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질투는 나의 힘>,문성근 · 배종옥 · 박해일 [1]
2003-04-16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정진환
그리하여 우린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노라

영화를 끝내고 함께 인터뷰를 하는 배우들의 태도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우르르 남자영화’를 찍은 배우들이라면 동성간의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느라 소란스럽게 마련이고, 멜로영화를 찍은 커플이라면 서로를 애틋하게 챙겨주느라 바쁘다. 최악의 경우는 서로 데면데면 무심하거나, 아주 사이가 안 좋은 경우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느 범주에도 놓기 애매한 사람들이었다. 질투하고, 선망받고, 가운데서 그것을 지켜보았던 <질투는 나의 힘>의 세 사람처럼 박해일과 배종옥, 문성근은 극중 원상과 성연, 윤식이 만들어냈던 그 차지도 덥지도 않은 이상한 전선을 스튜디오로 옮겨놓았다.

영화 속에서 예민한 소년처럼 보이는 박해일은 의외로 유들유들한 아저씨 같은 면이 있고, 부유하는 듯 자유분방한 배종옥은 사실 똑 부러지는 목표없이는 웬만해선 몸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다. 늘 명쾌하고 신념에 차 있을 것 같은 문성근은 의외로 모호한 구석이 많다. 이렇듯 영화 속 배역과는 일정 부분 거리가 있는 배우들인데 이들이 함께 부딪치면 상황이 달라진다. 배종옥을 대할 땐 금세 안겨버릴 듯 소년처럼 굴던 박해일은 문성근 앞에서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또한 세상 어느 누구에게라도 ‘귀여운 면’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문성근의 태도는 박해일과 있을 때는 ‘저 녀석은 어떻게 해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돼버린다. 배종옥은 박해일을 대할 땐 원상을 다루듯 부드러웠고 문성근을 대할 땐 한윤식과 놀 듯 시원했다. 관계 속에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지켜보는 일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이렇듯 이들과의 3시간은 <질투는 나의 힘>을 그대로 스튜디오에 투사시킨 듯, 혼자 보기에 조금 아까운 광경이었다.

휘발성의 욕망,문성근

표지 촬영은 <죽이는 이야기> 하고나서 (여)균동이하고 찍은 게 마지막 같은데….” 사진 촬영에 앞서 문성근(49)은 스튜디오 기둥에 붙여놓은 2년 전 <씨네21> 영화제 포스터를 찬찬히, 몇번이고 들여다본다. 그동안 표지를 모아 만든 포스터 앞에서 그는 불현듯 자신의 ‘부재’를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후배들이 몇번씩 옷과 표정을 바꾸어 등장하는 동안 그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이창동은 배우 문성근을 두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외모와 달리 속에 시너처럼 휘발성이 강한 욕망, 불이 붙으면 위험한 욕망을 품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질투는 나의 힘>은 <오! 수정> 이후 3년 동안 ‘배우’ 문성근이 누르고 눌러왔던 욕망을 풀어놓은 영화다.

그래서일까. 요즘 지인들은 문성근에게 “영화 잘 봤다”는 인사말을 던진다. “한윤식과 너무 닮았다”는 치사와 함께. 본인으로선 한두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보니, 겉으론 웃지만 이제는 좀 난감한 눈치다. 후배가 사귀는 여자를 두번이나 뺏는 남자.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시선은 아무렇지 않게 접어두는 남자. 엄격한 윤리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는 아니지만, 오십줄에 들어선 현실에서 적잖은 부담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극중에서 원상이 그러잖아. 한윤식은 명쾌하다고, 매사에. 본능을 즐길 줄 알지. 나랑은 정반대야. 난 행동하기 전까진 무척 꾸물대고 혼란스러워하는데. 한윤식이야말로 편하게 사는 놈이지.”

하지만 ‘문성근 아닌 한윤식’을 떠올리기란 힘들다. 성연의 귀갓길을 방해하며 “한잔 더 하고 가자”고 흘리는 느물거리는 웃음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원상에게 온갖 잡심부름을 시키는 싸늘한 무표정을 힘들이지 않고 오갈 수 있는 이가 또 있겠는가. <경마장 가는 길>의 R로부터 <오! 수정>의 프로듀서 영수를 거쳐 한윤식에까지 이르면 하나의 궤적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 수정>의 영수하곤 차이가 좀 있어요. (아이큐가) 그쪽이 110 정도라면 한윤식은 130쯤 되지. R은 집요하긴 한데 한윤식처럼 본능 자체를 즐길 만한 환경을 갖추고 있진 못하잖아. 그래도 내 입장에선 전혀 유사성 없는 <꽃잎>이나 <초록물고기>보다는 접근하기가 쉬웠지. <꽃잎> 때는 (이)정현이 촬영하고 있는데 난 지방 가서 노무자 생활하고 그랬다고”

문성근은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 수정> 때도 그랬고, <질투는 나의 힘>도 마찬가지. 노무현 지지 연설하면서 목이 쉬기를 여러 번, 그런데도 그는 현장만 가면 힘이 났다고 한다. “글쟁이는 영혼의 상처를 후벼파서 팔아먹는다”던가, 배종옥이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옷 벗는 것을 보고서 “좋아서”라는 대사들은 그가 즉흥적으로 토해낸 것들이다. “처음 영화할 때는 디테일부터 인물을 만들었어. <그들도 우리처럼> 찍을 때 박계동 선배가 쓴 수배자 기록이나 사회구성체 논쟁까지 챙겨보고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대본마저도 한번 정독하고 나면 안 읽게 돼. 미리 계산하고 가면 갑갑하더라고. 함정에 빠지면 헤어나오기도 힘들고.”

현재, 문성근은 박광정 감독의 데뷔작 <진술>에 출연을 약속한 상태다. 40대의 국립대학 철학교수가 아내가 죽은 지 8년 뒤, 신혼여행지에서 처남 살해 혐의로 구속되면서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간다는 하일지의 동명소설이 원작. 촬영이 코앞인데 정작 문성근은 무덤덤하다. “4월 중순쯤 들어간다고 하는데, 좀더 기다렸다가 들어갔으면 해. 일단 놀고 싶거든. 인터뷰한다고 해서 연기하고 싶어 죽겠다고 거짓말하기도 싫고. 지금은 욕망이 막 분출되는 시기도 아니야. 지난 2년 ‘길길이’ 날뛰면서 에너지 소모했잖아. 이제 배우한다고 돌아왔더니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도망갔다고 불만이고. 어쨌든 정말 놀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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