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은 열두살 때 이미 한번 홍콩을 떠난 적이 있었다. 열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윌리엄 홀든과 앨프리드 히치콕을 위해 옷을 만들었던 재단사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 없는 중산층 아이로 자라났다. 다복한 가정의 귀염둥이였을 것 같지만, 장국영은 부모 형제와 떨어져 외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가장 나이 어린 형제와도 여덟살이나 차이가 났던 그는 일찍 죽은, 그와 생일이 같았던 아홉 번째 형의 분신처럼 여겨졌고, 그런 죽음의 그림자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외로웠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장국영이 어렸을 때 이혼한 뒤에도 끝장난 결혼에 연연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연약한 여자였지만, 학교에 적응 못하는 막내아들을 유학보내자고 주장할 정도의 목소리는 가지고 있었다. “형들이 여자애들과 데이트를 하는 동안 난 구석에 처박혀 군인인형과 바비인형을 갖고 놀았다. 집엔 말다툼과 싸움뿐이었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결혼이란 것이었다.”
<종횡사해>
<아비정전>
“행복한 기억이라곤 하나없이” 상처만 안고 떠난 장국영은 동양인이 드물었던 1960년대 영국 노포크에서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따돌림을 받았다. 그래도 유모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인 줄 알았던 홍콩보단 나았다. 영국엔 삶이 있었다. 십대 초반 어린 장국영은 주말마다 바닷가에서 식당을 하는 친척집에 놀러가 바텐더를 하면서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 이름을 만들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레슬리 하워드(애슐리를 연기한 배우)를 제일 좋아했다. 레슬리는 남자 이름이기도 하고 여자 이름이기도 하다. 유니섹스한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진 않았지만, 장국영은 주머니에 넣은 유서 마지막에 ‘Leslie’라는 사인을 남겼다고 한다.
외로움을 머금은 레슬리
재단사 아버지의 강요로 섬유관리를 전공한 장국영은 중간에 대학을 그만두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가 불러들였다고, 혹은 전공과 맞지 않아 스스로 포기했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아주가창대회에 참가해 2등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그저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대회에 나갔던 그는 느닷없이 가수가 돼버렸다. 매니저 진숙분은 그 무렵 발견한 장국영을 “빨간 양복을 입고 노래하던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지는 음반 발매와 영화 출연, 하지만 성공은 멀기만 해 몇년 동안 장국영은 “딱 1천홍콩달러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일매일을 보냈다. 너무 젊고 너무 잘생기고 강한 데라고는 없어 보였던 그는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 무렵 출연한 영화들은 그의 예쁜 엉덩이를 보여주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서극과 오우삼이 주도한 홍콩영화의 부흥기가 찾아왔다.
<해피투게더>
<해피투게더>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피흘리며 공중전화 부스에 매달린 장국영, 아내가 딸을 낳았다고 웃으면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할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죽은 젊은 경찰. 40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 <영웅본색>의 주윤발보다 복수를 마치고선 피투성이가 된 채 의자에 앉아 웃는 <영웅본색2>의 주윤발이 희미한 건, 장국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형을 향해 팔짝거리면서 뛰어오던 1편의 장국영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자기 그림자를 가진 배우가 됐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달랐다. 주윤발과 유덕화가 남루한 뒷골목의 영웅으로 스스로를 못박았을 때, 장국영은 멜로와 액션, 사극과 현대극, 무대와 스크린을 자유롭게 부유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 같았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서서 노래를 생각한다.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면 이 영화가, 이 인물이 어떠해야 하는지 형상으로 잡히기 시작한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당년정>(<영웅본색> 주제가)을 들으면 누구라도 좋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피곤하면 세겹으로 주름이 잡히는 쌍꺼풀, 가끔은 토라진 것처럼 보이는 볼록한 입술, 태어나기 전 특별한 선물을 받은 듯 곧게 중심이 잡힌 콧날, 무엇보다도 군살도 없지만 근육도 없어 물결처럼 흔들리는 엷은 육체. 장국영은 “그가 나타나기만 해도 카메라는 그에게 집중한다”고 평가받은 완벽한 외모를 가졌지만, 밀랍처럼 매끈한 피부 밑에서 말을 거는 무언가를 눈치챈 사람이 있다면, 오직 장국영만이 소유한 리듬을 느꼈을 것이다. 혼자 외롭게 자라 지나치게 민감해진 소년이,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반응해온 리듬을, 마음으로 들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진정 장국영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야반가성>
