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동은 내가 좋아하는 남성상”
차승원은 자신의 얼굴과 표정과 몸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면서 뒤집힘의 전략과 설정을 강화하고, 또 따라갔다. 차승원이 맡는 캐릭터에는 점점 더 인간적인 빈틈과 허술함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시나리오에서 제일 첫 번째로 보는 점, “정말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서 더없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멜로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단선이잖아요. 여자한테 너무너무 헌신적인 사랑을 하고, 누굴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런다는 게… 좀. 다른 드라마에 그게 끼어 있으면 모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멜로인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아요. 안 하는 건 사실 저 반 남의 반 그런 거 같은데요. 내가 생각하는 멜로는 그런 게 아니니까. 아마 선생 김봉두가 결정타일 거예요. 아, 얘는 다시는 여자하고는 안 하겠구나….” (웃음) 이것이 바로 차승원이 생각하는 멜로드라마며, 그가 멜로드라마를 하지 않는 이유이다(물론 그 정의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주구장창 악한 놈, 주구장창 멋있는 놈”은 재미도 없고, 하지도 않겠다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이라면 절대로 안 한다는 그의 말을 우리는 캐릭터가 갖는 빈틈과 허술함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 고등학교 시절 잘 나가던 학교 짱은 ‘어쩌다’ 선생이 될 수도 있고, 그 선생은 단순 무식하기 그지없을 수도 있다. 또는 국회의원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열차에 올라 탄 ‘불쌍한’ 깡패에게도 가족은 있다. 집에서는 가족이 기다리고, 아내는 신경질을 부린다. 어서 빨리 돈을 받아 퇴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사실 이 설정은 차승원이 장항준 감독에게 제안하여 영화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광복절 특사를 참지 못하고 탈옥한 죄수는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감옥으로 되돌아가야만 하기도 한다. 차승원은 이들이 모두 어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그가 이해하는 세상의 리얼리티다.
“네 식대로 해라, 그랬어요. 자기 편한 대로…. 기분 좋으면 좋은 대로 기분 나쁘면 나쁜 대로. 사실 후반부신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아들 때문에 학교도 많이 찾아가봤더라구요. 이것저것 잘 알고. 다른 영화들은 그 상황에 맞게 갔잖아요. 근데 이 영화는 차승원의 원래 성격에 맞게 가려고 애썼어요. 원래 차승원씨가 기복도 심하고, 금방 삐쳤다가 또 풀렸다가 그러거든요. 김봉두하고 비슷해요. 촬영장에서 별명이 ‘차기복’이었거든요.”(<선생 김봉두>의 장규성 감독 인터뷰 중)
인터뷰 도중, 잠시의 침묵을 이용해 차승원이 던진 질문은 두 가지였다. “보기에 많이 다르던가요?” “어때요, 보기에 편하시던가요?” 그러니까, 그가 <선생 김봉두>의 개봉을 앞두고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달라보일까와 얼마나 편해 보일까이다. 이전의 코미디 세편 다 박정우 작가가 썼고, 그중 두편이 김상진 감독의 연출이었기 때문에 “신이 아닌 이상 <신라의 달밤>이나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는 동일선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차승원이 장규성 감독의 <선생 김봉두>를 통해 시도해본 것은 연기의 “신선함”이었다. “현장에 있는 스탭들조차 내가 뭘 할까 기대하게 하는 그 카타르시스”를 이 영화의 관객이 느낄 수 있을지 그는 궁금해하고 있었다.
<선생 김봉두>에서 코믹+감성 연기
서울의 초등학교 부패교사가 시골 오지의 분교에서 도덕을 되찾아간다는 <선생 김봉두>는 차승원의 코믹연기로 전반부를 이끌어간다. 그는 이 영화에서 더이상 ‘투톱’ 중 하나로 등장하지 않으며, 혼자 모든 감정의 수위를 쥐락펴락하는 거의 일인극에 가까운 역에 도전하고 있다. “혼자 기승전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둔탁하고 단단한 최기동, 양철곤, 최무석의 캐릭터와는 또 다른” 역에 도전하는 즐거움도 있었던 것이다. 그 신선함을 다르게 봐주기를 바라고 있는 반면, 여전히 자신의 캐릭터를 ‘편안하게’ 봐주기도 바라고 있다. 말하자면 선생 김봉두는 기동과 철곤과 무석의 내면에 녹아 있는 허술한 인간미를 스토리로 펼쳐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이전의 코믹 인물들의 다른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가 담고 있는 감성적인 코드들이 전반부의 코믹한 요소들과 조화롭게 자리잡기를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차승원은 코믹함에서 슬픈 감성으로 전환하는 영화의 그 길목마다 자신의 연기가 길 안내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배우가 코미디를 하다가 정극을 하면 흡수가 잘 안 되는 배우가 있고, 부담스러운 배우들이 있잖아요. <광복절 특사>를 보고 나서 이걸 보면 이해가 잘될까 하는 거죠. 하지만 제가 해야 되는 부분은 다 했다고 봐요.”
