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장진 · 장항준의 고삐풀린 수다 140분 [3]
2002-07-19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사진 : 정진환
정리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수다 5 Round

난 집채만한 데스크탑, 넌 날렵한 노트북

장항준 너는 모르겠지만 참, 내, 이런 일도 있었다. 줄줄 나오네. 시나리오 쓰려고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하우스에 들어갔거든. 데스크톱 낑낑 안고 프론트에 가서 “저 영화…”하는데 프론트 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어머! 장진 감독님이죠?” 하는 거야. 허참! 여기서도 장진을 찾나, 그러더니 저 맨 끝쯤에서 “아 여기 이름있네요. 장항준씨…” 하더라고. 그래서 장진이 방은 몇호예요? 물었더니 미치겠네 내 옆방이야. 그래서 내가 니방 찾아갔었잖아.(이런 이야기를 할 때 장항준 감독은 보통 일어나서 일인극 수준으로 허공에 팔을 휘휘 저으며 대사를 치고받는다)

장진 그랬냐? 나는 옷 다 벗고 목욕하려고 물 받아놓고 발 딱 담그려는데 초인종 울려서 놀랐잖어.

장항준 나는 초인종 눌러도 소식이 없기에 이 자식 시나리오 쓴다고 들어와서 혹시 여자랑 있나 했다니까. 초인종 누르고 니가 나오는 시간을 계산해볼 때 딱 여자숨기고 튀어나올 시간이었거든. 어쨌든 방에 들어갔더니 나는 그 집채만한 데스크톱 들고오느라 고생했는데 너는 날렵한 노트북들고 앉아 있더라. 그때 맥주 한잔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많이 했는데.

장진 그날 <불타는 우리집> 사정을 처음 들었잖아. 하지만 나는 ‘항준이는 언젠가 나랑 만날거다’라고 생각했었어, 만약 안 만났다면 그때가 나쁜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면서. 난 사실 이번에 <라이터…>가 개봉해서 기쁘지만 니가 시나리오 쓴 <박봉곤…>이 영화될 때가 제일 기뻤던 것 같아. 그 시나리오 보고 정말 즐거웠거든.

장항준 나는 <박봉곤…> 끝나고 인생 필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아니데. 우리 아버지가 만날 나 붙잡고 영화는 한다고 한 게 언젠데 안 하니, 하려다가 엎어졌는데요, 그러면 방송해라 방송할 땐 돈도 잘 벌더니… 그러면서 아주 달달 볶으시는거야. 게다가 집에 쌀이 떨어졌어. 아주 상징적인 사건 아니니?

장진 정말 고전적인 시추에이션이다.

장항준 그럴 때마다 우리 마누라가 아버님, 그이는 하고 싶은 거 해야 해요, 돈은 제가 벌어올게요, 그랬다니까. 그래서 우리 마누라가 나는 고마워. 은희야, 사랑한다!

장진 물론 너는 내가 먼저 아무 일 없이 잘 커나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모든 게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거든. 나는 ‘오야지’가 없었어. 늘 맨땅에다 박았어.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꽂을 사람이 없다고. 그런데 나에겐 그 간절했던 시절이 너무 짧았어. 그런데 너는 그 시절이 깊었단 말이야. 그런 놈들은 좀처럼 안 흔들리거든.

장항준 너도 알다시피 우리집 식구들이 진짜 말이 많잖아. 그나마 내가 제일 조용한 편이야. 우리 엄마가 내 결혼식에 연예인들이 몇명 올 건지 친구들하고 내기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전화하던 거 생각하면….

장진 니네 가족사를 듣다보면 부러워. 나는 아무도 터치 안 하고, 그냥 나혼자 살아나온 것 같어.

장항준 야! 넌 진짜 좋겠다. 난 인생이 터치야. 아버지 터치, 엄마 터치, 형 터치 심지어 동생도 터치야. 딱 하나 맘대로 해본 게 영화야. 인생에서 승부 두번 걸었지. 나 연극영화과 가야겠는데요, 영화할 건데요. 이거 둘. 공부 잘했으면 아마 영화 안 시켰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지.

수다 6 Round

별 5개짜리 코미디, 더이상 꿈이 아니다

장진 그동안 나 보면서 저건 아닌데 한 건 없었냐?

장항준 글쎄 <킬러들의 수다>는 이야기 자체가 내 과가 아니었거든. 나도 예전엔 내레이션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내레이션이 싫어. 물론 비주얼이나 다른 면들은 저놈이 언제 저런 거 공부했지 싶을 정도였어. 저 자식이랑 나는 이제 완전 인생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하지만 나는 <간첩 리철진>이 훨씬 장진다웠어.

장진 솔직히 <킬러…>는 어떤 부분 내 것을 많이 죽이고 간 게 있었지.

장항준 왜 <간첩 리철진>에서 유오성이 술먹고 경찰서에서 꼬장부리고 나오는데 길가에 인민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는 환영을 보는 장면이 있잖아. 그런 니 감성이 정말 좋아. 그런 표현들을 보면 장진이란 감독에 대한 확신이 느껴져. 저놈은 지가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는구나. 거물 같은 느낌이 다 들더라구.

