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두사부일체> 촬영현장에서 만난 정준호는 “이번만큼은…” 하며 다짐하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느끼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고,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참 길게도 말했었다. 두편의 영화를 마치고 다른 한편의 영화도 크랭크업을 눈앞에 둔 지금, 그는 얼마나 만족하고 있을까. 로맨틱코미디에 딱 어울리는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언제 그런 말을 했었느냐는 표정으로 “올해 개봉할 영화 세편을 줄줄이 보면 저 사람한테 저렇게 다른 모습이 있었는지 놀랄 거예요”라며 자신이 넘친다. 공포영화 <하얀방>의 자유분방한 형사와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의 완벽하고 마음 착한 프로그래머, 코미디 <가문의 영광>의 겁많고 소심한 엘리트까지, 남들보다 세배 빠른 호흡으로 뛰어왔는데도 숨가쁜 기색조차 없다.
어쩌면 그건 정준호가 지난 30년을 유독 느리게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20대 중반에, 연극 포스터에 풀칠하고 팸플릿을 돌리면서 연기를 시작한 그는 깎은 듯한 외모 탓인지 심한 굴곡을 겪었다. 좀더 넓은 무대에 나가고 싶어 MBC 공채 탤런트로 입사한 90년대 초반, 연달아 주연을 맡는 행운을 쥐었지만 그때마다 조기종영의 불운이 패기를 꺾어놓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배역을 따낸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아침마다 주머니 가득 100원짜리를 담아와선 선배들 커피 심부름 해가며 열심히 살았는데도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조그만 카페를 하자 마음먹었을 땐 애지중지 키운 장남이 술파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엄마의 하소연에 주저앉았고, 뭔가 다른 일을 찾으려니 할 게 없어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났다. 돌아와서 만난 드라마가 깡패 이정재로 출연한 <왕초>.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죠”라고 말하는 정준호에겐 어떤 대작의 주연보다도 귀한 조연이었다.
“사람들은 모험을 하지 않아요. 한번 써봐서 잘하면 다음에도 계속 같은 역으로 쓰는 거지. 기본은 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달라서 인상으로나 실제로나 선굵은 남성인 정준호가 “여동생뻘되는 감독하고 그림 그리는 것처럼, 여기는 파란색으로 하고, 여기는 노란색으로 하자, 이런 기분으로” 아기자기하게 영화를 찍기에 이르렀다. <좋은 사람…>의 현수는 “오직 효진(신은경)이 보는 세상 속의 현수일 뿐”이어서 자기 색깔이 없을 수도 있는데, “여자도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라는 점을 깨우쳐 그리 불만도 없다.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정준호는 이젠 “한번뿐인 인생”이 더 중요한 까닭이다. “갑자기 인기를 얻으니까 부탁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죠. 그래도 나 무명일 때 도와준 사람들하고 포장마차에서 술잔 기울이며 한 약속은 깨고 싶지 않아요. 인생 한번 사는 건데 그렇게 살면 되나.” 연기에 대한 철학은 아직 일직선이지만 인생철학만은 아주 단단한 정준호. 아무래도 그는 천생 남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