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 최민식 [2]
2001-05-18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구로 아리랑>에서 <파이란>까지. 연극, TV, 영화를 넘나든 아홉구비 연기 인생

타인의 영혼으로 사막 건너기

“죽을 맛이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에요.”

좋건 나쁘건 한번 그은 감정의 선이 일필휘지 끝까지 달리는 연극과 달리 단절과 훼방의 연속인 영화 연기를 도대체 어떻게 끌고 가느냐는 질문에 최민식은 그렇게 답한다. 연기 테크닉의 기초를 가르치는 교본은 있지만 가공의 영혼을 몸 안에 들이는 법은 세상 어느 책에도 씌어 있지 않다.

영화 속 인물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접신’하는 것은 배우 혼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크랭크인 날짜 전에 완수해야 할 숙제라고 그는 말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표현에서 힘줄이 툭툭 불거질 것 같다.

최민식의 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은, 연기는 물론 망치질하고 스폰서 잡고 소품 나르며 소극장에서 살다시피한 대학 생활의 마지막 장(章)이었던 동국대 연극영화과 4학년 때 박종원 감독의 <구로 아리랑>(1988)에 프락치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시작됐다. <썸머타임>의 박재호 감독이 조감독을 하고, 임상수 감독이 연출부 막내였던 시절이다. 당시 출연료는 150만원. 한남동에서 자취하던 최민식에게는 큰 돈이었다.

영화라는 새 장르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울렁였던 그는 농성중이던 신애전자 노동자들이 출연료 한푼 받지 않고 엑스트라로 온몸을 던져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영화도 괜찮은 거구나” 하는 어렴풋한 생각을 했다. “제약은 많겠지만 제도권 최초로 노동문제를 언급한 영화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자”던 박종원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24군데가 잘려서 아세아극장에서 조촐히 개봉됐다. 같은 해 만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그는 손창민의 친구였다. 신도 대사도 적었지만 야전 점퍼에 고무신, 낡은 청바지의 보헤미안 행색의 1970년대 서울대 미대생이 돼야 했던 그는, 미술을 전공한 형과 친구들을 관찰한 대로 청바지 무릎에 낙서하듯 그림을 그려 촬영장에 나갔다. 그러나 세부적 설정에 기울인 그의 열의는 어이없이 일축당했다. “야, 그거 떼!” 납득할 수 없었던 최민식은 술자리에서 장길수 감독에게 대든 뒤 뛰쳐나와 빗길에서 아껴마지 않았던 난생 처음 장만한 자동차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1990년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최민식을,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차인표 같은 시절”, 말하자면 고공 스타덤에 덥석 올려놓았다. <야망의 세월>의 ‘쿠숑’ 역으로, 그는 어느 날 일어나보니 동그라미 숫자도 어지러운 월수입과 CF 모델료를 받는 스타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좋아서 괜히 허허거렸다.

그렇다고 빌딩을 올리거나 한 건 아니지만 돈을 많이 벌면 사는 방식이 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경험이었다. 빗발치는 캐스팅 요청 속에 <야망의 세월>의 작가에 대한 의리를 지켜 같은 작가가 집필한 <정든 님>에 출연했지만 국책 드라마 색이 짙었던 탓에 본인이 봐도 재미가 없었다. 이어 출연한 <일월>의 시청률도 10%를 넘지 못하자, 2년 새 “천하의 쿠숑도 금세 바닥을 기었다”. 기자들도 방송사 국장도 태도가 달라졌다. 이렇게 잊혀져가는 ‘탤런트’가 되는 걸까. 술 마시고 부대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녹화가 끝나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향했다. 마냥 쓸쓸했다.

