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의 눈은 입을 배신한다. “미친… 병신….” 툭툭 욕도 잘 내뱉는데다, 어지간해서 닭살돋는 칭찬도 잘 안 하는 설경구의 입. 그러나 그런 입에서 10c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눈에 이르면 그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오아시스>에서 소아마비 장애인 연기를 하겠다고 나선 문소리를 향해 “이 바보 같은 게 미쳤다고 몸 뒤틀고 그런 걸 하냐”며 핀잔을 줄 때도, 그의 눈만큼은 힘들고 고된 연기를 앞둔 후배를 향한 따뜻하고 애틋한 심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설경구는 심술맞은 말 속에 자신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이내 순수한 속을 들켜버리고 마는 열세살 사춘기 소년 같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과 동기로 처음 만났던 김상진 감독과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설경구가 2학년 때 군대를 가버렸으니 친해질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에 김 감독은 “메이저 흥행감독”으로 자신은 “마이너 배우”로 살아갔으니 영영 못 만날 팔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하지도 않던 무석과 재필이 함께 땅굴을 파고 나와야 하는 운명의 덫에 걸린 것처럼, 김상진 감독과 설경구 역시 <광복절특사>라는 굴을 함께 파나가는 운명 안에서 만났다. “김상진 감독요 ‘유쾌, 상쾌, 통쾌’죠. 현장이란 데가 참 날카로운 곳인데 늘 기분좋게 만들어주니까 아무 문제없이 작업했어요. 그런데 처음엔 모두들 나하고 김상진 감독은 안 맞는다고 말렸어요. 차승원하고도 안 섞일까봐 걱정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그때 차승원이 “내가 스포츠지 연예면이면 경구형은 조선일보 사설이잖아, 난 형이 집에서 면벽수도하고 밖에도 잘 안 나가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라며 끼어든다.) 그런데 그게 다 그냥 보여지는 내 이미지만 보고 그런 거라구요. 감독 스타일은 있어도 배우 스타일은 없다고 봐요. 감독은 몰라도 배우라는 사람들은 모든 상황에 맞추면서 가야 하거든요. ”
모름지기 탈옥영화는 많았지만 도로 기어들어가는 영화는 없지 않았던가. “모든 상황을 살짝 틀어준 코미디라서 좋았어요. 처음에 김상진 감독이 ‘감방 살던 애들이 있는데 죽기살기로 벽 파서 나왔어. 근데 특사래. 다시 들어가야지 어떻게 해…’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하는데 그냥 듣는 순간 웃기더라구. 사실 6년 동안 숟가락으로 굴을 판다는 것이나, 남자 노래 한 자락 듣고 결혼하겠다는 여자나, 따지고들자면 한 장면도 현실적인 것이 없지만, 결국 영화가 할 수 있는 게 그런 게 아닌가요 영화보면서 저런 게 어딨어 하지만 세상엔 영화보다 이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건 신파야라고 쉽게 말하지만 알고보면 세상이 다 신파야.”
김 감독은 설경구에게 시나리오를 주면서 재필과 무석 중에 아무 역이나 골라보라고 했다. “사람들한테 물었어요. 차승원하고 나하고 누가 애인이 있어 보이냐고. 모두 차승원이래, 그래서 내가 애인있는 재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공공의 적> 때도 내가 범인 같고 이성재씨가 형사 같아 보인다고 해서 내가 형사했잖아요. 아마 이 영화를 하겠다고 한 것도 김상진 감독하고 나하고 안 어울린다고 해서였는지도 몰라요.” (웃음)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나란 인간 자체가 연기에 맞지 않는 사람인데 체질에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고…. 그런데 이상한 건 체질엔 안 맞는데도 이게 좋아요. 술이 체질에 안 맞아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게다가 좋아하는 놀이를 하는데 돈도 주니까 더 좋죠. 집에서도 그래요. 뭐 하나 꾸준히 오래 하는 꼴을 못 봤는데, 이거 하나는 오래 한다고, 그냥 그렇게 살라는 팔잔가봐.” <공공의 적> <오아시스>에 이어 <광복절특사>까지 지난 1년간 바쁘게 ‘놀았던’ 그는 벌써 다음 관광지인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행 티켓을 예약해놓았다. “이창동 감독한테는 얼마 전 ‘시놉시스 안 줘요’ 물어봤는데 ‘나와야 주지’ 그러던데요. 뭐, 늘 그런 사람이니까 때 되면 그냥 가줘야지 뭐.” 이미지를 계산하고 머리 싸매고 캐릭터를 분석하기보다는, 늘 어떤 역할이 오든지 그냥 옷처럼 입어버리는, 그리고 결국엔 그 옷에 자신의 몸을 맞추어버리고 마는 배우 설경구. 그는 그 어떤 신통방통한 의원들도 바꾸기 힘들다는 체질을, 자신만의 처방전에 따라 스스로 바꿔나가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