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세계 애니메이션계에도 아시아 바람
2003-06-17
글 : 황혜림
2003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참관기

꼬박 6일 밤낮, 세상 곳곳에서 날아온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을 원없이 만날 수 있는 2003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지난 6월7일 폐막했다. 해마다 여름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는 6월, 스위스의 제네바와 국경을 맞댄 프랑스의 휴양도시 안시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세계 최대의 애니메이션 축제. 히로시마, 오타와, 자그레브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애니메이션페스티벌로 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40여년의 전통을 지닌 애니메이션영화제로 올해 27회를 맞았다.

올해 단편부문에서 경쟁을 벌인 50편 중 그랑프리의 영광은 야마무라 고지의 <아타마 야마>에게 돌아갔다. 야마무라 고지는 프리랜스 애니메이터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단편과 TV 광고 작업을 주로 해온 일본 감독. 직역하면 ‘머리 산’이라는 제목을 가진 <아타마 야마>(頭山)는, 머리에 벚나무가 자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의 머리에 벚꽃놀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흥청망청거리던 그들이 쓰레기며 뜨거운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자 화가 난 남자는 나무를 뽑아버린다. 일본의 동명 전설에 바탕한 이 작품은 자연의 혜택을 누리기만 할 뿐 아낄 줄 모르는 인간들에 대한 풍자를 초현실주의적인 상상력과 펜선의 질감이 살아 있는 그림체로 보여주며 상영장에서부터 많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마리이야기>가 수상했던 장편 경쟁부문의 출품작 5편 중 역시 홍콩 감독인 토유엔의 <맥덜로서의 내 인생>(My Life as McDull)이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올해 안시는 전례없는 아시아의 약진을 확인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맥덜로서의 내 인생>은 90년대 초반부터 홍콩에서 인기를 누린 만화의 캐릭터인 아기 돼지 맥덜의 이야기. 디카프리오처럼 멋지고, 성공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던 엄마의 바람대로 되진 못했지만 선량하게 살아가는 맥덜의 아기자기한 성장기다. 셀과 종이에 그린 그림, 사진과 3D 컴퓨터그래픽, 컷아웃 등 다양한 기법을 합성한 영상은 다국적 문화의 용광로 같은 홍콩이란 도시의 표정과 일상을 꼼꼼하게 담고 있으며, 아이들이 부른 노래를 곳곳에 삽입한 뮤지컬 스타일의 연출도 경쾌한 작품. 특히 서극 감독의 97년작 <천녀유혼>이 최초의 작품으로 알려진 만큼 홍콩 장편애니메이션의 역사가 길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맥덜로서의 내 인생>의 수상은 괄목할 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머리가 좀 모자라고 지독하게 운이 없지만 끊임없이 소박한 생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남자의 일대기로 훈훈한 웃음을 선사하며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상 등 3개의 상을 받은 영국산 점토애니메이션 <하비 크럼펫>, 십대 마녀의 사춘기를 세밀한 삽화체와 파스텔톤의 색감으로 담아 TV부문 그랑프리를 차지한 프랑스 작품 <베르트>, TV 앞에서 졸던 할머니가 목숨을 거두기 위해 방문한 사신과 한바탕 전투를 벌인다는 내용으로 신인감독에게 주어지는 장 뤽 지베라상을 수상한 <죽음과 겨루는 법>, 상복은 없었지만 억지로 분리된 뒤 다시 합쳐지고 싶어하는 시암 쌍둥이의 욕망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풍의 기괴한 심리극으로 풀어낸 인형애니메이션 <세퍼레이션> 등 안시에서 얻은 ‘보상’을 열거하기엔 아무래도 지면이 모자란다.

아쉽지만, 귀가 따갑도록 휘파람을 불어젖히고, 상영 시작을 알리는 리더 필름 속의 토끼를 불러대며 종이비행기를 날리던 관객과 폴록의 액션페인팅 과정을 포착한 듯 물감의 군무를 찍기 위해 11년이나 작업했다는 <오이오>의 사이먼 굴레 같은 작가가 있었던 안시의 기억을 이만 줄일밖에. 그리고 사족이겠지만, 이번에 상영된 애니메이션의 발전사 100년에 대한 다큐멘터리 <애니메이티드 센추리>에서 “인비트위너(동화와 동화의 중간 연결장면을 그리는 작업) 공장”으로 언급된 한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해도, 수상은 못했으나 질적 성장과 잠재력을 보여줬던 16편의 한국 출품작들과 함께 좀더 깊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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