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망 30주년, 이소룡 다시 보기 [2]
2003-07-18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정리 : 문석

절권도에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절권도가 단지 실용적인 무술만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절권도가 특공 무술과 다른 것은, 그 안에 동양의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에게 쿵후를 가르치던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이 동양 문화의 일부이며, 정신적인 고양을 꾀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민족적 자긍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소룡 이전까지 중국인, 동양인의 캐릭터는 요리사나 철도노동자에 불과했다.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표식이 곳곳에 걸려 있을 정도였다. 이소룡은 인종차별의 중심지에서,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여 동양인의 스테레오 타입을 깨부쉈다.

배우가 된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나는 첫째로 무도가이고 싶고, 둘째로 배우이고 싶다’라고 말한 이소룡은 할리우드 진출을 꾀했다. 무술 시범을 통하여 할리우드 인사들과 가까워진 이소룡은 <배트맨> 시리즈의 프로듀서였던 윌리엄 도저를 만나게 되고, <그린 호네트>에 출연한다. 카토라는 이름의 조역이었고, 한 시즌으로 끝났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뒤 제자가 된 제임스 가너가 출연한 <말로우>에도 나왔지만, 여전히 이소룡은 배경에 불과했다. 이소룡은 제자로 스티브 매퀸, 제임스 코번, 제임스 가너 등을 두었고 스튜디오 내에 도장을 열었지만 그것이 성공의 발판이 되지는 못했다. 이소룡은 자신이 좋아했던 존 웨인과 서부극의 풍경처럼, 홀로 서부를 떠돌아다니며 총잡이들을 제압하는 동양 무술인이 등장하는 <쿵후>를 제안한다. 그러나 이소룡은 <쿵후>의 주연으로 발탁되지 못한다. 동양인이 미국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온다. 마침 홍콩TV에서는 <그린 호네트>가 방영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이소룡을 스카우트한 곳은 홍콩 최고의 제작사였던 쇼브러더스가 아니라 레이먼드 초의 골든 하베스트였다. 배우들을 소모품 취급하던 쇼브러더스에서는 고액의 개런티를 요구한 이소룡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쇼브러더스에서 독립한 레이먼드 초는 이소룡의 가치를 일찌감치 깨달았고, 이소룡을 기용한 영화들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골든 하베스트를 홍콩 최고의 제작사로 끌어올렸다. 이소룡의 성공으로 홍콩에서는 권격영화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다시 성룡의 코믹쿵후 등으로 흐름이 이어졌다. 당시 홍콩 사람들에게 이소룡은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정무문>에서 일본인들에게 저항하는 모습이나 <맹룡과강>에서 서양인들과 싸우는 이소룡의 모습은 중국인의 자긍심을 한없이 고취시켰다. 또한 엄격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이소룡은 끊임없이 자신의 무술을 발전시키고 노력하는 그 성실한 자세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육체로 모든 것을 말한다

<당산대형> 촬영현장. 이소룡의 육체와 무술은 철저한 훈련과 절식. 명상 등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소룡의 영화는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 4편, <사망유희>를 포함한다면 5편에 불과하다. 이 영화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작품 그 자체로 보았을 때는 걸작이라 할 수 없다. 아니 조잡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스토리는 평이하고, 캐릭터도 평면적이다. 화면은 그냥 이소룡의 액션장면을 잘 보이게 잡은 것뿐이다. 심지어 <뉴욕타임스>의 빈센트 캔비는 “최악의 마카로니 웨스턴처럼 보인다”고 악평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이소룡의 등장으로 홍콩영화의 아우라가 사라졌다는 것은 일면 맞는 말이다. 호금전과 장철이 선사했던, 그 선적인 아름다움이나 숭고한 비장미는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소룡은 호금전이나 장철의 영화에 출연할 수가 없었다. 그건 일종의 패러다임의 변화다. 이소룡은 육체로 모든 것을 말한다. 완전한 만다라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몸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를 그대로 표현한다. 이소룡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서 자신의 무술장면을 직접 만들어냈다. 호금전이나 장철이 그걸 원했을 리 없다. 이소룡이 출연한 영화는, 모두 이소룡의 것이다. 감독의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용쟁호투>의 로버트 클로즈가 한 일은 그 얼개를 유사 007 영화로 짜맞춘 것뿐이다. <용쟁호투>는 이소룡의 몸과 액션을 담아낸 커다란 액자인 것이다.

