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위엄, 위험, 그리고 나른함, 분홍 고양이, <튜브>의 배두나
2003-06-04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어쩐 일일까. 배두나는 친숙한 느낌을 준다. 스크린 속에서, 카메라 앞에서 혹은 인터뷰어와 함께 있을 때, 그러니까 배우가 자신을 배우로서 드러내는 방식들에 어떤 일관성이 있어서 그 사람의 안과 밖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투명한 인식이라니,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그래도 이건 이색적인 착각이었다.

“아니, 배두나! 오늘의 의상 컨셉이…” 하며 친한 체하자 그는 “아아이~ ” 하며 다리를 꼬았다. 그녀 자신도 익숙지 않은 분홍색 치마는 <튜브>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튀는 영화임을 새삼 상기시켰다.

영화 속에서 갖고 다니던 클림트 그림 이야기를 꺼내자 대뜸 “그거 왜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죠?”라고 묻는다. 당연히 모른다. 영화 안에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몰라…”라고 혼잣말을 한 그는 “아빠의 유품이에요. 그 안에 바이올린이 들어 있는데 돈 때문에 잃었다가 소매치기로 되찾은 거고요”라고 설명했다. 편집과정에서 사라지는 장면들은 늘 있다. 그래도 기타통이 비주얼적인 효과는 충분히 내더라고 말해주었다. 서운함이 지워지는 미세한 표정 변화 끝에 배두나가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기자의 시선을 받아 그것을 카메라에 되쏘는 피사체의 얼굴. 저 얼굴, 저 눈. 뚫어보고 제압하는, 서늘한, 쌀쌀한, 위엄과 위험… 무심한 듯 딴청 피우는… 나른한 귀여움… 안일하지도 만만치도 않은… 분홍 고양이 한 마리… 사랑스럽다…. 배두나가 카메라 앞에서 스틸 컷으로 연출하는 느낌들은 이런 모자이크를 이뤘다.

저 배우가 성장하면, 그러니까 마치 화가가 미세한 붓 터치를 거듭해가는 것처럼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키워가면 어떻게 될까.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문득 떠오르면서 이자벨 위페르의 여성적 카리스마를 우리 배우에게서도 보게 될까, 궁금해졌다.

<튜브>를 어떻게 보았느냐고, 그가 먼저 물었다. 한국의 블록버스터로서는 이색적이었다고 하자 “나도, 나도!”라고 맞장구를 쳤다. “지하철 세트랑 조명은 너무 잘하지 않았어요? 후면영사기법이라고 하는 건데 안에서 촬영할 때 진짜로 달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 멋있더라구요. 시사회 보고 되게 놀랐어요. 중간에 김석훈씨가 죽다 살고 죽다 살고 하잖아요. 유치한데 통쾌하던걸요. 박수치고 신나했어요. 액션영화라는 게 그런 재미가 있더라구요.”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좀 머뭇거렸다. “음… (발바닥을 까닥거리며) 내가 맡은 부분은 멜로죠, 신파예요. ‘마지막에 대중들이 울어요’ 이럴 수도 없고. (웃음) 우리나라 스타일에 맞게 마지막 5분의 멜로 부분이 대중에게 잘 맞춰져 있지 않나? 모르겠어요. 우우… 대중성은….”

<튜브>는 배두나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나눠도 될 만큼 배두나의 몫이 선명했다고 하자 돌연 달변으로 변했다. “<튜브>를 결정할 때 욕심이 없었어요. 전형적이지 않게, 남자배우 둘이 튈 수 있게 조용히 내 역할 하고 조화되게 도와주자, 내가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타입은 분명 아니지만 튀지 않고 잘 묻어가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사실 되게 걱정했어요, 액션영화 망칠까봐. 그렇게 컷 많이 쪼개는 영화는 처음 찍어봤고. <고양이를 부탁해>나 <플란다스의 개>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현실적인 영화하고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더라구요. 결과적으로 뛰어나진 않아도 잘 묻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지만 보는 방법에 따라 차이는 있겠죠. 저도 매맞을 준비는 되어 있구요.”

