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사망 30주년, 이소룡 다시 보기 [1]
2003-07-18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100년 뒤에도 화려할, 육체의 만다라

1973년 7월20일 23시30분.

그날, 그 시각,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진정한 용이 되었다. 5년 뒤 미리 찍어둔 격투장면을 활용한 <사망유희>가 나왔고, 미망인 린다 리가 쓴 <Bruce Lee, the man only I knew>를 기초로 전기영화 <드래곤>(감독 롭 코언, 출연 제이슨 스콧 리)이 만들어졌다. 기묘한 괴조음을 내던 이소룡의 모습이 그대로 뇌리 속에 남아 있는 동안, 30년이 흘렀다. 이제 할리우드에서는 성룡과 이연걸이 활약하고 있고, 액션영화는 홍콩 출신 무술감독들이 만들어낸 마셜 아트가 휩쓸고 있다. 과거 이소룡이 염원했던, 첫발을 내디뎠지만 돌연한 죽음으로 무너졌던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무술의 위대한 계승자, 가장 위대한 중국인

이소룡이 영화와 무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이소룡은 기준을 세워놓았다. 이소룡이 마셜 아트에 끼친 공헌은 로큰롤에서 엘비스, 농구에서 마이클 조던, 권투에서 무하마드 알리가 했던 역할’에 비견할 수 있다. 이소룡 이전까지 중국 무술은 말 그대로 비전(秘傳)이었다. 외국인에게는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중국인만의 위대한 유산. 하지만 이소룡은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중국 무술을 현대화하고, 세계화했다. 단지 중국 무술의 위대한 계승자로서만이 아니라, 대중에 끼친 영향을 고려해보았을 때 이소룡은 가장 위대한 중국인으로 꼽힐 만하다.

<토요일 밤의 열기>나 <부기 나이트> 같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방에는 이소룡의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70년대 이소룡은 서양인이 존경하는, 가장 유명한 동양인이었다. 단 4편의 영화로 그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서양인들이 이소룡에게 놀란 것은, 그 육체의 강함이었다. 174cm의 작은 키인 이소룡이 근육질로 무장한 거한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경탄했다. 이소룡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같은 배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소룡의 육체와 무술은 철저한 훈련과 절식, 명상 등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고, 우리 역시 그 길을 따르면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힘들기는 하지만, 이소룡의 육체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70년대 이소룡의 영화를 본 수많은 청소년들이 쌍절곤을 만들어 집에서 휘두르다가 수없이 뒤통수를 깨곤 했었다.

대중이 영화 속 이소룡을 보는 것은 단순히 액션스타를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위대한 투사, 전사, 무사이다. 우리는 실제의 격투를 만나는 기분으로 이소룡의 액션을 보고 있다. 이소룡의 액션은, 격투는 사실 그대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용쟁호투>를 찍을 때, 이소룡의 명성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결을 원하며 찾아왔다고 한다. 이소룡은 모든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무에타이 챔피언과 싸웠을 때, 팔꿈치를 맞고 쓰러졌던 이소룡은 바로 다음 순간 그 테크닉을 이용하여 무에타이 챔피언을 바닥에 눕혔다. 이소룡은 타고난 싸움꾼이다. 우리는 그 광경을 영화 속에서 보고 있다. <맹룡과강>에서 척 노리스와 격투를 벌일 때, <사망유희>에서 카림 압둘 자바와 혈전을 벌일 때 그것은 실제의 싸움과 마찬가지다. <용쟁호투>에서 원시적인 오픈 핑거 글러브를 끼고 홍금보와 대련을 벌이는 이소룡의 모습을 보자. 마치 프라이드나 UFC 같은 이종격투기를 보는 기분이 든다. 최강의 무술이 무엇이고, 최강의 전사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무대. 이소룡은 이미 그 무대 위에 섰었고, 모든 무술의 장점만을 엮어낸 절권도로 최강의 승자가 되었다. 영화 속의 이소룡은 그런 실제의 모습을 영화적으로 담아냈을 뿐이다.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적당한 악당들을 대결시키면서.