이소룡은 영화배우이기 이전에 무술인이었다. 지금 이소룡의 영화를 보아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여전히 그의 육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스토리나 장면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육체만을 바라본다. 이소룡의 육체가 최고도로 발현된(이를테면 성룡에게 <프로젝트A>가, 이연걸에게 <황비홍> 같은 영화가 있는 것처럼) 걸작이 남아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지만, 무술인으로서 이소룡의 필모그래피에는 다섯편밖에 없다. 그래서 더욱, 이소룡의 영화를 볼 때는 그의 육체만을 지켜본다. 그의 육체가 만들어낸 그 긴장감. 그의 호쾌한 타격이 상대의 얼굴에, 가슴에 꽂힐 때의 그 짜릿함. 정확하게 2cm만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풋워크의 그 아찔함. 그것은 육체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경지다. 이소룡이 보여준 것은 육체의 만다라였고, 이후 그 누구도 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30년이란 세월이 아니라, 100년이 흘러도 이소룡을 대신할 누군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브루스에세 보내는 영화감독 4인의 연서

이소룡은 수많은 마니아를 이끌어왔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감독 중에도 이소룡을 추앙하는 경우가 많다. 각기 세대와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4명의 감독이 이소룡을 추억한다. 한편, 이중 가장 나이가 어린 김용천 감독은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영상연출과에 재학 중으로 동료 서민창 감독과 함께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를 가득 담은 <무떼>를 만들어 제2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미래상을 수상한 ‘신세대 이소룡 마니아’다.

30번 이상 봤고, 내리 3번씩 본 적도_박기용

이소룡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이미 반 아이들이 이소룡에 관한 이야기만 할 정도로 열풍이 불고 있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 가서 <당산대형>을 봤다. 왕우로 대표되는 무협물에 심취해 있었던 나는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봤다. 무기도 들지 않고 현란하게 싸움을 벌이는 그의 모습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산대형>과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는 각각 30번 이상은 봤을 거다. 극장에 한번 들어가서 내리 3번씩 본 적도 있었다. 이소룡과 관련된 정보가 있는 국산 주간지, 화보집뿐 아니라 일본 사진책도 수집했다.

당시 내게 이소룡은 현대적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전까지 본 무협영화는 판에 박힌 캐릭터들이 판에 박힌 액션을 펼쳤는데, 이소룡의 액션은 자유로웠고 현대적이었다. 무엇보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액션을 본다는 것 자체가 참신했다. 실제 무술을 하는 이소룡을 보고 나니까 다른 액션은 흉내만 내는 것 같았다.

지난해 외국에 갔다가 이소룡 달력을 사서 영화아카데미 사무실에 걸어놓았는데, 강의차 왔던 오승욱 감독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며 질투를 하더라. 한달 전쯤 시애틀영화제에 들렀는데, 영화제 관계자가 지난해 행사 땐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수소문 끝에 이소룡의 묘지를 찾아 참배를 했다고 하더라.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결국 지금 내게 이소룡은 우리 세대 공통의 추억거리라는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소리 지르고 환호하는 일종의 축제_유하

