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 보이나요? 여전히 웃기고요? 그럼 됐군요."
부패 교사 ‘김봉두’가 온다. <신라의 달밤>으로 일약 코믹 캐릭터의 중심으로 도약한 차승원은 <라이터를 켜라>와 <광복절특사>에까지 그 이미지를 밀어붙였다. 차승원의 입장에서 보면 ‘삼부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의 코믹한 캐릭터가 짙어질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선생 김봉두>는 조심스럽게 전환을 모색하는 차승원의 행보가 보인다. 차승원은 결코 화려한 연기 인생을 살아온 노배우가 아니다. 약력을 펼쳐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흔치 않은 출구를 통해 배우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가 살아온 ‘또 다른 나’, 영화 속 캐릭터를 따라가며 그를 물어본다.
“리딩할 때부터 열심이더니 차승원은 갈수록 에너지를 쏟아낸다. 처음 만난 날이었던가. 문어체 대사를 원래 싫어하니까 그냥 쉽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가도 좋다고 했더니 그는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서 시나리오를 고쳐왔다. 고3 수험생처럼 그는 시나리오를 무슨 글씨인지 모를 정도로 새까만 뭉치로 만들어왔다. 그런 그가 요즘은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내놓느라 골몰하고 있다."("<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이 쓴 눈물나는 제작일지". 씨네 21. 361호. 장항준)
“제가 워낙 소심해서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가 관여 안 하면 안 되는 거. 편집실에 가본다든가 포스터를 찍었는데 어떻게 됐나, 이런 거. 개인적으로 바쁜 거죠. 남들은 남는 시간에 쉬면 되지 왜 그러냐 그러는데 제가 못 견디거든요. 거의 뭐 2월 중순까지는 못 쉬었어요. 이제 조금 쉬는 거죠. 근데 쉬는 게 여유롭지가 않아요. 마음은 오히려 찍을 때보다 더 불편하고 안절부절하고. 모든 배우들이 다 그렇지 않나요?” 틀린 말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모든 배우들이 다 그렇다. <선생 김봉두>의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는 ‘배우’ 차승원은 모든 배우들이 그렇듯 긴장으로 얼룩진 기다림의 시간을 지내고 있다. “에이 차승원 스토리는 무슨, 설경구 스토리라면 모를까”라고 너스레를 떨긴 했어도, 그는 이제 배우에게 너그러운 휴식이란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었다. 만약 차승원이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고민하지 않고, “소모품”의 용도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수려한 외모만이 배우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 말은 정말 우습고 진부하고 가식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차승원은 이미 많은 고민과 그 안에서의 몇 가지 해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승원의 말처럼 그는 이미 한 분야에서 “일등을 해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등을 해본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도 일등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흔치 않은지는 스스로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보통의 경우들이 그렇잖아요. 그 당시의 이슈가 될 만한 남자들을 끌어다가 잘못된 용도로 쓰죠. 그리고는 얘는 별로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애, 라고 하죠. 그중에 하나였죠. 소모품이 돼버린 많은 사람들의 전철을 밟아왔던 거죠.” 차승원은 그렇게 영화를 시작했고, 또 동일한 이유로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왔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기 싫어한다. 자멸의 시간을 앞당겨 간단하게 폐기처분당할 수도 있었던 궤적을 그는 한마디로 일축한다. “내가 아닌 내가 나오니까 너무 싫었어요. 그건 제가 아니잖아요. 남들에 의해서 그렇게 만들어지고 포장된 거니까.” 그는 99년 말부터 텔레비전 출연을 그만뒀다. 암담했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내 안에는 다른 사람이 있단 말이지”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여전히 지금도 “그렇게, 그렇게 방송을 해왔을 거고, 흘러갔을”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그 다른 자아를 “꼭 한번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영화의 길이 트인” 것이다.
“내가 아닌 나는 너무 싫다”
그러나 그가 “어차피 산업”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처럼, 영화 역시 처음부터 그에게 자신 속의 다른 자아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지는 않았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그의 첫 등장을 기억해보자. 호텔 909호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문 밖에 서 있는 벨보이를 향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없이 느끼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뭐지~?” 차승원이 영화에서 말한 첫 번째 대사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의 차승원은 영화 시작 30분이 지나면 죽어 잊혀지는 인물이었고, ‘완벽한 다리’의 스쳐가는 애인일 뿐이었다. 전직과 외모 탓인지 차승원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배우로서 그의 용도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저를 보면 고생도 안 하고 나름대로 순탄하게 살아온 것 같다고 얘기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거든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그는 라면회사 사장이라는 지위를 얻어 상류층으로 등장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약간은 치사한 사장님께서 여배우를 앞에 두고 장황하게 라면광고를 설명하며 하는 말. “너 라면 먹고 싶다!” 대사 속에 드러나는 중의적인 농담이 차승원의 이미지에 처음으로 균열을 낸다. 그러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인물 역시 스스로의 자평에 의하면 그와는 “일치하는 면이 거의” 없었다.
