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스캔들>의 세 배우 [4] - 이미숙
2003-09-1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이혜정
배우는 포괄적으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해요

“제일 선배냐고요? 요새는 어디를 가도 거의 다 내가 선배죠.” 그리고는 의상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큰소리를 던진다. “야, 담배들 좀 그만 펴! 머리아파 죽겠어.” 그런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 허허 웃으며 아무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걸 보면 이 말도 맞는 것 같다. “98년부터 신인감독들하고 많이 해왔어요. 나는 벽이 없어요. 어떨 땐 지금 세대하고 더 많이 통하기도 하고. 단절되는 법이 없어요. 오히려 더 앞서는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글쎄, 옛날 얘기 할 새가 어디 있어요.” 어떤 여배우들은 이 나이쯤 되면 스스로 아줌마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광고도 바꾸고, 영화 속의 역할도 바꾸면서, 원숙함이라는 자기위안으로 ’포기’를 위장하려든다. 이미숙에게는 그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지금 그녀가 맡고 있는 역은 욕망의 육체를 걸고 ‘내기를 거는 여자’,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조씨부인이다.

이미숙이 오랜 공백을 깨고 “소년 같이 얌전한” 이재용 감독과 영화 <정사>를 같이하게 된 것은 “10년 뒤에 영화를 봐도 느낌 좋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한 그 젊은 생각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생각해봐요. 지금 5년 지났잖아요. 오히려 너무 앞섰던 거 아닌가 몰라.” 그때, <정사>를 촬영하며 이재용 감독은 다음 영화 <스캔들…>에 ‘요부’가 필요하다고 했고, 농담조로 오가던 캐스팅 제의는 현실이 됐다. 이미숙은 조씨부인 역을 위해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를 봤지만, 메르티유 백작부인 역을 했던 글렌 클로즈의 연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사실 “영화도 조금 지루했다”고 한다). 그런 걸 염두에 두기보다는 “나름대로 해석한 그 인물에 쉽고 정확하게”다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거죠. 전체는 감독이 보면 되고, 배우는 자기 배역에서 10가지 정도를 준비하면 돼요. 그러면, 그게 아닌 다른 걸 감독이 요구할 때도 훨씬 쉬워져요. 딱 하나만 준비하면 그때부터 틀어지는 거죠. 봐요, 반찬을 많이 갖다주면, 그 안에서 고를 수가 있잖아요. 김치냐 콩나물이냐 하는 정도죠. 배우는 포괄적으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그 연기관에 따라 이미숙이 설명하는 조씨부인은 이런 사람이다. “이조시대건 현재건 늘 존재하는 인물이에요.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앞선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시대가 이해하지 못한 것뿐이지 애정면에서 보면 ’난’ 여자죠. 남자들하고 동등한 입장을 갖고 싶어하는 여성의 파워도 가지고 있고.” 아마도 이 점이 이미숙을 내기의 요부로 초대했을 것이다.

사실, <정사>에서도 이미숙은 이미 ‘내기 게임’의 한가운데 있었다. <베사메무쵸>에서는 가정을 지탱하기 위한 수동적인 내기에 걸려들었고, <울랄라 씨스터즈>에서는 사내들과의 웃음내기에서 승리했고, <스캔들…>에 이르러서는 끝내 힘을 부리는 내기의 주인이 된 셈이다. 말하자면, 이미숙에게는 정도를 지키는 정숙함의 이미지가 있다. 바로 그 믿음직스런 이미지를 근거로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이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녀가 일탈하기 때문에(그럴 것 같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어울리기 때문에) 관객은 긴장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스캔들…>에서 주인공 조원은 “오직 갖고자 하는 마음과 가질 수 없는 것을 부수고자 하는 마음, 두 가지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조씨부인을 떠올린다. 이런 역을 하면서도 막돼먹은 표독함으로 빠지지 않을 경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선 최고의 카사노바와 내기를 걸 수 있는 여자, 그리고 또 이길 것 같은 여자, 매혹과 열정으로 아름답게 독기를 부릴 줄 아는 배우, 이미숙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원래 “아줌마 역할은 안 하지만, 색다른 면이 있어서 하게 된” 다음 영화 <…ing>에서 우리는 정말 새로운 아줌마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조씨부인 같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대답하는 이미숙. 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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