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댄스를 미치게 하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리뷰난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이 뮤지컬을 영화계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뉴라인시네마, 저지필름스, 그리고 온갖 영화사의 직원들은 객석 또는 백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지켜봤다. 뉴라인시네마의 회장 로버트 셰인도 오리지널 캐스팅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오리진 오브 러브>가 흘러나오는 도중 옆자리에 앉은 관계자를 팔꿈치로 찌르며 “놀랍다”고 찬탄했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최고의 시나리오다. <록키 호러 픽처쇼>가 갔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뮤지컬의 영화화 판권이 뉴라인으로 간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영화제작은 전설적인 뉴욕의 인디영화 프로듀서 크리스틴 바숑의 킬러필름스가 맡았다. 제작사는 이 작품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미첼이 주연과 감독을 모두 맡길 원했지만, 영화연출엔 까막눈이었던 미첼은 부담 때문에 공동연출자 정도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99년 6월 선댄스재단에서 주최하는 ‘필름메이커스 랩’에서 테스트 촬영을 하던 중, 미첼은 “연기만 하는 건 따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연출도 맡겠다는 결심을 한다.
오리지널 캐스트와 분장을 맡은 마이크 포터 같은 오리지널 스탭들 대다수가 참여했고, 내용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가 수정됐다. 가장 큰 변화는 미첼이 ‘겸직’했던 토미 노시스 역을 다른 배우(마이클 피트)가 맡은 것. 영화에선 음악이나 코미디보다는 내러티브와 강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심한 미첼은 헤드윅과 토미가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을 실제로 보여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뮤지컬 팬들은 토미가 헤드윅의 상상 속 인물일 수 있다는 열린 구성이 사라진 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헤드윅과 토미가 마주하는 장면 등 후반부도 좀더 영화적으로 처리됐다. 하지만 미첼은 뮤지컬 팬들만을 위한 애교도 잊지 않았다. 당시 제인 스트릿 시어터에 걸려 있던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의 대형사진(리버뷰 호텔은 1912년 타이태닉호의 생존자들이 묵었던 곳)을 헤드윅의 공연장에 걸어놓았던 것은 그중 하나다.
<헤드윅>은 2000년 8월 제작비가 비교적 적게 드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촬영일정을 시작했다. 600만달러짜리 저예산 영화답게 스탭과 배우들은 트레일러에서 몸을 뉘어야 했으며, 시나리오에 있던 공항 라운지, 볼링장, 고속도로 등에서 공연을 벌이는 장면들도 삭제했다. 극중에서 헤드윅이 공연을 벌이는 장소인 빌지워터라는 가공의 식당 체인은 이곳의 한 식당을 빌려 촬영됐다. 영화 안에서 이 장소는 캔자스시티, 뉴욕 등지에 있는 각기 다른 식당처럼 보여야 했다. 결국 제작진은 이 식당 안에서 공연무대의 위치를 이리저리로 옮기며 다양한 조명과 미술 작업을 통해 관객을 ‘속이는’ 방법을 택했다.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라이브 음악을 녹음하는 것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라이브 음악을 녹음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관객에게 립싱크를 보이고 싶지 않았던 미첼은 라이브를 고집했다. 편법이 동원됐다. 미리 잘 녹음된 밴드의 연주에 맞춰 미첼만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영화에서 보이는 밴드의 연주 모습은 ‘할리우드 액션’이다). 또 트래스크는 관객에게 가사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박자를 조금 느리게 설정했다. 혼자서 연출과 연기를 해야 했던 미첼은 물론이고, 짧은 시간 동안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찍느라 모든 스탭과 배우가 피곤에 절어 지냈지만, 모든 남자 스탭과 배우가 여장을 하는 ‘드랙 데이’ 같은 기발한 이벤트를 열어 피로를 잊어가며 촬영기간을 버텨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영화의 첫 상영은 2001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이뤄졌다. 영화상영 직전까지 초긴장 상태였던 미첼은 영화가 끝난 뒤 터져나오는 환호를 듣고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미첼의 마음을 더욱 놓이게 한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해 냉담하기 그지없었던 부모의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그의 아버지 존은 어머니 조운과 함께 <헤드윅>의 록 콘서트장을 찾아 스티로폼 가발을 쓰고 즐겼을 정도였다. 