시골 스탠드바에서 <대전 부르스>를 부르며

<야망의 세월>로 몸값이 치솟던 무렵 출연을 결정한 <우리 사랑 이대로>(1991)는 80% 프랑스 로케이션 촬영으로 제작된 영화였다. 하지만 벗기려는 의도가 다른 고려보다 앞선 영화이기도 했다. 아침마다 이국의 촬영현장으로 나서면서 최민식은 영화를 찍으러 가는 건지 싸우러 가는 건지 잘 판단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세 번째 영화가 안겨준 최대의 소득은 연기자에게 신중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관한 교훈이었다. 이듬해 강원도 정선에서 촬영한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최민식의 초기영화 가운데 제일 만족도가 높았던 작품. 감독, 원작자와 함께 최민식이 맡은 ‘김 선생’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놓고 토론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박종원 감독의 뜻대로 찍었다. 김 선생이 아이들을 체벌하는 장면에서 아플세라 옷 속에 뭔가 넣으라고 어린 연기자들에게 귀띔했다가 ‘이불 터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NG가 났던 일, 할 수 없이 제대로 매를 때린 뒤 여관에서 꼬마들에게 ‘안티플라민’을 발라주던 일은 여지껏 생생하다. 이처럼 <우리들의 일그러진…>은 홍경인 등 교실 가득한 아역 배우와의 즐거운 기억이 많은 영화지만, 황당무계한 추억도 많은 작품. 현장으로 가는 길에 차가 굴러떨어져 달빛 속에서 승냥이와 눈이 마주치는 모골 송연한 위기를 넘겼는가 하면, 정선에 들어서자마자 “최민식, *** 스탠드바 전격 출연”이라는 어이없는 플래카드가 그를 맞이했다. 알고 보니 한무리의 ‘지역사회 건달’들이 이미 박종원 감독을 둘러싸고 그의 업소 섭외를 청탁중이었고, 사태 수습에 나선 최민식은 <가거라 삼팔선>과 <대전 부르스> 두곡만 부른다는 조건으로 무대에 오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초저녁부터 일찌감치 테이블을 점령한 스탭들 덕택에 최민식은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부른 것과 진배없는 ‘밤무대’를 가뿐하게 마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뒤 한석규와 처음 재회한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은, 너무 영화적이어서 영화로 돌아가는 길을 깜박 잊게 만든 드라마다. 애초엔 여자들을 등치는 제비 홍식 역이 최민식 몫이었고 그 역시 홍식의 캐릭터를 탐냈지만 그는 결국, 도시가 휘두르는 냉혹한 폭행 앞에 눈을 둥그렇게 뜬 순박한 사내 춘섭으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요즘도 그는 <서울의 달>의 몇몇 대사를 외우고, 쓰러진 홍식의 얼굴 위로 흐르던 “나는 라스팔마스로 간다”는 마지막 보이스 오버를 잊지 못한다. <서울의 달>을 끝내고 최민식은 심신이 메말라 갈라지는 사막 같은 한 시기를 보냈다. 첫 결혼이 깨지고 경제적으로 바닥나는 곤경에 빠졌고 미니시리즈 촬영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대형사고도 겪었다. 일주일이면 엿새를 술로 새웠고 상처난 다리를 지탱하는 목발을 저으며 대상없는 분노를 내뱉다 친절한 친구들의 등에 업혀 귀가하곤 했다. 무작정 밝고 명랑한 공기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로 뛰어든 시트콤은, 뜻밖에도 배우 최민식에게 유익한 수업이 됐다. “컷은 알아서 저희가 넘길 테니 맘대로 연기하세요”라는 주문을 받고 최민식은 연기 도중 자연인으로서 웃고 반응하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코앞에 줄지어 앉은 방청객들과 보이지 않는 줄을 밀고 당기는 시트콤 세트에서 최민식은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0.005초의 연기 타이밍을 붙드는 방법을 배웠다.

메마른 시절 넘어온 우리들의 ‘삼촌’

<닥터봉>과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으로, 온 충무로가 낚시를 던지는 ‘초록 물고기’가 되어버린 한석규에게서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영화 다시 하지 않겠냐고. “당연히 해야지. 너만 하냐?” 그렇게 찾아간 <넘버.3>의 작업은 독특했다. 무슨 영화가 TV드라마도 아닌데, 신인 송능한 감독은 후닥닥 카메라를 돌리더니 대뜸 “다음!”을 외쳤다. 도리어 배우와 다른 스탭들이 당황해서 “잠깐만요!”를 연발하는 지경이었다. 팔굽혀펴기를 하는 장면에서 비행기가 지나가서 동시녹음 기사가 NG를 부르자 송 감독은 “비행기가 좀 지나갈 수도 있지 뭘 그래?” 되물었고, 최민식과 한석규의 놀이터 격투신 도중 빗방울이 떨어지자 “중간에 비가 내릴 수도 있지” 했다. “저런 사람이 사령관 되면 부하들이 많이 안 죽겠구나” 싶었던 최민식은 <넘버.3>를 찍으면서 배우들로 하여금 에너지의 정점에 달하는 귀중한 모멘트를 자꾸 놓치게 하는 촬영 관행에 낭비가 숨어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송능한 감독은 술자리에서도 솔직한 조언자였다. “고매한 선비처럼 굴지 말고, 무좀약이고 변비약이고 CF로 돈 벌어서 좋은 작품해!” 영화와 그의 두 번째 연애는 그렇게 유쾌하게 시작됐다.