꽉 짜인 현실감 대신 배두나의 느낌을 끌어들인 여백, 배두나의 표현을 빌리면 ‘촉촉한 액션영화’는 백운학 감독이 계산하고 의도한 바였던 것 같다. “감독님이 저를 많이 믿고 맡겨주셨어요. 사실 <튜브>는 늘 해온 것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어요. 영화 8편 찍고 7편째 개봉하는 건데 시나리오, 감독, 배우, 현장 분위기, 컷 수, 모든 게 달랐어요. 25살 미만의 배우 초기에, 무르익은 배우 되기 전에 겪어야 할 영화인 듯했어요. 그렇지만 제게는 색다른 경험으로 남을 것 같아요. 어차피 전 다른 배우들과 다르게 생겼고 연기하는 방식, 어필하는 방식도 다른 것 같고. 누가 머리 질끈 묶고 달리는 관리사무소 여직원을 쉽게 첫 영화로 택하겠어요? 어떤 땐 너무 슬퍼요, 내가 설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래도 좋은 작품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해요. <살인의 추억>이 잘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최근의 배두나는 <위풍당당 그녀>라는 TV 미니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너무나 즐겼어요. 목숨 걸고 열심히 했고 후회없이 만족해요. 내 영화들을 위해 이걸 잘해야 한다고 눈에 불을 켰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뿌듯하던걸요. 내가 얼마나 대중과 멀리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어요. 한번이나마 배두나는 이런 타입입니다, 알려준 것이 만족스러워요.”

이해와 격려의 말이 입 안에서 맴돌고 머리 속에서는 미래의 배두나 모습과 이자벨 위페르의 이미지를 여전히 서로 견주었다. <피아니스트> 이야기를 꺼내자 반색을 하며 “뉴욕에서 <고양이를 부탁해> 배급한 사람이 줘서 봤어요. 불어에 영어 자막이라 헷갈렸지만, 왜 난 그 영화가 남 얘기 같지 않았지? 내가 그런 건 아닌데, 충분히 공감되고 어디선가 나를 그렇게 가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근데 그 얘긴 왜 물으세요?”

그는 영화배우 윤여정을 자신의 역할모델로 거론하곤 한다. 그의 소망은 분명 좁은 문을 향해 있다. 그걸 버틴다는 건 외로운 일이고 강인함을 필요로 한다. “외로움보다 무뎌지는 게 더 겁나요. 외로워지지 않게 될 수가 없고 배우라는 직업이 이걸 수긍 안 하면 안 되죠. 그리고 누구나 외롭지 않나요?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없다고 느낄 때도 많지만, 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별로 외롭지 않아요.”

자리를 털 무렵이 되자 그는 “홍보는 안 하고 딴 짓만 한 것 같네요. 저는 인터뷰를 홍보보다 내가 했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여기거든요. 그게 더 재밌어요. 근데 배우가 나이 들면 색깔도 변하겠죠? 빛을 더하기도 하지만 변색되는 걸 보는 재미도 있지 않나요? 변화하고 싶어요. 촉박하게 변신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나이 들면 내가 할 수 있는 역이 달라지고 독특함이 생기겠죠.”

배두나는 자신을 강인한 편이라고 했다. 세달 전에 만났던 배두나는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그의 언어는 정확하고 아름다웠으며 자신의 감정과 소신, 자존심과 아픔까지도 균형있게 표현했었다. 오늘의 그는 좀 다르다. “그런가? 아닌가? 이렇지 않을까요? 모르겠다…”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한 평소의 확신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듯도 했다. 그러나 균열없는 청춘이란 미덥지 못하다. 그것을 견디고 끌어갈 힘, 그것은 오늘의 배두나에게서도 여전히 느껴진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