장진 어이고 말은….

장항준 물론 예전에 <기막힌 사내들>을 보면서부터 이 자식 진짜 웃긴 놈이다. 진짜 배짱좋다, 생각했지. 그런 거 보면 확실히 너보다는 내가 훨씬 대중지향적인 것 같어. 나는 모험 안 하려고 하잖아. 그건 일종의 모험처럼 보였거든. 그런데 결국 만들더라고. 하여튼 대단해 보였어.

장진 넌 이제 시작이잖아. 앞으로 두세 작품 더 지켜보면 장항준의 세계가 보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 니가 안 보여준 세계가 너무 많단 말이야. <라이터를 켜라>를 통해 보여준 니 세계는 극히 작단 말이야.

장항준 그렇지

장진 나는 니가 이제 메커니즘과 만나고 영상력이 뒷받침되면 충분히 시너지를 일으켜서 <인생은 아름다워> 이상의 코미디, 별 5개짜리 코미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장항준 칭찬이냐? 나는 웃음이 미덕이라고 생각해. 웃음 자체가 사람을 즐겁에 해줄 수 있으면 족하지. 성격이 쭈글쭈글한 걸 싫어하니까. 슬프고 참혹한 이야기를 즐겁게 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장진 항준이 니가 겪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타일, 톤, 제스처가 나랑 통하는 부분이 있는 거니까. 아무리 살벌한 이야기라도 항준이 너는 유쾌하게 들려주고 그 안에서 동화를 꿈꾸는 수준까지 갈 수 있는 놈이거든. 고루하거나 남루해지지 않는 느낌이 있다고.

장항준 난 진이 너는 나랑 다른 종자라고 생각했어. 쟤는 운동을 잘하고 나는 안 되고. 재는 패션감각이 있고 나는 후질하고. 오늘 이게 내가 제일 잘 입고 온 거라니까. 너를 보고 있으면 장진은 저지를 줄 아는 놈이구나. 되게 열심히 사는구나.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찾는구나 하고. 특히 <묻지마 패밀리>는 정말 잘했다 싶어. <묻지마 패밀리>는 장진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이제는 니가 사람을 키우겠다는 사람 마음을 알기 때문에 충무로에 신선한 바람을 넣어보자. 처음엔 잘돼서 배가 아프기도 했지만, 농담 아니라 진짜 배가 아팠어. 내가 왜 너 밑에 들어가냐? 생각했지만 지금은 장진 밑에 기꺼이 들어가고 싶어.

장진 그래서 결국 들어왔잖아. (취재진을 향해) 이 친구 이제 수다에서 작가팀 팀장으로 일해요. 조그마한 회사에서 ‘이사’직함 달고. (웃음) 물론 오랫동안 원해왔던 것이기도 하지만 충무로 안에서 장항준이란 브랜드는 장진 이상이지 이하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같이 가자 했을 때 너 하루 정도 고민했냐?

장항준 음, 하루 정도.

장진 같이 와줬다는 게 어쨌든 고맙고 든든하다. 그런데, 제발 건강 좀 챙겨라. 니 얼굴을 봐라. 병원에 가야 돼. 키가 172인데 52킬로그램이 인간이냐?

장항준 나도 안다. 그런데 쉴 틈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 아트서비스에서 <불어라, 봄바람>이란 영화하기로 했어. 사랑이야기인데 겨울 동안 한눈에 뽕가는 사랑을 나눈 몇명의 연인들이 결국엔 상처받고 봄바람과 함께 치유된다는 이야기. <문 스트럭> 같은 느낌이 나는 영화가 될 거야.

장진 코미디가 있는?

장항준 그럼! 그건 습관이지.

장항준과 장진, 나란히 놓고 봤더니…

의지를 물먹이는 우연, 그 이유있는 난센스

질문1) 다음 인용문에서 A와 B는 누구일까요?

질문2) A와 B 중 8년 뒤에 누가 더 자신이 원하는 걸 많이 성취했을까요?

“A는 코미디 계열로 따지면 비주류 코미디다. 이해가 안 되는 점도 있었고. 굉장히 특이한 생각을 많이 하는 친구다. B의 코미디는 대중적이다. 무척 쉬워서 누구나 웃을 수 있다.… A는 남들에게 크게 폐를 안 끼치고 자기 할 일을 소리없이 하는 편이다. B는 민폐를 무척 많이 끼친다. 난데없이 집에 찾아와 돈달라 그러고 밥값을 내는 법이 없다. 그런데 특이한 건 B의 그런 민폐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B는 한번 관계를 맺으면 나중에도 끊임없이 연락을 한다. 물론 그래서 돈 쓰게 만들지만. A는 별로 그러지 않는다. 전형적인 서울 사람 같다.… A는 여자를 잘 사귀는데 B는 못 그런다. A는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고, B는 그냥 뒤섞여 어울리는 것밖에 못한다.”