<조용한 가족>(1988)에서 최민식이 분한 삼촌 역은 굳이 말하자면 작고 애매한 역할이다. 하지만 불운한 사건의 연쇄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며 열심히 삽질을 하는 ‘삼촌’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런 사람이 근방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한 가족>에서 최민식의 원칙은 간결하고도 의미심장했다. “식구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슬금슬금 욕심나는 역이 있긴 했다. <넘버.3> 때 조필 역이 은근히 부러웠던 최민식은 <조용한 가족>에서도 조카로 분한 송강호의 역할이 탐났다. <조용한 가족>은 무엇보다 양평의 매서운 추위로 기억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대형 드라이어까지 동원했지만 현장은 뼛속까지 꽝꽝 얼어붙도록 추웠다.

<조용한 가족>을 찍을 무렵 최민식은 방송 연기를 접을 결심을 했다. 미련은 거의 없었다. <서울의 달> 같은 드라마를 만나는 행운은 드물었고, 소재의 획일화와 제작 시스템의 문제는 뿌리깊어 보였다. 당시 그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식 구도의 아침 드라마에 출연중이었는데, 차에서 자면서 촬영장들을 오가는 스케줄이 너무 강행군이었던 나머지 로드 매니저가 애처로운 사과 메시지만 남기고 사라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최민식은 오래 비웠던 연극으로 돌아왔다.

유씨어터 창립 작품인 장진 감독의 <택시 드리벌>을 연습하면서 그는 하나의 대사를 갖고 일주일씩 싸우고 토론하는 무대 생활에 다시 처음처럼 적응해야 했다. 예전에는 자신도 그렇게 살았건만 어찌나 소원해졌던지 처음에는 정서불안에 걸릴 것만 같았다. <택시 드리벌>을 끝내고 나서야 겨우 그 생활이 환기가 됐다. 이제 1년에 한편은 무대에 서리라 결심한 최민식은 1999년 <햄릿>, 2000년 <박수칠 때 떠나라>에 출연했다.

아직도 가슴을 치는 강재의 울음소리

<쉬리>(1999)의 특수 8군단 소좌 박무영이 지닌 이목구비 음영과 실루엣을 갖기 위해 <조용한 가족>의 삼촌은 80kg에 육박하던 체중을 체급을 바꾼 권투선수처럼 절박하게 감량해야 했다. 추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도 따랐다. 액션하다 갈비뼈에 실금이 간 최민식에게, 정두홍 무술감독은 “나는 폐가 터진 적도 있다”는 한마디로 간단히 말문을 막았다. “조국통일 만세!”라는 구호만큼 단순 과격한 발걸음으로 최민식의 연기인생에 저벅저벅 걸어들어온 박무영은 “걸출한 영화배우 최민식”이라는 인식을 대중화하는 공적을 세웠다.

시한폭탄 같은 카리스마의 소유자라 해서 미사일을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최민식은 선연한 이미지로 승부를 걸었다. 선악구도가 뚜렷한 장르영화의 연기인 만큼 이미 관습에 의해 마름질된 캐릭터에 찰흙으로 살을 붙이는 작업이었다고 최민식은 정리하지만, 자기가 길러낸 병기 이방희를 바라보는 박무영의 시선 속에 한 남자의 번민을, 숙적 유중원을 겨눈 총구에 분신을 빼앗긴 고독한 인간의 질투를 장전한 것은 최민식이었다.

박무영과 달리, <해피엔드>(1999)의 오쟁이 진 남편 서민기는 이렇다하게 윤곽을 세울 만한 특징이 하나도 없는 비장르적 인물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정지우 감독의 말대로 최민식은 <해피엔드>에서 긴 대사도 큰 동작도 하지 않는 장면에서 섬광을 발한다. 헌 책방 구석에서 소설을 뒤적이고, 그늘에 숨어 아기 포대기를 끌어안으며 아내가 흘린 배신의 흔적을 마치 자기가 죄인인 양 숨죽여 지켜보던 서민기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주도면밀하게 복수의 칼을 휘두른다. 그 대목을 판타지로 간주하고 연기의 톤부터 다르게 잡았다는 최민식은 막바지 편집 과정에서 서민기의 복수가 현실로 바뀐 것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한다. 결혼반지를 버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은 감독이 주문한 울지 않는 연기와 본인이 낫다고 믿었던 우는 연기를 다 한 뒤, 후자를 쓰게 될 거라고 장담했고 결과는 그의 말대로 됐다.