<동사서독>
강인한 척하면서도 여린, 아비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장국영은 그 주제가들과 함께 가수로서도 전성기를 누렸다. 절박하게 바라던 대로 통장엔 1천홍콩달러도 훨씬 넘는 돈이 들어왔다. 그러나 언론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추모 기사에 “그는 판에 박은 대답만 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덕분에 자주 건방지고 무례하다고 신문 헤드라인에 오르내렸다. 단정했던 라이벌 알란 탐과 비교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장국영은 그런 비교를 매우 싫어했다”고 썼다. 장국영은 절정에서 물러나고 싶다며 89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뒷날 “(알란 탐의 팬이 보낸) 제사용 향과 종이돈을 받았다. 그 무렵 어느 테니스 선수가 라이벌의 팬이 휘두른 칼에 찔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에게 중요한 건 끝없이 넓은 도량이어서, 나는 생존을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섰다”고 밝혔다. <아비정전>은 그가 잠시 물러선 절정, 그보다도 한 고개 위에 선 영화였다.
장국영은 “<아비정전>의 아비는 나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다. 강인한 척하면서도 여리고, 마음 가득 차오른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아비정전>은 그를 진짜 배우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건 연기의 힘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천진하고, 다소는 수다스러운 장국영은 “사실 나는 즐거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노출하게 될 거다. 난 정말 못됐을 수도 있는데….” 그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들뜬 연인을 향해 “바닥은 닦은 거야?”라고 매몰차게 굴지는 않을 테지만, 지친 몸을 바람에 실어 달래는 발없는 새와는 비슷했을 것이다. 마음을 붙이려 하면 몰아내고, 혹은 스스로 떠나버리는 아비는, 자주 흰옷을 입고 있었다. “언젠간 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처럼 하늘로 떠올라버리면 영영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랑한 여자들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많은 친구들 중에서 진실하게 마음 나눌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던 장국영도 언젠가는 바람 속에서 쉬고 싶지 않았을까. 4월1일 홍콩엔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해도.
난 영원히 이런 나를 사랑할 거야 즐거움은, 즐거움의 방식은 하나가 아닌걸 숨을 필요는 없어. 내가 좋아하는 삶을 위해 살아가면 돼. 나는 나야. 다른 색깔을 가진 불꽃. 하늘은 저렇게 넓은데, 나는 가장 강한 물거품이 될거야. 이세상을 향해 말할 거야.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 <나 我>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홍콩으로 돌아온 장국영은 90년대를 보내면서 짐작 못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때 그는 동생 같았다. <천녀유혼>을 찍던 왕조현이 장국영을 ‘거거’(哥哥, 오빠, 형)라고 부르면서 그 단어가 애칭으로 굳어졌지만, 물리적인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여인의 치맛자락을 찢고선 갑작스러운 사랑에 활짝 웃는 <우연>이나 함께 죽어 저승에서 연을 맺기로 한 연인을, 겁이 나 혼자 보낸 <인지구>에서, 항상 믿어주기로 했던 연인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눈발을 맞으며 세월을 견디던 <백발마녀전>에서, 장국영은 다독여줘야 할 마음 약한 남자였다. 단순히 여성성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위태로운 기운이 그에겐 있었다. 소녀들 마음속의 장국영은 스무살 많은 어른이나 중성적인 미소년이 아니라 처음으로 안아주고 싶은 남자였다. 그러나 여전히 붓털처럼 휘청이면서도, 그 많은 나이에도, 장국영은 또 한번 껍질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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