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프랑수아 오종과 <스위밍 풀>을 이해하는 키워드 [1]
2003-09-04
글 : 정안나 (연극인)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살아있는 물에 관하여

프랑스영화는 지루해…. 그녀, 혹은 그가 말한다. 몇몇의 예외는 있지만 프랑스영화는 대개 지루하다. 그들은 현실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 갇혀 있는 우리, 모르모트의 운명을 회고하고 검증하며 그 안에서 절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가 거대 자본주의 산업의 일환으로 떠오르고 할리우드영화들이 프랑스 국내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영화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국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전폭적 지지와 사랑을 등에 업고, 프랑스 영화적 메타포를 진화해가면서 말이다.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의 성공이 그렇고, 로 세계적 관심을 모은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스위밍 풀>이 그렇다. 전자가 유려한 미장센과 색채감각, 오컬트적 구성으로 메타포의 재미를 더해줬다면, 후자는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을 거대한 메타포 안에 머물게 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도발자에서 창조자로의 진화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보는 일은 즐겁다. 그가 볼거리들로 둘러싸여 실상 장식을 떼어내고 보면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할리우드식 허무함을 양산하지 않는, 보기 드문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그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거운 주제들- 살인, 유괴, 감금, 식인, 실종 혹은 동성애 등의- 을 통해 삶의 진리를 가볍게 풀어낸다. 그에게 도발(provocation)은 대중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현란한 장치일 뿐이다. 그 선정성과 도발로 인해 프랑스 일부 평단으로부터 ‘악동’(enfant terrible), 혹은 ‘영리하지만 치기어린’ 감독으로 오인받기도 했지만 그는 단순히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97년의 첫 장편 <바다를 보라>(Regarde la mer) 이후 현재까지 총 7개의 장편을 만들어낼 정도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고 있는 프랑수아 오종, 그는 이미 첫 번째 변이를 맞았다. 부재(l'absence)와 그로 인한 결핍(le manque)을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여자, 마리를 통해 세련된 화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의 추억>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전보다 덜 도발하지만 더 깊이있게 스며든다.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수아 오종을 재능은 있었지만 진화하지 못했던 여타 다른 프랑스 감독들- 레오스 카락스나 뤽 베송, 장 자크 베넥스 등의- 과 차별화하게 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전작 <바다를 보라>나 <시트콤> 혹은 <범죄의 연인들>에서 보여준 훔쳐보기(voyeurisme)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신작 <스위밍 풀>에서 그는 여전히 자극적인 시점숏(camera subjective)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육체와 내면을 비춘다. 여전히 그에게 영화란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특이한 경험을 통해 가치기준을 뒤흔들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들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그가 의도한 대로 종종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그의 영화들 속에 좀더 근접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몇개의 개념적 키워드(mot-cle)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실과 환각 La realite et le fantasme

<사랑의 추억>의 마리, <스위밍 풀>의 사라는 현실과 환각의 모호한 지점에서 헤맨다. ‘실재하는 것은 무엇이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오종이 인터뷰에서 말한 바대로 그들의 삶에서 그 경계를 나누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마리와 사라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마리의 환각이 정신이상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사라의 그것은 의도된 창작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모사꾼과 그의 꼭두각시, 그리고 그들의 희생양들 la manipulatrice, son marionnette et ses sacrifices

이야고 Vs 오델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죽는 데스데모나식의 극적 구도는 그가 즐겨 쓰는 테마다. <바다를 보라>의 사샤, <범죄의 연인들>의 뤽은 그들의 조종자인 타티아나와 알리스에 의해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아기와 사이드가 있다. <스위밍 풀>의 사라와 줄리, 그리고 그들의 희생양 프랭크가 이에 해당하지만 오종은 여기에 누가 누구를 조종하는지 모호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극적 긴장을 더해주고 있다.

결핍 또는 부재로 인한 상처 Trauma par Le manque ou l'absence

<바다를 보라>의 사샤는 남편의 부재로, <뜨거운 바위 위의 물방울>의 프란츠는 애정결핍으로, <사랑의 추억>의 마리는 남편의 실종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외상에 시달리고 심지어- 프란츠의 경우- 자살하기까지 한다. 그들의 상처가 도저한 치유 불가능의 상태임에 반해 영감의 부재에 시달리는 <스위밍 풀>의 사라는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면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스위밍 풀>은 오종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해피엔드로 끝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인물에 관한 전시 L’exposition d’un personnage

<사랑의 추억>은 대사가 거의 없는 20분 동안의 도입부- 이 영화는 도입부를 먼저 찍은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를 통해 장과 마리의 25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이 대화가 필요 없을 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며 동시에 전혀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다른 작품들 역시 오종은 같은 도입부, 즉 인물의 전시를 통한 묘사로 그들의 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다.

공존의 어려움 Difficulte de la coexistence

파스빈더의 희곡을 영화화한 <뜨거운 돌 위의 물방울>에서 오종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동거에서 파생되는 고통과 불편함을 말한다. ‘사랑은 없다. 오직 사랑의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파스빈더의 생각을 계승한 오종은 중 하나인 원로배우, 다니엘 다리외의 노래를 통해 ‘행복한 사랑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위밍 풀>의 사라도 줄리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거의 기절할 지경이다. 그러나 줄리가 내는 소음과 그것을 참지 못하는 사라로 인해 점점 악화되던 둘의 관계가 공존은 불가능하지만 관찰은 가능하다, 는 사라의 방향전환으로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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