위대한 투사,전사,무사

이소룡은 성룡과도 또 다르다. 성룡이 처음 할리우드 진출을 꾀했을 때 실패의 이유는 이소룡이었다. 서양인이 보기에, 성룡의 주먹은 터무니없이 약해 보였다. 이소룡의 카리스마도 없었고,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은 그냥 아이들의 육체단련용 호신술처럼 보였다. 성룡이 정통 쿵후영화가 아니라 코믹쿵후로 홍콩을 휘어잡았던 것처럼, 재도전이 성공한 것은 <프로젝트A>에서부터 보여주기 시작한 방향전환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성룡만의 애크러배틱 액션. 마치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을 보는 것처럼 성룡의 액션은 자신만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지금 성룡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자신만의 경지에 올라 있다. 이소룡 역시 마찬가지다. 이소룡 이후 그 어떤 배우도, 그의 카리스마를 뛰어넘지 못했다. 이소룡의 카리스마는 단지 그만의 것이었다. 그의 강함도 오로지 이소룡만의 것이었다.

같은 무술인이지만, 이소룡과 이연걸의 위치는 또 다르다. 이연걸도 이소룡처럼, 중국의 무술을 알리기 위해 영화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할리우드에 간 뒤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홍콩에서 출연한 <황비홍> 등의 영화에서 이연걸은 정통 중국 무술을 보여주었다. 이연걸만큼 우아하고 품격있게 발차기를 하는 배우는 일찍이 없었다. 이연걸이 보여주는 정통적인 중국 무술의 품새는 보는 사람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이연걸은 이소룡의 카리스마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소룡과 이연걸의 절대적인 차이는, 이소룡이 자신만의 유파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소룡은 무술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단련하면서 새로운 테크닉을 개발하고 절권도라는 하나의 유파를 만들어냈다.

이소룡의 무술의 목표는 실전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60년대 중국 무술은 점점 실전에서의 리얼리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태극권은 보통 사람들의 건강법으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반청이나 반일의 수단으로 쓰였던 무술은 이제 밤거리의 호신술로나 쓰이고 있었다. 이소룡 역시 젊은 날에는 거리에서 폭력배들과 싸우는 수단으로 중국 무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술의 본질이 아니다. “쿵후는 투사를 위한 것이지 스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참선이나 벽돌 몇장 깨는 것이 도대체 쿵후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방어만 하는 쿵후는 물 밖에서 수영을 배우는 것과 같다.”

이소룡은 이연걸과 마찬가지로 중국 무술을 정통으로 배웠다.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태극권을 배웠고, 13살 때 엽문에게 손을 주로 쓰는 영춘권을 배웠고, 18살 때는 소한생에게 발차기가 주력인 공력권을 배웠다. 미국으로 넘어가 쿵후 도장을 열었을 때 이소룡은 타유파 고수들의 많은 도전을 받았다. 가라테 유단자를 11초 만에, 중국 무술인은 30초 만에 쓰러뜨렸다. 이소룡은 만족하지 않았다. 격투는 6초 안에 끝나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이소룡은, 더욱 효율적인 전법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른 유파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복싱과 펜싱의 풋워크, 무에타이와 태권도, 사바테의 발차기, 유도의 던지기와 관절기 등을 활용하여 이소룡은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는 무술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절권도다.

필 모 그 래 피

<당산대형> 타이의 얼음공장에 일하게 된 청년이 온갖 악행을 일삼는 사장이자 조직폭력배와 대결하는 이야기. 무술인 이소룡을 처음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풋워크와 손동작, 괴조음까지 모두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결하는 악당 두목 역의 한영걸은 호금전 영화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던 인물이다. 실제로 무술의 달인이자, 60년대 쇼브러더스 전성기를 이끌었던 무술감독 한영걸은 이소룡과의 대결에서 무참하게 무너진다. 홍콩영화의 중심이 이소룡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이소룡의 공중발차기가 유난히 돋보인다.

