있는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내 삶에서 의미가 크다.

- 시선을 빼앗는 <워킹데드>의 한국계 미국인 글렌 리, 이민 1세대로 삶을 개척하는 <미나리>의 제이콥 리 등 이민자의 얼굴을 여러 차례 그려오면서 대중은 은연중 스티븐 연의 역할에서 인종적 의미를 찾는다. 아시안으로서, 이민자로서 특정 의미를 전해줄 거라는 기대가 느껴지기도 하고. 하지만 백인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을 땐 그 역할이 될 뿐이지 인종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런 기대가 한계를 만들 거라는 우려를 느낀 적은 없는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 위치가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위치라는 건 항상 변한다. 다만 누군가가 나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한다. 인정해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다.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면 비로소 뛰어넘고 던져버리고 부숴버릴 수 있다. 그 불편함은 몸소 표현하는 순간 사라진다. 내게는 사랑하는 두 아이가 있다. 나는 아이들이 정체성이라는 복잡한 층위에 붙잡혀 살길 바라지 않는다. 물론 정체성은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인간이고 의식이다. 우리가 지닌 생각과 정신은 어떤 정체성보다 훨씬 크고 자유롭다. 그래서 더더욱 나 자신을 보여주려고 한다. 캐릭터를 통해 진짜 나를 보여주고 흘려보낸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해온 방식이다.

- 티모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다른 할리우드영화였다면 백인 배우가 캐스팅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 영화산업에서 주인공보다 우위에 있는, 질투심을 유발하는 인물로 백인이 설정되는 경우가 흔하니까.

흥미로운 질문이다. 설명하기 좀 어렵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내가 아시안 아메리칸 배우로서 갖고 있는 특정한 시선이나 감각은 그 역할에 필요한 경우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게 필요한 자리라면. 동시에 우리는 피해의식이라는 개념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수용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삶을 헤쳐나가는 데 핑계가 되어선 안된다. 거들먹거리는 파일럿이 백인 배우를 연상하게 하는 자리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티모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 나의 첫 번째 생각은 ‘티모를 연기해야 하는구나’였다. 인종적인 문제가 중요한 설정이 아니라면 연기에 먼저 녹아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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