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스캔들>의 세 배우 [3] - 배용준
2003-09-12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배우로서 뭘 얻었냐구요?비밀입니다

경력 10년차가 어디서나 대접받는 건 아니다. 대접을 받는다 해도, 경력 10년차가 늘 당당하지만은 않다. 영화 <스캔들…>의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하는 배용준의 태도가 뜻밖에도 그랬다. 한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는 언제든 뒤로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방송경력 10년의 연기자에게, 혹은 그 10년 동안 스타의 고도를 변함없이 유지해왔던 프로페셔널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수세였다.“‘1+1=2’처럼 수학적 연기를 계속 하다가 연기 자체가 감정의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 거 같아요.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하는 수준인데요, 뭐. 기어다니는 정도죠.” 그에게는 <스캔들…>의 선택이 매체를 달리하는 것 이상의 의미였던 것 같다. 스크린의 은막을 두르고 한번도 나가본 적 없는 온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맞아야 될 찬 바람은, 이전과 다른 연기의 영역이라는.

“영화가 훨씬 여유있어요. TV가 좀더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순발력을 요하는 매체라면, 영화는 핸드메이드 같은 거죠. 저는 이전보다도 더 게을러졌어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이 말은, 테이크를 몇번을 가도 매번 똑같기 쉬운 연기로부터, 그리고 그 연기가 요구하는 반복적인 감정의 훈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연기에 대해 자신이 없지만 예전에 하던 대로 반복적인 감정을 보여주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내가 잘했다고는 얘기 못하지만, 발전은 있었어요.” 기성복이 어떻게 나올지는 그것을 찍어내는 기계에 달려 있고, 핸드메이드는 꿰매는 사람 마음이다. TV에서의 연기가 언제나 빡빡하고 틀에 박힌 것은 아니었겠지만, 오랫동안 익숙해 있었던 드라마보다 영화에서의 연기가 더 자유로웠더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었다.

영화를 하기 전에도 그가 연기에 욕심을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흡연자인 그는 담배를 끊었다가 피웠다가를 반복해왔다고 했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한두 달 정도 끊었다가 들어가면 다시 피우고 그래요. 일단 작품을 시작하면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야 되니까. 그렇지만 들어가기 전엔 끊어요. 내 의지를 시험하는 거죠. 드라마 때부터 그렇게 해왔어요.” 이 습관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촬영 전 두달 동안 지속됐고, 자신의 의지를 시험할 만큼의 욕심은 첫 영화의 촬영현장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꼭 한번은 더 갔어요. 모니터 보기도 전에, 감독님이 컷, 하고 외치는 순간 ‘감독님, 딱 한번만 더!’ 그랬죠.” 야외촬영이 대부분 낮신이라 해를 넘기면 찍을 수 없는 현장에서, 게다가 분장이고 조명이고 촬영 준비도 보통보다 까다로웠을 사극 현장에서 그가 부렸던 고집이었다.

“내가 몰랐던 표정이 나와요. 나는 그런 표정이 나한테서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속성을 끄집어냈다는 거죠. 그런 작업의 묘미를 느끼게 됐어요. 끝나서 아쉽죠. 재밌었어요. 같이 했던 시간들이 기억이 나고 또 같이 했으면 싶고.” 설레는 저 표정이 실은, 드라마와 CF에서 보여줬던 미소와 혼동이 됐었다. 방송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져 자연인 배용준의 삶조차 그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짐작도 한두 사람만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그의 말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예상보다 지나치게 수세적이다 싶었던 이 느낌이 그 사람의 프로페셔널리즘에 속은 결과라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뭐든지 처음은 특별하지 않느냐는 말까지도 저버릴 순 없는 일이니까. “이 작품을 하고 나면 배우로서 난 얻는 게 있다, 분명히 뭔가 얻는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얻었구요. 그런데 뭘 얻었냐고 물어본다면 난 말하기 싫어요. 섣불리 그런 걸 말하기는 싫은 거죠.” 굳이 입을 통해 알아내는 것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듯싶다. 그가 직접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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