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프랑수아 오종과 <스위밍 풀>을 이해하는 키워드 [2]
2003-09-04
글 : 정안나 (연극인)

감금 L’enfermement

오종은 특정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을 제시하고 그들을 그 안에 가둔다. 그러나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로 갇히는 것은 물리적 개념의 공간이 아닌 자의식과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공간이다. ‘식인 괴물에게 갇혀 학대받는다’는 상황의 특수함을 제거하고 보면 공포영화판 헨젤과 그레텔, <범죄의 연인들>이 갇혀 있는 곳은 죄의식이라는 거대한 심리적 공포 속이고, 남편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의 손길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랑의 추억>의 마리도 남편의 자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의식 속에 갇혀 있는 한 여자의 초상인 것이다. <스위밍 풀>의 사라 역시 마찬가지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는 하지만 작가로서도 여자로서도 고갈되어가는 그녀 역시 수영장의 물처럼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언어가 주는 음악성과 신비함 La langue, la musicalite et son mystere

오종은 언어가 주는 음악성의 신비를 실험하는 감독이다. 그는 <뜨거운 돌 위의 물방울>에서 프란츠가 반복해서 되뇌는 하이네의 시를, 독어가 주는 음악성과 신비를 실험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자막처리하지 않았다. 언어에 대한 그의 실험은 <사랑의 추억>을 통해 계속된다. 그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영국 배우, 샤를롯 램플링을 기용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영어 악센트가 섞인 프랑스어의 독특한 반향을 경험하게 하며 그녀에게도 역시 자막이 없는 상태로 버지니아 울프- 원어로 된- 를 읽게 한다. 자막은 있지만 프랑스 감독에 의해 영어 위주로 만들어진 영화, <스위밍 풀>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그가 <스위밍 풀> 전반에 걸쳐 사용하는 부분적 프랑스어 대화 역시 앞서의 실험을 뒤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 말하는 부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프랑스어로 말할 때 사라는 지식인 계층이 사용하는 고급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한껏 우아함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줄리는 비속어와 욕이 사이사이를 채우는, 일상의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언어적 대척점은 한 인간 안에 잠재된 이면을 드러내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사라라는 여자가 가진 욕망을 보여준다. 아무렇게나 말하고 아무렇게나 먹고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고자 하는 욕망을 말이다.

살아 있는 물 L’eau vivante

프랑수아 오종이 그의 전 작품을 통해 천착하는 물에 대한 이미지는 그의 영화와 함께 생성하고 소멸하는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바다를 보라>에서는 심리적 억압상태의 근원으로, <범죄의 연인들>에서는 온몸이 빠져들 것 같은 늪의 형태로, <뜨거운 돌 위의 물방울>에서는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절망의 눈물로, <사랑의 추억>에서는 실종 혹은 자살의 진원지인 막막함의 바다로 그려지던 물은 마침내 <스위밍 풀>에 이른다. 여기서 수영장은 그가 각기 다른 얼굴로 그리던 물의 복합적인 메타포(metaphore)라고 할 수 있다. 사라가 별장에 도착해서 들여다보는 닫힌 수영장은 한없이 흐르는 강이나 바다가 되지 못하고 건조하게 말라버린 그녀의 삶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열정도 비밀도 간직하지 못한 채 흐르지 않고 멈춰 있는 물. 아무도 몸을 담그고 싶어하지 않는 부동액으로서의 물은 작가로서 혹은 여자로서 고갈되어버린 그녀의 내면이다. 그러나 그대로 영원히 썩어버릴 것 같았던 그녀, 내면의 수영장에 살아 있는 영감(inspiration)이 찾아온다. 줄리라는 이름의 젊음과 도발, 그리고 소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줄리의 출현으로 닫혀 있던 수영장은 움직이는 물, 살아 있는 물로 되살아난다. 오종이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수영장은 줄리의 공간이다. 줄리는 수영장의 안과 밖을 오가며 즐기고 심지어 살인까지 한다. 그녀에게 ‘수영장은 흥분도 없고, 위험도 없는 거대한 욕조 같은’ 이미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거대한 욕조는 줄리에게 틈나는 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안전한 ‘자궁(혹은 모성: maternite)’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영장 안에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그녀가 수영장 밖에서는 갓난아기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해 보이는 것이다.