내가 처음 본 이소룡 영화는 초등학교 시절 답십리극장에서 본 <정무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과잉된 액션이었는데, 그게 참 매력적이었다. 허술한 재개봉관이었던 탓에 영화는 이소룡이 이단옆차기 하는 장면에서 끊어졌는데, 친구들과 결말 부분을 나름대로 지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소룡에 대한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던 <용쟁호투>를 보기 위해 아버지의 바바리코트와 모자로 ‘변장술’을 발휘하기도 했고, 학교를 빼먹고 하루종일 극장에 죽치고 앉아 이소룡 영화를 보기도 했으며, <맹룡과강>을 볼 때는 몇 주일 동안 걸어서 통학하며 버스비를 아껴 겨우 입장료 600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중삐리, 고삐리 시절 이소룡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히 영화관람이 아니라 소리지르고 환호하는 일종의 축제였다. <사망유희> 이후 나는 홍콩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소룡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성룡이나 오우삼의 영화가 우습게 보였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소룡의 미학은 결투 전의 머뭇거림이나 때리고 난 뒤의 죄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액션은 니힐리즘이나 누아르적인 분위기가 있는, 그러니까 아날로그적 액션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만한 분위기를 낼 줄 아는 무도가이자 엔터테이너는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무림일기> 등 내가 키치적 세계의 시를 쓰게 된 것도 이소룡 탓이다. 이소룡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세운상가를 뒤졌고, 나는 차츰 대중문화에 포섭된 것이다. 이소룡과의 인연은 참 질긴 것 같다. 결국 ‘이소룡 세대’의 이야기인 <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들고 있지 않나.

동그란 딱지 속에서 그를 발견했다_류승완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성룡을 먼저 알았다. 이소룡이란 인물을 처음 접한 건 동그란 딱지 속에서였다. ‘이소룡 대 성룡’이란 딱지가 있었는데, 거기선 항상 이소룡이 성룡을 이겼다. 이소룡의 영화는 간간이 설이나 추석 때 TV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무술영화 백과대사전>이나 그에 관한 책, 사진집, 브로마이드를 구해서 차곡차곡 모아뒀고, 그의 동작을 흉내내곤 했다. 그러고 보면 내게 이소룡은 영화스타라기보다 무도인이었으며, 한 시대를 휘어잡고 불꽃처럼 살다간 하나의 아이콘이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이소룡 영화를 보고 있으면 투박하기 짝이 없지만, 만든 사람의 진정성만큼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권선징악이라든가 정의를 위한 복수, 그런 대의명분이 투박하지만 절실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수십년이 지나도 힘이 유지되는 것 같다. 또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형식을 해체한 절권도는 영화에 관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나에게 일말의 핑계를 제공하는 이론인 셈이다.

이소룡은 성룡과 함께 내 영화의 두개의 원형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다찌마와 리>나 지금 찍는 <아라한 장풍대작전>이 성룡적인 쪽이라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피도 눈물도 없이>의 비극적인 면에는 이소룡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소룡 같은 정통 무술을 대입하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 그걸 해낼 수 있는 배우가 나온다면.

한방한방 때리는 것이 거의 예술이었다_김용천

나는 어릴 때부터 이연걸, 성룡 등이 나오는 홍콩 액션영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들의 영화를 여러 번 보니 뭔가 답답함 같은 게 느껴졌다. 새로운 게 무엇일까 찾다보니 자연스레 이들 액션의 원천인 이소룡을 만나게 됐다. 처음 본 영화는 <용쟁호투>였는데,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한방한방 때리는 것도 거의 예술이었다. 서양의 무술보다는 확실히 우리 정서에 맞는 것 같기도 했고.

솔직히 말해서, 난 스타일 면에서나 어디에서나 이소룡이 요즘 나오는 배우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요즘 액션배우들은 그냥 막 날고 뛰고 할 뿐인데, 이소룡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워크도 멋지고 무술실력도 간결하다. 입으로 말을 많이 않고 주먹으로 말하는 점도 멋있다. 우리 세대에겐 그게 훨씬 신선한 요소인 것이다.

<무떼>는 이소룡 영화 같은 것을 찍자는 아주 단순한 발상에서 출발했다. 알고보니 학교(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엔 이소룡 마니아들이 여럿 있었다. 주인공 캐릭터를 우리끼리 멋있다, 재밌다, 하면서 만들었다. 이 영화로 미쟝센영화제에서 미래상을 받은 것도 좋았지만, 심사위원인 오승욱, 류승완 감독님이 직접 부상으로 마련해준 쌍절곤은 정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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