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박중훈이 안성기에게 털어놓은 할리우드의 진실 [1]
2003-01-11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작품이 변해야 한다,그래야 배우가 늙지 않는다

<찰리의 진실>은 박중훈의 할리우드 메이저영화 데뷔작이다. 지난해 12월27일 명보극장에서 열린 이 영화 시사회장에, 많은 충무로 제작자와 배우들이 참석했다. 그중 박중훈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마음을 졸였던 이들을 순서대로 꼽는다면 안성기는 최소한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것 같다.

둘은 이틀에 한번꼴로 통화하고, 못해도 일주일에 한번은 만난다. 수시로 함께 골프치러 가고, 영화계 안팎의 경조사나 각종 영화제에 함께 참석한다. 집이 가까워 박중훈이 가는 길에 안성기를 ‘모시고’ 간다. 연말연시에도 두집 식구가 용평에서 만나 와인을 한잔 했다. 50대 초반과 30대 후반의 둘은 14살 터울이지만 연기생활이 각각 45년, 18년에 이르다보니 더 감출 것도 없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됐다.

누구다 알다시피 안성기는 80년대 내내 독보적인 한국영화의 주연배우였고, 그뒤 5년 남짓 같은 자리를 박중훈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영예의 부침을 피하기란 힘들었다. 90년대 후반 안성기에게는 주연 대신 조연의 시나리오가 들어왔고, 박중훈은 잇단 흥행실패를 맞았다. 안성기가 영화제 조연상을 기꺼이 받는 쪽으로 방향을 틀 때, 박중훈은 할리우드로 갔다.

박중훈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온 첫 번째 결과물 <찰리의 진실>을 계기로 두 사람이 만났다. 함께 대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영화를 본 안성기의 소감에서부터 박중훈의 촬영 에피소드, 각자의 스타일과 노선 차이를 거쳐 서로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웃음이 터져나오는 동안에도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발언수위의 익숙한 조절, 솔직함과 조심스러움의 절묘한 안배는 둘의 우애뿐 아니라 둘 모두 아직은 회고담을 펼쳐놓을 때가 아닌, 여전히 쟁쟁한 스타임을 확인하게 해줬다.

<찰리의 진실> 사실은 ‥‥

안성기 | <찰리의 진실>의 원작인 <샤레이드>가, 내가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본 영화 같은데 워낙 좋게 봤거든. 오드리 헵번이 최고로 아름답고 매력적일 때, 캐리 그랜트라는 역시 매력적인 배우가 함께 나왔고. <찰리…>는 조너선 드미 감독의 특이한 연출로 다른 것이 보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여배우 탠디 뉴튼하고 남자 마크 월버그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매력이 좀 덜하지 않았나 싶은 게 제일 아쉬워. 이왕 박중훈씨가 나가는 마당에 전체적인 느낌이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이 영화의 가장 큰 의미는 영화 자체에서 찾기보다, 처음으로 우리 배우가 그쪽 메인 스트림에 들어갔다는 데에 두고 싶어. 여기서 정상에 있던 배우가 그 쪽에 합류한 첫 케이스이기 때문에, 특히 연기하는 후배들에게는.

박중훈 | 드미가 찍은 영화가 전세계에 알려진 건 두편이거든요. <양들의 침묵>과 <필라델피아>. 그런데 이 사람이 원래 굉장히 비할리우드적으로, 비주류적으로 영화를 찍어왔어요. 이 영화도 비주류 스타일로 찍은 거죠. 이 사람이 또 굉장히 지성인이거든요. 나쁜 수구에 대한 저항감 같은 게 있어요. 그리고 비폭력적이고, 반인종차별주의자고.

안 | 그래서 캐스팅도 다인종적으로 했구나.

박 | 원래는 윌 스미스하고 탠디 뉴튼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윌 스미스가 <알리> 때문에 스케줄이 안 맞으니까, 마크 월버그를 캐스팅한 거죠. 마크 월버그가 미국에서 어떤 이미지냐 하면, 아주 양아치 같은 이미지거든요. 드미는 그 이미지를 이용해 이 영화를 거리의 영화로 찍으려고 했던 거예요. 돌이켜보면 맷 데이먼과 기네스 팰트로 같은 배우가 나오는 웰 메이드 영화에 나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은 하죠.

안 | 나도 사실은 그게 맞다고 봐.