줄리, 수영장의 아이

결과적으로 볼 때 오종은 영화 속에서 무수히 되풀이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줄리가 수영장에서 태어난 혹은 사라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암시를 던지고 있다. 사라는 줄리로 하여금 그녀에게 내내 금지되었던 모든 일들을 행하게 함으로써 욕망을 대체하다가 급기야 자기 자신도 일탈하고 만다. 스스로에 의해 가둬진 그녀가 늘 꿈꾸던 변신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라와 줄리의 대비, 그리고 사라의 변화는 영화 속에서 몹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이다. 몸매 유지를 위해 다이어트 콜라와 다이어트 요플레만 먹으면서 우아함을 유지하고 일을 위해 끊임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사라와 그저 잘 먹고 잘 놀 뿐이며 삶의 목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줄리의 대립은 한 인간 속에 내재된 아이러니와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신경전에 지친 사라가 자기 속에 있는 또 다른 얼굴, 줄리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함으로써 영화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러므로 사라가 줄리가 남긴 프와그라와 포도주를 몰래 먹는 장면이 줄리와 식사하는 장면으로, 그리고 초콜릿이 가득한 디저트를 광적으로 먹는 사라의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 전염(contamination)되어가고 있는 사라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재미를 더하는 요소가 있다면 사라가 줄리의 섹스 파트너들을 하나같이 추남들로 상상해냈다는 점이다. 오직 줄리와의 섹스를 거부해 살해당하는 프랭크만이- 사라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남자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피조물에게조차 질투하는, 사라의 지독히 인간적인 면모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 속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고 도덕적인 면을 드러내는 사라의 약점이기도 하다. 또 하나, 줄리의 짓이라고 판단되는- 혹은 사라 자신에 의한- 사라 방의 ‘십자가 제자리 찾기’는 신을 부정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개인의 혼돈을 의미한다.

난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

“도대체 저 여자가 왜 저러는 거야?”, “저 여잔 또 누구지?”, “저건 또 뭐지?” 하는 식의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관객의 머릿속을 벌레처럼 버글거리며 기어오를 즈음 오종은 기다렸다는 듯 의문의 해결점들을 하나씩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해결점 뒤에는 관객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질 거대한 의문부호가 도사리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 객석에서 한바탕 웅성거림이 시작된다. 이게 뭐야?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고 멍하니 자막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는 사람들도 있다. 반전에 어느 정도 훈련이 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잠시 눈동자를 오므리게 되는 것이다. 어렵다고? 아니다. 전체를 보란 말이다. 전체를. 그가 노린 것은 바로 그거다. 여러 개의 현란한 꽃나무들을 배치함으로써 숲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거두는, 관객으로 하여금 멍한 순간과 아아, 하는 순간에 느끼는 깨달음(?)의 카타르시스를 주기 위해 그는 도발하고 자극하고 현란하게 어지럽힌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거야. 그녀는 멋지게 다시 태어난 거야. 당신도 한번 해봐, 난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 라고.

우리는,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악동(L’enfant terrible)에서 축복받은 아이(L’enfant gate)로 진화한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스위밍 풀>에는 수영장 속에 가둬진 물처럼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혹은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엿보인다. 껍데기를 벗고 날고자 하는, 나비의 욕망은 이미 게이임을 커밍아웃한 오종의 성적 정체성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또한 50대 여인이 자기 속의 또 다른 10대를 만난다, 는 설정에서 <스위밍 풀>은 60대의 보르헤스와 20대의 보르헤스가 만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타자’(l’autrui)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마치 사라의 대사와도 같은 ‘타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긴 글을 이만 마칠까 한다.

“만일 이 아침과 이 만남이 꿈이라면 우리 둘은 서로가 꿈꾸고 있는 바로 그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아마 우리는 이미 꿈을 꾸기를 멈췄는지도, 아직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어찌됐든 우리의 명백한 의무는 마치 우리가 세계와 태어난 것과 눈으로 보는 것과 숨 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꿈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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