94년 시트콤 드라마 <좋은 친구들>을 연출하면서 장진과 장항준을 함께 작가로 두고 일했던 김병욱 프로듀서의 말이다. 69년생인 장항준은 1년 늦게, 71년생인 장진은 1년 일찍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같은 89학번으로 들어와 만났다. 특별히 친했다기보다, 서로를 “말이 통하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로 여겼던 둘은 <좋은 친구들>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같은 방송작가였을 뿐, 누가 더 잘 나간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해 장진의 희곡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춘문예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먼저 한 건 장항준이었는데, 장항준이 시도도 하기 전에 장진이 당선됐다. “그래 좋다, 나는 영화다.” 장항준은 방송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둘의 차이는 더욱더 벌어졌다. 장진은 연극 <택시 드리블>로 대학로의 기린아가 되더니 장항준이 노리던 영화까지 밀고 들어와 <기막힌 사내들>로 감독 데뷔하고 <간첩 리철진>으로 흥행까지 성공시켰다. 지금은 ‘필름있수다’라는 프로덕션까지 차렸다.

장항준은 계속 안 풀렸다. 자신이 쓴 시나리오 중 처음 영화화된 <박봉곤 가출사건>은 흥행이 안 좋았다. <북경반점>의 타이틀에 각본자로 이름이 올라 있지만, 워낙 개작이 많이 돼 자기 것 같지가 않다. 물론 흥행도 비참했다. 장진과 달리 결혼까지 했는데 집에 쌀이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근근이 방송사에 가서 <천일야화> 같은 콩트의 대본을 써서 푼돈을 벌었다. 장진을 보면 “배가 아팠다”. 장진이 자기에게 오라고 하면, “내가 네 밑으로 왜 들어가” 하며 무시했다.

고진감래? 장항준도 데뷔했다. 7월18일 개봉하는 그의 첫 영화 <라이터를 켜라>는 예감이 좋다. ‘어리버리’한 실업자 봉구가, 깡패들이 탈취해 종착역 담벼락에 충돌시키려고 하는 서울→부산행 새마을호 열차를 구해내는 한국판 <다이 하드>다. 시속 140km로 논스톱 질주하는 열차 위를 기어가는 봉구의 모습은 존 매클레인 형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싸움도 못하고 엉성하기 그지없는 그 꼬락서니가 존 매클레인과 비교돼서 더 웃긴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의 인기 작가 박정우의 시나리오로 만들었지만, 일회성 개그들로 캐릭터를 소모시키지 않고 코미디와 액션 장르를 짜임새있게 결합시키는 연출은 확실히 돋보인다.

장항준은 캐릭터들의 동기와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화하기 위해 몇몇 시나리오의 중요한 부분을 고쳤다. 봉구가 죽도록 얻어터지면서도 라이터에 집착하는 걸 설명하기 위해 영화 앞뒤에 봉구의 동창회 장면을 넣었다. 또 봉구가 갑자기 브루스 윌리스가 되는 게 어색해서, 일대일 결투장면을 대폭 줄이는 한편 봉구의 머리가 돌머리라는 설정을 전반부에 집어넣었다. 원래는 총각이던 깡패두목 양철곤을 유부남으로 바꿔 부인 이야기를 추가했다.

그렇게 완성된 영화의 유머에는 장진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봉구가 철곤에게 라이터를 달라고 처음으로 정색하고 말했을 때, 옆에서 철곤의 졸개가 “우리 형님이 화장실에서 라이터나 줍는 놈으로 보여?”라는 말만 안 했어도 철곤은 라이터를 줬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봉구는 기차에 타지 않았을 거다. 인간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변수가 상황을 끌고가는 건 장진 영화에서도 자주 나온다. 기차 안에서 봉구와 깡패가 가스총을 맞잡고 싸울 때, 그 총이 가스총인 줄 아는 이들조차 총구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처럼 ‘이유있는 난센스’도 장진과 통한다.

그러나 봉구가 과거의 나약함과 그로 인한 수모를 자기 의지로 극복한다는 설정은, 시종일관 의지가 우연에 의해 배반당하는 장진식 유머와 다르다. 드마라의 인과관계도 장진보다 강조된다. 얼핏 장항준의 유머는 장진의 그것보다 대중적이고 상식적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김병욱 프로듀서는 “장진은 연극에서, 장항준은 방송에서 단련됐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해석했다. 장진은 “나나 항준이나 비현실적인 상황과 인물에 현실을 투영하려 한다, 다만 항준이는 평균치 이하로 취급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들을 평균치 이하로 보는 사회의 시선에 시비를 거는 데 관심이 많다”라고 말했다.

<라이터를 켜라>를 마치고 장항준은 ‘장진 밑으로’ 들어갔다. 장항준은 ‘필름있수다’의 작가팀장으로 장진과 함께 작업할 것이다. ‘선의의 라이벌’이라는 표현이 좀 느끼하지만, 이 둘에게는 어울린다. 충무로의 코미디가 더 풍요로워질 것 같아 흐뭇하다.

답)1번은 이제 아실 테고, 2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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