김상진 감독이 <신라의 달밤>의 최기동을 실제 차승원의 모습 속에서 뽑아내듯, 장규성 감독은 <선생 김봉두>의 밉살스럽지 않은 악역을 그의 실제 성격 속에서 읽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상황에 치중하는 캐릭터코미디의 인물들과 그 인물들의 과장성을 “듬성듬성 잘라내어” 새롭게 인물화한 김봉두에게서 인간 차승원의 모습이 동시에 전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 영화에서의 달라짐과 편안함의 물음에 대한 대답의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신뢰나 믿음이 없으면 한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일인 거 같아요. 제 자신에 대한 믿음감이라는 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열심히 열정적으로 한다는 부분이죠. 그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거 같아요. 그게 절 버티게 하는 힘인 거 같아요.” 아마도 그건 자신에 대한 믿음일 뿐 아니라 차승원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믿음일 수도 있다.
<선생 김봉두>의 감독과 프로듀서가 본 차승원
“생활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찾는 사람”
차승원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역시 <선생 김봉두>의 장규성 감독과 손세훈 프로듀서의 ‘증언’을 들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선생 김봉두>의 시나리오를 마친 장규성 감독의 머릿속에 떠오른 배우는 영락없이 차승원이었다. 촌지에 목숨을 거는 “약삭빠른” 선생이지만, 그는 결코 “악하지 않고 귀여운 인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장규성 감독은 차승원을 믿었다. 차승원이 김봉두 역을 맡으면서, 애초 시골 분교의 “담백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로 구상했던 이 시나리오가 김봉두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비중을 높여간 것도 그 때문이다.
손세훈 프로듀서 역시 조심스럽게 말한다. “차승원에 대한 코믹배우로서의 이미지, 그 점을 역으로 사용했다고 본다. 차승원의 가능성을 봤고, 믿음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의 코믹 캐릭터가 주는 선입견이 이 영화의 후반부의 감성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승원은 제작진이 이 영화의 ‘슬픈’ 백미로 꼽고 있는 장례식장 장면과 폐교를 앞둔 졸업식 장면에서 “대단히 만족할 만큼” 감정들을 잡아냈다. 차승원은 실제로 병환으로 돌아가셨던 아버지의 기억을 되새기며 열 시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같은 톤의 감정을 유지해 스탭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두 자녀를 두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분교 아이들의 멋진 선생이 되기에도 “모자람이 없었다”고 한다(그는 이 영화의 촬영 중에 둘째아이의 출산이라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니까).
차승원은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촬영장에서도 밉살스럽지 않은 김봉두였다. 촬영장에 늦게 나타난 차승원에게 “삐쳐 있는 감독님”을 앞에 두고, 차승원은 말 그대로 “와아” 하면서 촬영장 분위기를 업시키면서 감독의 화를 애교있게 풀어주었다. 때로는 영화의 인물심리를 두고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시골에 내려가 아이들과 상대할 때 차승원은 좀더 부드럽게 가기를 원했고, 나는 좀더 짜증나게 가기를 원했어요. 처음에는 의아해하더라구요. 나중에 편집본을 보고 나서 수긍을 했어요.” 아이들을 상대하는 그의 마음이 각별했기 때문일까?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고기를 잡는 신을 촬영 중이었다. 감독의 컷 소리가 나기 무섭게 차승원은 두 아이를 번쩍 들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 밖에 있는 따뜻한 텐트 안에 아이들을 넣어주고는 자신은 담요 한장으로 추위를 모면했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입을 모아 <선생 김봉두>에서의 차승원의 연기에 대만족을 표시한다. “기본적으로 영화적인 인물이며, 다분히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장규성 감독의 봉두에 대한 정의를 차승원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생활을 덧붙여가면서 이해했다. 손세훈 프로듀서의 말처럼 “현장을 편하게 해주고 감독 및 스탭과 많은 얘기를 하는 배우이고, 작품안에 매진하는 배우”라는 영화 안과 밖 모두에서의 행동이 사람들 사이의 인정을 끌어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