박 | 그런데 뒤집으면요, 댄디 뉴튼하고 윌 스미스를 쓰려고 했던 감독이기 때문에 나도 쓴 거예요. 기네스 팰트로하고 맷 데이먼을 썼더라면 나는 캐스팅이 안 됐을 거예요. 코리아 배우를 캐스팅한 건, 비하하면 이라크 배우를 캐스팅한 거나 같은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하는데 한 기자가 ‘악의 축’에서 왔는데 부시의 외교정책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더라고요. 그 기자도 부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남한과 북한을 제대로 구별 안 하는 거죠. 한국에 대한 인식이 그런데 드미가 나를 캐스팅한 건 그가 그만큼 진보적이었던 이유도 있는 거죠.

안 | 박중훈씨 같으면 할리우드에 진출한 신인의 불리함이 있는데, 박중훈의 역할이 쭉 따라가주지 않고, 단절시키잖아. 박중훈씨를 쳐다보는 우리 쪽에서는 따라가기가 조금 힘든 거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배우니까. 조금 더 연결돼서 그 감정이 영화적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싶은 거지. 하지만 박중훈씨 연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좋았다고 생각을 하고. 하여튼, 드라마쪽에서 아쉬움이 좀 있어. 파리 풍경은 연출이 참 잘됐는데.

박 | 한국에서는 여러 아쉬워하는 의견들이 있는데, 이건 과장이 아니고 미국에서는 테스트 스크리닝을 20번 했는데, 단 한 번도 예외없이 50%도 넘게 가장 임프레시브한 액터로 제가 뽑혔어요. 자화자찬을 하자면, 사실은 미국쪽에서는 아주 성공적인 아시아 신인 배우로 데뷔를 한 거 같아요. 하지만 더 관심이 가는 건 한국 관객의 반응이죠.

안 | 당연하지, 자기가 발붙이고 사는 땅이고, 또 여태까지 쭉 봐왔던 관객이니까.

박 | 명보극장 시사회에서 영화보는데 아주 죽겠더라구요. 나 좀 나왔으면 좋겠다. 제일 답답했을 때가, 엘리베이터에서 죽은 걸로 되었다가, 다시 빗속에 나타나기 직전까지가 제일 괴로웠어요. 그 사이에 ‘짜식 그거 하나 한다고 신문에 내고 그랬나’ 하면서 실망하는 말이 나올까봐. 다시 나오기까지가 10분 정도 되는데, 100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안 선배가 말씀은 잘 안 하시지만,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나 하는 애정 섞인 걱정 하시는 거 알 거든요. 그런데 이렇게라도 일단 시작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영화가 지난해 3월에 개봉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미뤄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한국영화에 출연을 못하게 된 거죠. 이제는 좋은 작품 있으면 해야죠.

`잔인한` 할리우드

안 | 일본영화 <잠자는 남자>에 출연할 때 내 심정도 비슷한 데가 좀 있었어. 오구리 고헤이 감독이 하자고 해서 좋다 싶었는데, 영화 속에서 내가 누워만 있잖아.(웃음) 한국에서 신인 배우도 아니고, 일본영화 나간다고 신문에 났는데, 이거 용두사미로 보일까봐 맘고생 많이 했지. 나름대로 누워만 있으면서도 조금씩 움직이자, 실제 식물인간 만나보니까 그렇더라고. 그래서 오구리 감독하고 한참 상의하고, 움직이고….

박 | 사실 촬영 때 화병 비슷한 게 나더라구요. 첫날 나한테 핸드헬드에 대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감독도 아닌 오퍼레이터가.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할리우드 스타들은 개봉 직전까지 계약서에 사인을 안 한대요. 나도 처음 들었어요. 만약 영화사가 마음에 안 들면, “나 사인 안 했다, 고소하겠다” 이렇게 되는 거죠. 사인을 안 해주고 출연을 하니까 영화사쪽에선 스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나는 반대로 영화사에서 사인을 안 해준 거야.(웃음) 언제든지 자르려고. 그걸 모르고 내가 내 매니저한테 왜 사인을 안 해주냐고 물었더니 매니저가 보통 할리우드는 그런다는 거예요. 그 말은 맞죠. 그러나 내용은 다른 거죠. 첫날 찍은 게 여주인공이 남편 죽은 걸 알고 시장 달려갈 때 내가 옆으로 지나가는 장면인데, 바스트 위가 화면에 차는 순간에 우산을 폈어요. 편집하는 애들이 와서, “와, 너 정확한 타임에 우산을 폈다,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러는 거예요. 나는 다 계산해서 알고 폈는데.(웃음) 죽겠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제 습관이 눈을 보고 말하는 건데, 드미가 긴장하냐고 묻는 거예요. 하여튼 뭘 해도 쌈마이 취급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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