폐막식장에서 관객상을 받은 미첼이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없어 여기서 200야드 떨어진 콘도에서 TV를 통해 이 시상식을 보고 있는 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린 것도 오랜 세월 끝에 부모와 진정한 화해를 이룬 데 대한 그의 기쁨의 표현이었으리라.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콘도에 있던 그의 부모는 잠시 뒤 감독상 수상자로 아들의 이름이 불리자 환호성을 치며 소파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선댄스 이후 <헤드윅>은 전세계 영화제의 단골 메뉴로 자리잡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날뛰게 했다. 선댄스와 베를린에 이어 <헤드윅>은 샌프란시코영화제에서 관객상과 LA평론가협회의 뉴제너레이션상을, 존 카메론 미첼은 시애틀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나도 헤드윅도 각각의 길로”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보이는 명랑쾌활엽기발랄 뮤지컬과 영화의 성공은 창조자 존 카메론 미첼에게 많은 것을 안겨줬다. 그는 헤드윅과 만나고 헤어짐으로써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나는 록스타를 연기함으로써 매춘부에서 연기자로 구원됐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Wig in a Box>의 가사처럼 “갑자기 무대와 영화의 펑크록 스타”가 된 미첼이 “(헤드윅 연기를 하기) 이전으로 절대로,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미첼은 헤드윅과의 이별을 오히려 시원하게 여긴다. “만약 내가 원한다면, 앞으로도 헤드윅을 나의 삶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루하다. 헤드윅은 지금 내 등에 붙은 원숭이다. 분명 그녀를 차버릴 것이며, 그러면 그녀는 스스로 일어나 걸어갈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다시 헤드윅으로 돌아갈 유일한 가능성은 세계 각지에서 열린 공연에 등장했던 20여명의 헤드윅들과 함께 금발 가발을 쓰고 함께 자선공연을 할 때뿐이다.
그렇다면 존 카메론 미첼과 헤드윅, 그리고 그 친구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그건 위안과 용기 아닐는지. 헤드윅이 완전히 벌거벗은 채 대로를 향해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당신의 모든 감정, 약점, 수치스런 부분까지 모두 세상에 보여줘라”는 미첼의 메시지를 수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콜라주처럼 온통 꿰매진”() 존재들은 “너는 네가 완전한 하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너는 가장 밝은 별처럼 빛나/ 한밤중에 흘러나오는 라디오 전파처럼… 손을 들어봐”()라는 헤드윅의 진실한 목소리를 따라 자신의 손이 자연스레 하늘로 향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
★영화에 등장하는 로지 오도넬 쇼 장면은 1999년 1월15일 실제로 미첼이 이 쇼에 출연했을 때의 모습이다. 오도넬이 들고 있던 CD는 오리지널 캐스팅 레코딩 음반이다. 1999년 1월치 <타임아웃 뉴욕>의 표지 또한 마찬가지다.
★ 헤드윅이 한국인 이혼녀들과 결성한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광희 역의 이숙인은 캐나다 밴쿠버의 밥스 유어 엉클이라는 밴드의 보컬로 활동했으며, 토론토의 ‘머치뮤직’이라는 프로그램에선 오랫동안 VJ로도 활동했다. 이숙인은 지난해 부산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한국계 캐나다 감독 헬렌 리의 <우양의 간계>에서 주인공 알레사 우 역을 맡았다.
★ 헤드윅이 토미와 함께 있을 때 옆 트레일러에서 <아이 얼웨이스 러브 유>를 열창했던 매기 무어는 <Hedwig and the Angry Inch>의 3번째와 4번째 뉴욕 공연에서 이츠학 역할을 맡았다.
★ 데이비드 보위는 어느 날 이 뮤지컬의 리허설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는 훗날 <헤드윅>의 포스터 사진을 찍은 전설적인 사진가 믹 록을 소개시켜줬다. 그는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 루 리드, 퀸, 블론디 등 거물 뮤지션의 음반 재킷과 공연 스틸을 담당해왔던 인물이다.
★ 록가수 미트 로프는 영화제작 소식을 듣고 첫곡인 <Tear Me Down>을 부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 뮤지컬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에는 공연 때 불려지지 않았던 <Random Number Generation>이 추가됐다. 트래스크는 노래 사이의 연결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미리엄 쇼어가 부르는 이 곡을 넣었다. 이 노래는 영화에서 헤드윅과 이츠학이 함께 있는 호텔 방의 TV에서 흘러나온다. 또 <Nailed>와 <In your Arms Tonight>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에는 수록됐지만, 영화에선 잘 들리지 않도록 처리됐다. <Long Grift>는 토미가 헤드윅을 껴안는 장면에서 “Look what you’ve done”이라는 첫 소절 가사만 등장한다.한편,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몇곡에는 미첼과 트래스크가 좋아하는 밴드인 허스커 두와 슈거 출신 기타리스트 밥 모울드가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