<정무문> 일본에 맞서는 무술가의 혈투를 그린 영화. 사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돌아온 첸은 일본인의 음모라는 것을 알고 단신으로 맞선다. 수십명의 무술 유단자들을 혼자 쓰러뜨리는 광경은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인용된 명장면. <정무문>은 제작비의 4%가 가짜 피를 만드는 데 쓰였다고 할 정도로 많은 액션장면이 등장하며, 이소룡의 무술을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쌍절곤도 처음으로 선보인다. 이소룡의 영화에서 유일무이한 키스신을 볼 수 있는 것도 <정무문>만의 매력. 상대는 주연 여배우인 묘가수다. 러시아에서 불러온 고수를 물리치고 예정된 죽음을 향하여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그 순간 멈춰버린 화면은 이소룡의 영원불멸을 예고한다.

<맹룡과강> 레이먼드 초와 함께 영화사를 만들어 제작한 작품. 이소룡은 제작, 감독, 각본 등 1인5역으로 활약했다. 이소룡은 이탈리아 마피아에 협박당하는 레스토랑을 보호해주는 중국 청년으로 나온다. 당시 미국 격투기 챔피언이었던 척 노리스와 콜로세움에서 벌이는 일대일 액션은 단연 최고의 장면(실제 격투장면 촬영은 세트에서 이루어졌다). 몸풀기 과정에서 이소룡과 척 노리스는 미묘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척 노리스는 정권과 발차기를 하지만, 이소룡은 스트레칭에 주력한다. 몸을 푸는 이소룡에게 다가온 아기고양이를 함께 비추어, 긴장과 이완으로 상대를 교란시키며 압도하는 스타일을 암시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용쟁호투> 소림사 출신의 무술인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세계 무술대회가 열리는 섬으로 향한다. 섬의 주인은 인신매매를 일삼는 국제적인 악당이다. <용쟁호투>는 워너브러더스와 공동으로 제작했으며, 서구 관객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감독은 <어둠의 섬광>을 보고 이소룡이 직접 로버트 클로즈를 골랐다고 한다. ‘아류 007’이란 비난을 들을 만큼 서구 취향의 액션영화이며 이소룡과 그의 무술을 신비화하기도 하지만, 많은 액션장면들이 그런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준다. 거울방에서의 액션장면은 ‘멋있다’는 점에서는 최고.

<사망유희> 제자인 카림 압둘 자바가 홍콩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이소룡은 <사망유희>의 촬영을 준비한다. 별다른 시나리오 없이 1주일 만에 압둘 자바와의 격투장면을 끝낸다. 또한 이소룡에게 쌍절곤을 가르쳐주었던 필리핀 무술가 댄 이노센트의 출연장면도 찍었다. 그러나 <용쟁호투>의 촬영 때문에 <사망유희>의 제작은 일단 중단된다. 이소룡 사후 <사망유희>의 제작을 재개하지만, 돌연한 죽음으로 중단된다. 78년 한국 배우 김태정이 당룡이란 예명을 쓰며 대역으로 출연하며 완성되지만, 졸작으로 평가된다.

연 표

1940년 | 11월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

아버지 이해천은 경극 배우, 어머니 하금상은 독일 혼혈

1946년 |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진 <금문녀>에 아버지와 함께 출연

1947년 | 홍콩으로 이주

1950년 | <세로상>(細路祥)에 출연.

예명 이소룡을 얻음

1958년 | 단신 도미

1962년 | 시애틀에 처음으로 도장 설립

1964년 | 린다 에머리와 결혼

1965년 | 아들 브랜든 리 출생

1968년 | <그린 호네트> 출연

1969년 | 딸 섀논 리 출생

1971년 | <당산대형>

1972년 | <정무문> <맹룡과강>

1973년 | <용쟁호투>

1973년 | 7월20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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