가장 최근에 헤어진 애인이 제일 아프게 눈에 밟히듯, <파이란>(2001)의 강재는 아직 최민식의 흉중에 서성이고 있다. 원작소설을 읽고 이게 영화가 될까 반신반의했던 그는 잘 각색된 시나리오 초고와 직접 대면한 송해성 감독에 대한 믿음이 서자 곧바로 합류했다. 강재를 좀 ‘살고’ 나서 중요한 장면을 찍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감독은 촬영 스케줄에 반영해줬다. 최민식은 파이란의 장례를 보러 강원도로 향하는 강재의 여행에 영화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 여정에서 강재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자연스럽지 못하면 망하는 거였다. 최민식은 그래서 <파이란>에서 사라져야 했던 많은 장면들이 못내 아깝다. 파이란을 죽음으로 몰아붙인 인색한 소개소장과 함께 회를 먹으며 불편해하는 모습을 비롯해 보지 못한 여인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강재 마음속에 차곡차곡 켜를 쌓아가는 과정을 암시한 많은 연기들이 최종 편집본에 다 담기지 못했다. 찬송가, 목탁소리 속에 썰렁한 파이란의 빈소에서 영정을 바로잡고 꽃바구니를 괜시리 옮겨보는 강재의 뻘쭘한 뒷모습만으로 이루어진 신도 감독의 동의로 성사된 그의 제안이다. 빈소 장면처럼 <파이란>에서 최민식은 다른 경지를 열어보인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은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의 울혈과 비틀거림을 통해 역으로, 하나의 감정을 가장 온전하고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전한다. 골목에서 보스에게 전화를 거는 취한 강재의 무릎이 휘적휘적 꺾일 때, 포장마차에서 일없이 시비를 벌일 때, 방파제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읽은 그의 손이 담뱃갑을 더듬을 때 관객은 강재보다 먼저 강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뜻하지 않게 깨닫고 전율한다.

절묘한 타이밍에 찬사가 쏟아진 방파제 장면을 찍던 날. 온종일 바닷가에서 느꺼운 울음을 토하던 그날 최민식은 <오원 장승업>의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 “무조건 해야지!”가 그의 즉답. 만들려는 사람도 돈대려는 사람도 흔치 않을 영화 아닌가. 그리고 내가 언제 다시 임권택 감독이라는 대예술가와 일을 해보겠는가. 무리를 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흔쾌히 <오원 장승업>에 합류한 뒤로는 매일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든다. 스무살부터 쉰아홉살까지를 커버하는 외형적 연기의 어려움은 대예술가의 무거운 혼을 어떻게 불러내느냐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영화 속 장승업의 초상에는 임권택 감독의 자화상이 투영되는 것 같으니 더욱 어깨가 묵직하다. “내 주장을 펴기보다 감독님의 요구를 제대로 접수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번 목표라고 최민식은 겸손히 규정한다. “참, 이번에는 여복도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죽이기도 하고 저절로 죽기도 하고 통 영화 속에서 운이 없었는데.” 문득 너스레도 떨어보지만 푹 팬 미간에 괸 고민은 이미 깊어보인다.

붓끝에서 번져갈 예술가의 혼

<파이란>의 연기를 칭찬받으면 기분좋고, 흥행성적이 아쉽다는 말을 들으면 “왜 존경하는 홉킨스 형님은 잘해보겠다는데 여기까지 오셔서 해코지를 하시나?” 귀여운 불평을 하기도 하지만, 최민식은 이제 세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다만 죽기 전까지 몇명의 인생을 살 수 있을까 가끔 헤아려본다. 영화 속에서 단 한획을 긋더라도 ‘간지’를 제대로 내기 위해 동양화를 배우며 <파이란>의 잔영을 묵향으로 지워가고 있는 요즘 최민식은 대나무를 그린 그림을 보면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귓전에 들린다. <오원 장승업>이 끝날 무렵 그는 어쩌면 오원의 그림처럼 멋대로 흩어진 갈필 끝에서 번져난 선 하나가 마치 우연처럼 가장 정묘한 묘사가 되는 배우로 서 있을지도 모른다. 아홉편의 영화를 돌아보고 한편의 영화를 내다보며 최민식은 “밑도 끝도 없는 작업이에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또 무당처럼 남의 혼을 사는 배우로서 “한시적인 삶에 대한 인식”을 뚜렷이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자기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전혀 모르고 있는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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