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광복절 특사>의 배우 [1] - 차승원
2002-11-13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숟가락으로, 연기의 땅굴을 판다

차승원의 손은 얼굴을 배반한다. 끝이 뭉툭하게 마무리지어진 무심한 그의 손가락 위에는 짧고 작은 손톱이 씨눈처럼 박혀 있다. 짙은 눈썹 아래 자리잡은 강렬한 이목구비에 비하면, 그는 참 덤덤하고 꾸밈없는 손을 가졌다. 패션쇼 무대에서 내려와 처음 그가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차승원이란 배우의 조각 같은 얼굴과 몸에 눈길을 빼앗긴 채, 차마 그의 손을 내려다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그 소박한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휴, 왜들 이러시나, 나 그런 눈으로 볼 사람이 아니에요.”

대학교 1학년 때 결혼해 이미 초등학교에 다닐 만큼 장성한 아들이 있는 유부남에, 설경구의 표현대로, “받아치는 데 있어서는 대한민국 1인자”라는 순발력 있는 말솜씨를 선보이며 서서히 얼굴을 알려나간 그는 여성 판타지의 제물로 바쳐지고, 이내 휘발되어버리는 여느 모델 출신의 남자배우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초반 몇몇 드라마와 영화에선 ‘잘생기고 돈 많은 왕자님’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카리스마’나 ‘미남배우’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고 나르시즘을 양분삼아 살아갈 종족이 아니었다. 뻔뻔하고 냉소적인 대학강사(<세기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기며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연쇄방화범(<리베라 메>), 깡패보다 더 단순무식한 체육선생(<신라의 달밤>) , 라이터 하나에 체면구기는 짓도 서슴지 않는 가난한 조폭 두목(<라이터를 켜라>) , 최근엔 왜 탈옥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6년간 오로지 땅굴만 파온 멍한 죄수(<광복절특사>)와 촌지에 미친 부정한 교사(<선생 김봉두>)까지. 그렇게 차승원은 작정하고 진지하지도, 의도하고 망가지지도 않는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며 한국영화판에 자신만의 영역을 표시해나가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꽃미남’ 곁엔 아리따운 여배우들이 서야 한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상하게 차승원 옆에는 어떤 여배우를 세워놓아도 쉽게 매치되지 않는다. 그에겐 고소영보다는 이성재가, 김혜수보다는 김승우가, 심은하보다는 설경구가 더 어울리는 것이다. “원래 불편한 짓을 잘 못하거든요. 말을 툭툭 내뱉는 편인데 여배우들은 혹시 맘 상할까봐 조심스럽고, 그래서 자꾸 남자영화만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이런 성격 탓인지 그의 필모그래피엔 그 흔한 눈물나는 멜로영화가 한편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코미디만 하기로 작정했냐, 고 하는데 꼭 계속 코미디만 해야지, 하고 영화를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특별히 장르 구분을 하는 편도 아니고. 그런데 닭살스런 멜로는 성격상 못하고 하염없이 무겁기만 한 영화도 싫어요. 무겁더라도 그 안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는 영화가 좋은데… 그런 영화가 어디 흔한가 또 스탠더드한 연기를 원하는 영화는 잘 안 끌리고 잘 안 맞아요. 아마 지금 찍고 있는 <선생 김봉두>가 가장 스탠더드한 영화가 될 거예요. 촌지 밝히는 악덕 교사였다가 강원도 분교로 쫓겨난 뒤 아이들 속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역할인데 제가 여배우들은 몰라도 애들은 좀 자신있죠. 왜냐면 그 또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이들과 어떤 식으로 대화하는지 아는 사람이니까.” (웃음)

“요즘 느끼는 건 이런 거예요. 연기는 디테일과의 싸움 같다는 거죠. 때론 머리는 이게 아닌데 하는 연기를, 몸과 얼굴은 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머리가 생각한 대로 정확히 내 얼굴과 내 몸이 따라움직이는 상태에 도달하려면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경험해야 하는 것 같아요.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한 거죠. 그렇다고 경험합네 하고 일 놓고 쉬긴 싫어요. 우리 같은 사람 3일만 현장 안 나가면 몸이 근질근질하잖아요. 이거 말고 뭐 잘하는 게 있나, 취미가 있나. 그러니 그냥 쭉 열심히!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하는 수밖에 없죠. 뭐.” <홀리데이 인 서울>을 통해 처음 얼굴을 비춘 것이 97년이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라면회사 사장으로 등장한 것이 그 다음해, 그러고보니 지난 6년간, 그 역시 <광복절특사>의 무석처럼 이 끝도 보이지 않는 땅굴을 파고 있었던 셈이다. “연기란 거, 이제 오랫동안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져요. 사실 아직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래서 정답 찾아 계속 가는 거예요. 물론 정답이란 게 쉽게 찾을 수도 없고, 쉽게 찾아서도 안 되는 거겠지만….” 혹, 지금 파고 있는 땅굴에 끝이 없다 해도, 때론 길을 잘못들어 진흙더미가 쏟아진다 해도, 그는 별로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무심한 손에는 천년을 파도 절대 부러지지 않을, ‘배우의 한길’을 향한 초강력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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