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싶을 만큼, 김윤진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쉬리> <단적비연수> 같은 영화의 당찬 여전사 이미지는 제쳐두고라도, 인터뷰에서 만났던 그는 언제나 사근사근하고 곧잘 웃는 인상이었는데. 어깨가 드러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새초롬하더니, <밀애>의 연인들처럼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비로소 웃는다. 얼굴을 맞대고, 손에 입맞추듯하면서 즉석에서 능청맞게 영화의 분위기를 살려내는 이종원의 연출에, 쿡쿡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진촬영을 위해 맞대고 선 등의 체온만큼 가깝게 다가왔지만, 엇갈린 시선처럼 처음부터 어긋난 관계. 변영주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밀애>는 겉잡을 수 없는 불륜의 사랑에 빠져드는 두 남녀에 대한 영화다. 남편의 외도를 안 뒤 지금껏 버텨온 삶의 균형을 잃어버린 주부 미흔과, 서로 사랑이 아닌 욕망을 나누는 애인이 되어 주자며 관계의 게임을 제안하는 인규. “처음에는 딱 이해가 안 되는 캐릭터였다. 나 같으면 이혼하고 혼자 살았을 것 같은데, 미흔은 어떻게든 흐름대로 살아보려고 하니까.” 전경린의 원작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먼저 읽었을 때부터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에 힘들었다는 김윤진은, 시나리오를 받은 뒤 8개월 동안 결정을 못 내리고 “도망다녔다”. 정사장면에 따르는 ‘벗는다’는 수식어도 부담스럽고, “이 여자의 삶을 몇달 동안이나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끈기있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하는 변영주 감독에 대한 신뢰에, 결국은 미흔이처럼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직진하는” 심정으로 <밀애>에 뛰어들었다.
여성 감독, 그것도 정신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변영주 감독에 신혜은 PD 등 여성들이 끌어가는 영화여선지 “심리적이고 지적인 여성영화일 것이란 말이 많은데”, 그가 보는 <밀애>는 “평범한 여자의 모험극”에 가깝다. “활력을 잃고 살아가는데, ‘괜찮아요’ 하는 낯선 남자의 한마디. 물론 괜찮지 않다. 아무도 자신의 무너진 감정을 책임져주지 않는데. 그래서 불륜에 빠지고, 잃어버린 육체, 존재감을 찾고… 예쁜 사랑은 아니다. 우아하지도, 감각적이지도 않고.” <밀애>를 찍으면서, 그는 촬영 내내 “극중에서 아픈 미흔이 귀신이 쓰인 것처럼” 자주 앓았다. 몸살 감기에 장염, 심지어 똑같은 밥을 먹어도 혼자만 탈이 나서 “아픈 연기”는 리허설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특히 신체 노출이 많은 정사장면은, 찍기 열흘 전부터 잠도 못 잤다고. 연기 자체보다는 여배우의 노출에 대한 민감한 반응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촬영 당일에는 3시간의 액션 리허설 끝에 오히려 담담하게 찍었지만, 옆에서 지켜본 매니저가 다시 노출이 많은 영화를 찍는다면 뜯어말리겠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역할을 느껴본 것도 처음”이라며,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게, 정말 할 만큼 했다”는 말에서 기운이 없어 보였던 이유를 짐작할 것도 같았다.
97년 <쉬리>의 첫 출발 이후 어느덧 5년째. <밀애>로 그는 올해 들어 벌써 세 번째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우직한 남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외사랑 좀 그만했으면 하던 “소원을 풀었다”고 웃는 <아이언 팜>의 활달한 여가수 지니, <예스터데이>의 범죄심리 수사관, 그리고 미흔. <단적비연수>와 일본영화 <도쿄 X 에로티카>까지 6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동안, 그의 얼굴은 점점 풍부한 표정을 띠고 있다. 숨가쁘게 달려온 올해를 <밀애>로 마무리하면서 당분간은 쉴 계획. 하지만 영화를 하면 할수록 “다음 작품이 소중해진다”는 마음이, 그를 오래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