<리베라 메>에서 차승원은 어릴 적 트라우마로 연쇄방화를 일으키는 정신질환성 범죄자를 연기했다. “일단 비주얼로 센 걸 하면 50%는 관객에게 흡수가 빠르다는 걸”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인지도 모를 그 역은 새로운 도전인 셈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은 그런 걸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장르로 말하면 스릴러가 가장 적당할 것 같다”는 말이 <리베라 메>에서의 희수를 자꾸만 상기시킨다. 그만큼의 아쉬움이 그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오히려 <리베라 메>에서의 연쇄방화범을 맡기까지 차승원에게는 중요한 하나의 성격이 지속적으로 부여된다. ‘바람둥이.’ 영화 <자귀모>에서 그는 자살한 귀신들의 모임의 일원이 되도록 애인을 내팽개치는 몰염치한 바람둥이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신혼여행>에서는 끝내 그 바람둥이의 최후로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명백하게 이 두 작품 모두 배우 차승원에게는 단 한 걸음의 전진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조각 같은 외모가 이끄는 당연한 부정성으로 휩쓸리고 있었다. <세기말>에서 보여준 그의 모럴 헤저드한 면모가 단순한 방식으로 성격화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 <세기말>은 차승원에게 무척 중요한 영화로 남는다. <세기말>에서 처음으로 차승원이라는 배우에 대해 묘한 느낌을 받았다는 말에 그는 “<세기말>은 저하고 가까운 부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 경우는 그 사람이 충분히 이해가 되겠어요.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못 들어가고, 그래서 욕하고, 그런 게 이해가 돼요”라며 동의를 표시한다. <세기말>에서 차승원이 연기하는 대학강사 부분의 소제목은 ‘모럴 헤저드’였다. 이성복의 시와 루카치의 문장을 비틀어 인용하며 세상을 질타할 줄 아는 지식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한낮에 다른 여자와 여관방을 찾아 “영혼을 잃어버리는”, 그리고 그외에도 몇명의 애인을 더 두어 결국 간통죄로 인생을 접어가는 유부남을 연기하며 차승원은 처음으로 입방체의 성격을 드러낸다. 여관방에서 나와 차에 붙어 있는 불법주차 딱지를 떼며 “이런 씨발 새끼들”이라고 욕할 때의 그 대학강사의 무식한 표정과 액션은 영락없이 최기동과 양철곤과 최무석을 연기할 때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차승원을 알게 된 건 꽤 오래 전 일이다. 그간 술도 같이 먹고 어울리면서 <신라의 달밤>의 ‘최기동’ 이미지를 많이 봤다. 시나리오를 받아 본 차승원이 ‘이건 날 위해 쓴 시나리오’라는 말을 했는데 조금 오버이긴 해도 차승원의 실제 모습과 굉장히 닮은 인물이다. 기동이로 변신한 게 아니라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편했다. ”("쌈마이?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는 거다". 씨네 21. 311호, 김상진)
“저를 잘 써먹은 거죠. 제가 갖고 있는 부분을. 평상시의 차승원을 써먹은 거예요. 지금도 가끔 얘기하는데, 차승원이 이런 걸 누가 알까, 이런 말들을 하거든요. 저한테 그런 게 있기 때문에 쓴 거죠. 없는 거 자꾸 꺼집어내려는 거 억지잖아요.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게 그런 거예요.” 어떻게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코미디 연기를 하게 된 것 같으냐는 질문에 차승원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람을 알아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강조해서 덧붙였다(차승원을 알 만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지적한 문구와 말들을 여기에 달아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라의 달밤>의 “최기동 같은 경우는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남성상이에요. 왜 고등학교 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언행을 따라 하잖아요. 내가 좋아하는 그런 유의 남자예요. 그런 남자가 나는 매력이 있어 보이고 굉장히 투박하고 둔탁해 보이지만 또 따뜻한 마음도 있고요.” 깡패 같은 체육선생으로, 더 깡패 같은 짓을 해가면서, 정말 “어딘가에 꼭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연기하면서 차승원은 기존의 자신이 갖고 있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었다. 촌티나는 체육복 안에 잘 빠진 몸을 숨기고, 공중을 날아 헛발차기를 하면서 웃음을 자아냈다. 이때부터 차승원은 과장된 코미디 캐릭터 연기라면 누구와도 경쟁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섰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움을 심어줬다. 최기동의 캐릭터를 영화배우 차승원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신라의 달밤>에서 최기동을 연기하는 차승원의 모습은 <라이터를 켜라>의 양철곤과 <광복절 특사>의 최무석에까지 이르러 숙련된 자기만의 스타일을 세워놓은 것이다. <신라의 달밤>에서 마주친 최기동이 차승원 그 자신에게 또 다른 자신으로의 표출이었다면, 관객에게 최기동은 차승원이 연기하기 때문에 더 놀랍고 새로운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어진 양철곤과 최무석은 그 놀라움을 불식시키는 명료한 확인작업이었으며 수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